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들의 자존심 대결 '채혈배틀', 최후의 승자는

박성우
발행날짜: 2015-12-08 05:13:34
  • 인턴 의사의 좌충우돌 생존기…박성우의 '인턴노트'[11]

채혈 배틀

하루는 동기 한 명이 채혈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레지던트 선생님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선생님, 언제쯤이면 채혈을 맘 편하게 잘할 수 있을까요?"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선생님. 나중 가면 잘할 거 같죠? 술기는 잘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잘하고 못하는 사람은 인턴 끝날 때까지 못해요. 내가 그랬어요. 인턴 끝날 때까지 채혈 때문에 스트레스 받았어요."

본원 7층에는 인턴 라운지가 있다. 주로 내과 인턴들이 쉬는 이곳은 오전 기본 일과를 마치고 추가 처방이나 추가 일이 있어 콜이 있을 때까지 모여서 간식을 먹으며 쉴 수 있는 곳이다. 세수를 하거나 이를 닦기도 하고 잠시 눈을 붙이기도 한다. 인터넷을 하거나 TV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주로 수다를 떠는 곳이다.

일을 시작한 지 2~3주 즈음 되어가니, 대부분의 내과 인턴들은 어느 정도 채혈에 자신감이 붙고 실력도 좋아졌다. 하지만 처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실패한 채혈 이야기가 인턴 라운지의 단골 주제였다.

첫 며칠은 채혈이 안 되면 진땀을 빼고 자신감도 상실하지만, 익숙해지면 한 번에 안 됐을 경우 괜한 자존심이 상한다. '이 정도는 안 될 리 없는데…'라는 생각에 마음이 쓰인다.

건강한 남자 환자들의 채혈은 무척 쉽다. 채혈검사를 하고자 팔을 스윽 훑어보면 여기저기서 혈관들이 꿈틀대며 "채혈해주세요"라고 아우성이다. 간혹 살집이 있는 분들은 안 보일 때가 있지만 그런 분들도 잘 만져보거나 손등을 보면 혈관이 보인다.

내과 병동에는 장기 입원 환자들이 많고, 그로 인해 몸이 쇠약해져 혈관이 좋지 않은 환자들이 많다. 상대적으로 종양내과, 혈액내과, 호흡기내과 쪽이 중환자들이 많아서 채혈할 때 고난도의 술기를 필요하게 될 때가 있다.

부종으로 인해 팔다리가 퉁퉁 불어난 환자들이나 잦은 채혈로 인해 혈관을 찾기 힘들 정도로 멍이 들거나 숨어버린 환자의 경우도 있다. 간혹 찾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표현하기로 소위 '혈관이 말랐다'고 하는, 채혈을 시작하면 얼마 안 가 피가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채혈하는 인턴들도 한 번에 채혈되기를 바라고 환자들도 한 번에 마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인턴뿐만 아니라 베테랑 간호사들도 애를 먹을 때가 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을 채혈하는 임상병리사들 역시 실패할 때가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각자의 병동에 익숙해지면 환자와 인턴들은 서로의 특성을 알게 된다. 환자들의 입장에서는 '저 선생님은 솜씨가 좋아서 피 뽑을 때 안 아프고 쉽게 하는 선생님' '저 선생님은 채혈할 때마다 애먹이는 선생님' 식으로 인턴들을 분류한다.

반대로 인턴들은 '혈관이 좋아서 채혈이 쉬운 환자' '고난도의 채혈 환자' 식으로 환자들을 분류하게 된다. 그래서 각 병동에는 최상의 난이도 채혈을 요하는 환자들이 있고 그때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가게 된다.

이번에는 한 번에 뽑아보자는 마음으로 채혈 도구를 챙긴다. 하지만 역시나 고난이도 채혈은 자주 실패를 안기고 그때는 손을 바꿔 다른 인턴을 통해 채혈에 성공한다. 그래서 인턴 라운지에서 수다를 떨다가 나온 말이'채혈 배틀'이다. 한번은 혈액내과와 종양내과 인턴들이 이야기하다 각자의 과에서 채혈이 가장 어려운 환자들 검사가 나왔을 때 서로 바꾸어 채혈해보자고 했다. 그렇게 채혈 배틀이 시작됐다.

혈액내과 고난도의 채혈 환자 검사를 종양내과 인턴 중 가장 손이 좋은 동기가 시행했다. 반대로 종양내과 고난도의 채혈 환자 검사를 혈액내과 인턴 둘이서 채혈했다. 결과는 종양내과 인턴들의 완승.

이후로 아침마다 100명이 육박하는 환자들을 채혈해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던 혈액내과 인턴 2명은 한동안 밥을 먹거나 쉴 때마다 기를 펴지 못하고 괄시 당했다는 후문이다. 단번에 채혈에 성공했던 종양내과 인턴의 올라간 어깨는 쉽게 내려오지 않았다.

의사들은 술기에 능한 사람, 처음 하는 술기도 척척 해내는 사람을 '손이 좋다' 혹은 '좋은 손을 가졌다'고 평한다. 손이 좋은 의사는 처음부터 좋다.

채혈 역시 의료와 치료의 한 측면이다. 환자에게는 따끔할지라도 고통이 있는 만큼 조금은 재미로 쓴 것에 대해 마음이 쓰인다. 모든 환자를 최소한의 따끔함으로 한 번 만에 채혈하기를 바라는 인턴의 바람과 욕심이 들어간 해학이라 여겼으면 좋겠다.

<12편에서 계속>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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