아내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34]

양기화
발행날짜: 2015-04-17 05:23:01
  • 우리는 스페인으로 간다

돈키호테가 거인과 싸웠다는 콘수에그라(1)

여행 11일차이다. 5시반 모닝콜이 울리는 소리에 눈을 뜰 깨가지 곤하게 잠들었던 것을 보면 여행이 힘든 탓도 있겠지만, 스페인 시간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서울로 돌아가는데, 다시 서울 시간에 적응해야 할 모양이다.

오늘 일정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무대가 되는 라만차의 콘수에그라와 천년의 고도 톨레도를 다녀와서 프라도미술관을 관람하는 순서로 되어 있어, 날아다녀야 할 판이다. 모름지기 여행지에서 충분히 머물면서 그곳에 숨겨진 것들을 오롯이 느껴야 제대로 된 여행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보고 싶은 것은 많은데 시간이 없으니 시간을 분단위로 쪼개서 극한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 같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정 때문에 몸살을 앓는 사람까지 나올 지경이 이다. 그래도 그저 눈도장이라도 찍고, 다녀왔다는 인증샷이이라도 찍어 나도 가보았다는 위안이나 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7시 반, 약속한 시간에 버스가 출발하고 버스체조로 하루 일정을 시작한다. 고개를 숙이고 뒷목을 주무른다. 동시에 목걸이 등 귀중품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한다. 이어서 목을 오른쪽, 왼쪽으로 돌린다. 가슴을 활짝 펴보고 다음은 어깨를 으쓱으쓱한다. 이어서 어깨를 앞뒤로 돌린다. 손은 쭉 올리고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오른쪽으로 그리고 왼쪽으로 기울인다. 마지막으로 혈액순환에 좋다는 박수를 크게 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오늘 조형진의 아침의 음악방송은 서울에서 공연한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늘의 첫 번 째 방문지가 사돈댁이라는 뜻의 콘수에그라(Consuegra)라는 이름의 풍차마을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용으로 착각하고 무찌르기 위하여 돌진했다는 그 풍차 말이다. 이어서 조형진 디제이가 직접 불러주는 '베사메무초'다. 마지막 방송에 대한 아쉬움을 담은 조가이드의 마음이 담긴 선물이다. 듣고 보니 노래 솜씨가 아주 좋아서 가수를 해도 좋을 것 같다.

콘수에그라로 가는 길의 여명.
숙소를 나설 때는 사위가 캄캄했지만, 어느새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면서 해가 떠오른다. 콘수에그라로 가는 길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추수가 끝나 텅 빈 밀밭이 지평선까지 펼쳐 있다. 다행히 바람이 많은 덕에 이 너른 들판에서 수확한 밀을 풍차로 도정할 궁리를 해냈으리라. 비유를 참 잘하는 조형진 가이드는 네덜란드의 풍차가 온실의 꽃이라고 하면 스페인의 풍차는 야생화와 같다고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세계인의 애독서가 되면서 카스티야의 라만차 지역은 자연스럽게 돈키호테를 여행상품으로 연결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지역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풍차마을인 콘수에그라 혹은 캄포 데 크립타나를 방문해서 돈키호테 풍차에 돌진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는 일정을 잡는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는 콘수에그라가 여행일정에서 빠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라만차 지역에서 풍차마을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에게서 입장료를 받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마드리드에서 풍차 하나를 보기 위하여 1시간반을 달려오는 것인데, 입장료도 입장료이지만, 입장수속을 하는데 시간을 써야 하는 상황을 여행업계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이 지역에는 돈키호테가 지난 길을 따라가는 트레킹코스도 있다고 한다.

▲돈키호테의 길 < 인터넷 사이트에서 인용함>(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돈키호테의 길'은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주인공 라만차의 히달고 돈키호테가 세 차례에 걸쳐 라만차, 아라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 이르는 여행을 하는 것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사실 주로 라만차 지역을 여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1권을 두어 차례나 꼼꼼하게 읽어보았지만, 돈키호테가 지나는 지역을 분명하게 밝힌 것은 시에라 모레나산맥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고사(Romagosa)의 설을 바탕으로 1780년 스페인 왕립아카데미가 돈키호테의 길을 정했다. 모두 148개의 읍을 통과하는 돈키호테의 길은 2,000km가 넘는다고 한다. 이 길은 10개로 구분되어 있는데, 우리가 간 길은 마드리스에서 콘수에그라를 거쳐서 톨레도로 이동했으니, 여덟 번째 코스인 알마그로(Almagro)에서 콘수에그라를 경유하여 톨레도에 이르는 길인 듯하다. 돈키호테의 길은 2007년 EC의회에서 유럽문화의 길로 지정되었다. 그 밖에도 돈키호테의 길(The route of Don Quixote)이라고 하는 산악자전거길이 열 개나 개설되어 있는데 2500여개의 표지판을 세워서 이용에 불편함이 없다고 한다.

안개에 둘러싸이는 콘수에그라 마을.
콘수에그라 마을에 가까워지면서 버스가 홀연히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떠올랐던 해도 안개에 그 빛을 잃어버리고 형체조차 사라진다. 드넓게 펼쳐진 밀밭이 밤새 식으면서 대기의 수증기가 작은 물방울로 뭉친 것이리라. 하지만 마을에 가까워지면서 안개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마을 끝에 안개를 막는 방어막을 쳐둔 모양이다.

풍차가 늘어선 언덕에 올라서 보니 안개가 마을을 포위하고 있다. 마을이 안개에 갇힌 섬모양이 되고 말았다. 마을에서 먼 곳은 그저 높다란 산꼭대기만 안개 위로 올라 숨을 할딱이는 것 같다. 그리하여 마을이 안개에 갇힌 섬 이 되었다. 그런데 마을로 밀고 들어오는 안개의 공격이 만만치 않은 듯 구경하고 내려올 무렵에는 안개가 마을을 함락하고 풍차언덕을 슬금슬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평소 바람이 거세다는 풍차언덕에 바람이 사라진 탓인가 보다.

마을을 덮쳐오는 안개를 바라보면서 신예작가 안현서가 'A씨에 관하여'에서 밤안개를 서술한 대목이 생각난다. "밤안개는 강처럼 흘러가지만 생물을 몸에 품지 않아. 그런 면에서 오히려 안개 그 자체가 살아 있다 말할 수 있어. 그 누구도 이 밤안개의 시작과 끝을 본 적이 없지. 한마디로 알 수 없는 존재인거야. 그래서 안개는 그 어떤 이름 아래 구속되지 않고 의미를 부여받지 않아. 그저 떠돌 뿐이야.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지. 모두의 눈이 사라진 밤을 틈타서 말이다."

바람에 실려 떠도는 안개는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지만,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된다. 고향집에 다녀오노라면 공주-서천 구간의 고속도로에서는 갑작스럽게 몰려온 안개 때문에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금년 2월 11일 오전에는 가시거리 10미터에 불과한 짙은 안개 때문에 인천공항고속도로에서 105중 추돌사고가 발생하여 2명이 사망하고 63명이 부상하기도 했다.

콘수에그라 마을 언덕에 서 있는 풍차(좌)와 돈키호테의 눈을 피해 풍차 안을 엿보는 필자(우).
바람이 없는 탓인지 풍차가 돌아가지 않아 아쉽다. 예닐곱 개의 풍가 가운데 하나가 문을 열고 있어 빼꼼이 들여다보았더니 기념품을 팔고 있는 여성과 눈길이 마주쳤다. 그리고 보니 밀을 빻는 방아는 볼 수 없고 기념품 판매대가 풍차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벽에도 비슷한 것들을 걸어놓고 있다. 기념품을 파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풍차 을 어떻게 빻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캄포 데 크립타나에는 가보지 못했으니 돈키호테가 돌진했던 풍차가 콘수에그라에 있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캄포 데 크립타나에 있는 것이었는지 헷갈린다. 다만 콘수에그라의 풍차는 마을 뒤편에 적지 않게 가파른 언덕위에 서 있는데, 공간이 그리 넓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에서 보는 캄포 데 크립타나의 풍차는 일단 널찍한 공간에 서 있고, 지금은 10개가 남아 있지만 과거에는 32개가 서있었다는 점에서 콘수에그라보다 후한 점수를 주고 싶어진다. 시공사판 '돈키호테'에 보면 "그러다가 두 사람은 들판에 있는 30~40개의 풍차를 발견했다."라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 편에서 자세하게 늘어 놓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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