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의사의 좌충우돌 생존기…박성우의 '인턴노트'[52]
12월, 전공의 시험
"어떤 과정을 거쳐야 의사가 되나요" 혹은 "언제 의사가 되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심지어 어엿한 의사 면허를 받은 인턴이지만 병동잡만 하고 있으면 환자나 보호자들이 묻는다.
"선생님은 언제 의사가 되세요?" 그때는 웃으며 "저도 의사예요. 지금은 인턴이라서 그렇지 의사 면허를 딴 의사입니다"라고 답한다.
인턴을 마치면 전공을 정하고 레지던트가 된다.
6년간 의대를 거치고 국시도 통과한 인턴이지만 '의사 면허증에 아직 잉크도 안 마른 놈'이란 꾸지람을 들을 때가 있다. 종합병원에서 다달이 과를 바꿔가면서 일해서인지, 소속감이 희미해서인지 간혹 의사 대접을 못 받을 때가 많다. 하지만 전공의가 되고 소속 과가 명확하면 대접이 확 달라진다.
전공이 없는 일반의보다 전문의를 우대하는 한국 문화 때문에 대부분의 인턴들은 세부 전공을 위한 경쟁을 거친다. 인턴을 시작한 이래 병원 청춘들에게 '과연 나는 무슨 과를 할 것인가'는 1년 내내 지속되는 숙제다.
10월만 지나도 사전 시험이나 사전 면접이 진행된다. 그리고 12월에 들어서면 본 시험을 치른다. '전공의 시험'이라 하여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정신과 이렇게 110문제의 시험이다. 전국의 모든 인턴이 치르는 시험이라 의사 국가고시를 통과한 지 1년이 되기도 전에 전국 방방곡곡 수험장이 차려진다.
사실 본 시험 전에 레지던트 선발은 대개 사전 정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대략 1대 1의 경쟁률로 정리가 된 경우에는 전공의 시험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원 같은 경우, 내과를 비롯한 몇몇 과의 경쟁이 치열하였기에 마지막 본 시험까지 당락을 결정짓는 중요 요소였다. 그래서 12월 후반기에 접어들수록 사전 정리가 되어 내정된 인턴은 시험을 대비하는 속내가 편하다.
하지만 마지막 본시험까지 좋은 점수를 얻어야 합격이 보장되는 처지가 되면 무섭게 공부를 했다. 병원 곳곳에서 일보다 공부에 불타오르는 인턴을 본다는 소문이 돌았다.
공식적인 시험이었기 때문에 일이 많은 일요일이어도 대부분의 과에서 편의를 도와 토요일부터 족쇄를 풀어준 곳도 있었다. 우리 인턴 없이도 병원이 잘 돌아가나 하는 심보가 있었지만 역시나 잘 돌아갔다. 결국 있으나마나한 인턴이었는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근 10개월 만에 컴퓨터 사인펜을 잡고 시험을 보았다. 시험장 가는 동기들 모두 간만에 시험을 마주한다는 기대였는지 아니면 아침 병동잡을 피했다는 행복이었는지 표정이 다들 달랐다. 수험장 입구에서 나눠주는 차와 간식을 받아서 고사장으로 들어선다.
의대를 졸업하기 직전까지 지겹도록 시험을 봤는데 1년 만에 시험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지긋지긋했던 내신과 수능시험, 이어진 의대 6년과 의사국가고시까지. 반듯하게 나열된 시험장 책상 위에서 이루어졌다. 인생의 반을 시험과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이었다.
전공의 시험은 앞의 시험들이 주는 긴장감과 확연히 달랐다. 훨씬 편한 마음으로 임했지만 그래도 시험이었다. 이미 1대 1 경쟁을 맞춘 과에 지원한 동기들은 이름이나 제대로 쓰라는 덕담이 오갔다. 그 와중에 결혼을 앞둔 동기는 이때다 싶었는지 고사장 복도에서 청첩장을 연신 나누어주었다.
시험을 보러 와서 청첩장을 받는, 색다르게 긴장을 해소하는 법을 체득했다.
2시간 동안 본 100문제의 범위는 의학 전반이었다. 근무 동안 틈틈이 복습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문제를 풀었다. 긴장감 없는 시험이었지만 웬일인지 다들 열심히 풀었다. 지금이야 이리저리 사고치는 인턴이지만 한때 전국구로 날고 기었던 친구들이었다.
교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비추는 햇살을 느끼면서 잡았던 사인펜을 놓았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몰랐던 때에도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는지, 지난 시간이 스쳐갔다. 한 번은 거쳐야하지만 평생 한 번 뿐이라는 인턴 생활도 8부 능선을 넘어 끝나간다. 아직 두 달이 남았지만 전공의 합격자 발표가 나면 그때는 정말 막바지다.
근무 초창기 때의 생동감 넘치는 병원 이야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상황은 그대로겠지만 그것을 대하는 나의 마음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53]편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야 의사가 되나요" 혹은 "언제 의사가 되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심지어 어엿한 의사 면허를 받은 인턴이지만 병동잡만 하고 있으면 환자나 보호자들이 묻는다.
"선생님은 언제 의사가 되세요?" 그때는 웃으며 "저도 의사예요. 지금은 인턴이라서 그렇지 의사 면허를 딴 의사입니다"라고 답한다.
인턴을 마치면 전공을 정하고 레지던트가 된다.
6년간 의대를 거치고 국시도 통과한 인턴이지만 '의사 면허증에 아직 잉크도 안 마른 놈'이란 꾸지람을 들을 때가 있다. 종합병원에서 다달이 과를 바꿔가면서 일해서인지, 소속감이 희미해서인지 간혹 의사 대접을 못 받을 때가 많다. 하지만 전공의가 되고 소속 과가 명확하면 대접이 확 달라진다.
전공이 없는 일반의보다 전문의를 우대하는 한국 문화 때문에 대부분의 인턴들은 세부 전공을 위한 경쟁을 거친다. 인턴을 시작한 이래 병원 청춘들에게 '과연 나는 무슨 과를 할 것인가'는 1년 내내 지속되는 숙제다.
10월만 지나도 사전 시험이나 사전 면접이 진행된다. 그리고 12월에 들어서면 본 시험을 치른다. '전공의 시험'이라 하여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정신과 이렇게 110문제의 시험이다. 전국의 모든 인턴이 치르는 시험이라 의사 국가고시를 통과한 지 1년이 되기도 전에 전국 방방곡곡 수험장이 차려진다.
사실 본 시험 전에 레지던트 선발은 대개 사전 정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대략 1대 1의 경쟁률로 정리가 된 경우에는 전공의 시험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원 같은 경우, 내과를 비롯한 몇몇 과의 경쟁이 치열하였기에 마지막 본 시험까지 당락을 결정짓는 중요 요소였다. 그래서 12월 후반기에 접어들수록 사전 정리가 되어 내정된 인턴은 시험을 대비하는 속내가 편하다.
하지만 마지막 본시험까지 좋은 점수를 얻어야 합격이 보장되는 처지가 되면 무섭게 공부를 했다. 병원 곳곳에서 일보다 공부에 불타오르는 인턴을 본다는 소문이 돌았다.
공식적인 시험이었기 때문에 일이 많은 일요일이어도 대부분의 과에서 편의를 도와 토요일부터 족쇄를 풀어준 곳도 있었다. 우리 인턴 없이도 병원이 잘 돌아가나 하는 심보가 있었지만 역시나 잘 돌아갔다. 결국 있으나마나한 인턴이었는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근 10개월 만에 컴퓨터 사인펜을 잡고 시험을 보았다. 시험장 가는 동기들 모두 간만에 시험을 마주한다는 기대였는지 아니면 아침 병동잡을 피했다는 행복이었는지 표정이 다들 달랐다. 수험장 입구에서 나눠주는 차와 간식을 받아서 고사장으로 들어선다.
의대를 졸업하기 직전까지 지겹도록 시험을 봤는데 1년 만에 시험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지긋지긋했던 내신과 수능시험, 이어진 의대 6년과 의사국가고시까지. 반듯하게 나열된 시험장 책상 위에서 이루어졌다. 인생의 반을 시험과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이었다.
전공의 시험은 앞의 시험들이 주는 긴장감과 확연히 달랐다. 훨씬 편한 마음으로 임했지만 그래도 시험이었다. 이미 1대 1 경쟁을 맞춘 과에 지원한 동기들은 이름이나 제대로 쓰라는 덕담이 오갔다. 그 와중에 결혼을 앞둔 동기는 이때다 싶었는지 고사장 복도에서 청첩장을 연신 나누어주었다.
시험을 보러 와서 청첩장을 받는, 색다르게 긴장을 해소하는 법을 체득했다.
2시간 동안 본 100문제의 범위는 의학 전반이었다. 근무 동안 틈틈이 복습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문제를 풀었다. 긴장감 없는 시험이었지만 웬일인지 다들 열심히 풀었다. 지금이야 이리저리 사고치는 인턴이지만 한때 전국구로 날고 기었던 친구들이었다.
교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비추는 햇살을 느끼면서 잡았던 사인펜을 놓았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몰랐던 때에도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는지, 지난 시간이 스쳐갔다. 한 번은 거쳐야하지만 평생 한 번 뿐이라는 인턴 생활도 8부 능선을 넘어 끝나간다. 아직 두 달이 남았지만 전공의 합격자 발표가 나면 그때는 정말 막바지다.
근무 초창기 때의 생동감 넘치는 병원 이야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상황은 그대로겠지만 그것을 대하는 나의 마음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53]편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