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39]

양기화
발행날짜: 2015-05-08 05:32:58
  • 우리는 스페인으로 간다

스페인 미술애호가들의 자존심, 프라도 미술관(1)

이날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 될 프라도 미술관에 도착했다. 대영박물관과 루브르박물관에 이어 세계 3대 미술관의 자리를 놓고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경합할 정도로 뛰어난 미술관이다. '스페인 미술관 산책'에서 저자는 "컬렉션의 양이나 미술관의 규모, 컬렉션의 역사, 뛰어난 접근성, 대중을 위한 교육 시스템 등을 볼 때 최고의 미술관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없다."라고 평가했다.

프라도 미술관은 8000점의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중 3000점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은 스페인왕실이 구입해서 소장한 것들로 다른 미술관과는 달리 약탈품이 없다는 점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단다.

약탈당한 소장품을 돌려달라는 요구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다른 미술관과 비교하다 보니 이승하의 시 '탑쌓기와 피난가기'의 마지막 연이 생각난다. "(…) 내 재산 보시해서 쌓은 탑과 / 남의 재산 약탈해서 쌓은 재산 / 세상의 불협화음 너무 일찍 알아 / 절간 문 닫아걸고 절 바깥으로 안 나간 / 최초의 세계인世界人 혜초여" 물론 불교가 융성하던 신라와 전란에 휩싸여 있던 중국을 비유한 것이지만 프라도미술관에서 음미해 보면 실감이 나는 듯하다.

프라도 미술관은 15세기부터 스페인 왕들이 수집한 작품들과 왕실화가의 작품들을 기반으로 하여 1819년에 설립되었다.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직후라서 스페인 국내 사정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스페인 왕 카를로스3세는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미술관의 개관을 도울 정도로 스페인 사회의 예술에 대한 애정은 뜨거웠다. 마드리드의 솔광장에 서 있는 청동기마상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보면 스페인의 지성들은 시대적 상황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잘 파악하는 것 같다. 그리고 대중들 역시 열렬히 호응하는 것 같다.

1898년 쿠바를 둘러싼 미국과의 전쟁(미서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스페인 제국의 영화가 스러질 위기에 닥쳤을 때 스페인의 지성들은 새로운 가치관의 창조를 통하여 국내정세를 반전시키려 했다.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1920년 3월부터 열 차례에 걸쳐 대중을 상대로 하여 '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강연을 열었다는데, 엄청난 수의 청중이 몰려드는 바람에 대형 강의실을 따로 준비해야 했다는 것이다.

오르테가는 이 공개강의를 통하여 '대중이 지배하는 사회'를 예언하여 스페인 문화의 르네상스를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첫 강의에서 오르테가는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이라고 간주하는, 실은 진정한 삶을 감싸고 있는 껍질을 뚫고 우리에게 비밀로 남아 있는 존재 본연의 존재, 순수 내적 존재의 영토로 회귀할 것(5쪽)"이라고 전체 강연의 개요를 요약하면서 "철학적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내 강의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6쪽)"이라고 선언하였다. 나라가 어려울 때 일수록 각자의 몫을 다 하는 사회라야 지속발전이 가능하다는 생각과 함께 2015년 대한민국은 과연 제 몫을 다하고 있는가 묻고 싶어진다.

프라도 미술관(좌. 위키피디아에서 인용)과 산 헤르니모 성당(우).
다시 프라도 미술관으로 돌아가서, 프라도 미술관은 두 개의 건물로 구성된다. 19세기에 건축된 본관 건물과 20세기 들어 개축하여 미술관에 편입시킨 산 헤로니모 성당의 일부이다. 이날 프라도 미술관 구경을 앞두고 최경화의 '스페인 미술관 산책'을 꼼꼼하게 읽어 준비하였지만, 막상 미술관에 들어서 보니 책에서 읽은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결국 조형진 가이드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서 그림감상을 하게 되었다. 여행 내내 스페인, 모로코 그리고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요약해서 설명해준 것만으로도 그의 해박한 지식에 놀라고 있었는데, 프라도에서는 미술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음을 엿볼 수 있어 놀라움이 더했다.

▲프란시스코 프라딜라 이 오르티스의 「‘미치광이’ 후아나 여왕」<출처:위키피디아>(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조형진 가이드가 처음 일행들에게 안내한 그림은 의외로 프란시스코 프라딜라 이 오르티스의 <'미치광이' 후아나 여왕>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야의 <옷 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나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나중이었다.

후아나 여왕은 레콩키스타를 완성한 카스티야의 이사벨1세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2세왕의 셋째 딸로 아주 총명하고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며 아름답기까지 했다고 한다. 후아나 공주의 비극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부르고뉴 공국의 펠리페 공작을 만나 결혼하면서 시작되었다.

놀라우리만큼 잘 생긴 공작은 '잘 생긴 펠리페'라는 별명에 더하여 성욕까지 강했던 모양으로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던 것이다. 펠리페는 후아나의 미모를 탐했던 것이고, 집착이 강하고 질투가 심했던 후아나는 펠리페의 모든 것을 소유하려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후아나는 외할머니의 우울증까지 이어받았다.

이사벨1세 여왕이 죽은 뒤 후아나가 카스티야의 여왕이 되자 아버지 페르난도2세 왕과 남편 펠리페는 카스티야의 권력을 놓고 정면충돌을 하는 동안 남편의 외도로 시작된 후아나의 우울증은 점차 심각해졌다.

그런 와중에 펠리페가 앓아눕더니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돋고 피를 토하다가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외도 때문에 속을 끓이던 남편이었지만 지극하게 간호를 하던 후아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절망하면서도 남편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하자 결국은 그라나다에 매장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그라나다로 가는 길에는 쉴 때마다 관을 열어 남편을 어루만지곤 했다. 남편에 대한 사랑이 병적인 집착으로 나타난 것인데 사람들은 후아나가 시체와 사랑을 나눈다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프란시스코 프라딜라 이 오르티스( Francisco Pradilla y Ortiz)는 바로 이 광경을 <'미치광이' 후아나 여왕>에 담았다. 구름 덮인 하늘을 배경으로 벌판에 세운 관을 망연자실 지켜보는 여왕의 뒤편으로 늘어서 있는 수행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세찬 바람에 옆으로 누운 촛불은 후아나의 앞날을 나타내는 듯하다.

아버지 페르난도 2세왕은 후아나가 병들었다고 하면서 토르데시야스성에 가두고 권력을 차지했다. 이렇게 유폐된 후아나는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아라곤의 여왕까지 되었지만, 야심 많은 큰 아들 카를로스가 섭정을 하면서 어머니를 풀어주지 않는 바람에 모두 46년의 세월을 성에 갇혀 지내다가 1555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과연 정말 미쳤던 것일까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출처:위키피디아>(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다음 순서는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작품들이다. 역시 <옷 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에 앞서 조형진 가이드가 일행을 안내한 그림은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이다.

<1808년 5월 2일>은 이집트에서 데려온 마멜루코 용병과 프랑스인들로 구성된 나폴레옹 군대에 맨손으로 맞선 마드리스 시민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때까지 유행하던 역사화에서는 민중을 이끄는 영웅이 등장하는 모습과는 달리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몸을 던져 적군을 무찌르는 모습이다.

그리고 <1808년 5월 3일>에는 봉기에 가담한 시민들이 나폴레옹군에 처형당하는 모습을 그렸다. 죽는 자들과 죽이는 자들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뒷모습을 보이는 죽이는 자들의 표정을 볼 수 없지만 경직된 자세로 보아 전날의 시민봉기로 죽음을 맞은 동료들에 대한 복수심이 불타고 있는 표정일 것이다. 반면 죽는 자들의 표정은 다양하다. 차마 죽음을 마주하기 두려워 손으로 눈을 가린 사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 등.

하지만 고야가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은 죽는 자들의 가운데 우뚝 서 양팔을 벌리고 죽음을 맞는 검은 피부의 젊은이다. 화폭 전체가 어두운 분위기에 흰 상의와 노란 바지가 두드러진 그 남자의 모습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죽는 자들 가운데 귀족이나 성직자들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도 조 가이드는 빠트리지 않는다. 그들은 침략자들과 이미 결탁하였기 때문에 봉기 현장에 나타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시민봉기는 이방계 혈통임을 짐작케 하는 검은 피부의 사람을 비롯한 시민들의 몫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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