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의사의 좌충우돌 생존기…박성우의 '인턴노트'[59]
성형외과 합격
11월 전공의 지원을 할 즈음 환아의 간질 진단을 위해 뇌파검사실로 검사를 하러 갔다. 환아의 증세가 불안정하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검사를 마치기 위해서는 30여 분 정도 협조가 필요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마취 시행 후 검사를 진행했다. 수술실이 아닌 검사실에서 하는 마취는 '출장 마취'로 이루어진다.
마침 출장 마취를 담당하던 마취의가 모교 선배였는데 마취된 환아의 곁을 지키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때가 때인지라 자연스레 전공의 지원 현황과 최근 추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피안성의 시대가 지나가고 정재영을 지나 마방진의 시대가 도래했다."
2011년 당시 과별 인기는 그렇게 요약됐다. 10년 전에는 비보험 진료과목이 돈을 많이 벌 수 있어 인기였다.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이 셋을 줄여 '피안성'의 시대라고 불렀다. 하지만 '피안성'의 파급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의료 환경의 변화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이 '정재영'을 일으켰다. 정신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이 세 곳의 특징은 몸이 고되지 않고 오래 진료를 할 수 있는게 장점이었다.
서젼은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하고 손의 감각이 떨어지면 수술하기 힘들다. 2010년 어느 순간부터 젊은 세대는 예전처럼 부나 권력을 탐하는 욕심이 줄었다. 공무원이나 교사가 최고의 직업으로 떠오르던 때였다.
의료계에도 그런 경향은 여실히 반영되어 '마방진'의 시대가 도래했다. 마취과, 방사선종양학과, 진단검사의학과. 이 세 곳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환자를 직접 진료하지 않는 대표적인 '서비스과'이다. 환자를 직접 마주하는 것도 의사들의 스트레스와 의료 소송이 늘어나는 세태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원한 과는 성형외과였다. 모교 선배는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다.
"야, 너는 왜 생고생을 하려고 하냐? 어차피 성형외과 해도 예전처럼 돈 벌기 힘들어. 몸 편한 게 제일 좋아."
그때는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성형외과로 결정했을 때 다들 멋있는 과라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힘든 과정을 알기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나는 하고 싶은 전공을 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견뎌내고 버틸 수 있었다.
성형외과뿐이랴. 본원에서는 힘들기로 유명한 과가 흉부외과, 일반외과, 신경외과였기에 지원자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과를 바라보는 젊은 의사들이 있으니 안정 지
향, 여가 지향의 세태 속에서도 유지가 되는 것이 아닐까.
수십 년 동안 한국의 의료 환경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나 의료 수가는 발전이 없었다. 의료 수가의 상승률은 물가 상승률에 턱없이 부족하다. 선배는 '그런 불행한 의료 환경 속에서 서젼을 택하는 것은 매니아들이나 하는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
전공의 시험과 면접을 최종적으로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2월 중순, 레지던트 합격자가 발표되었다. 명단 속 성형외과에 다른 2명의 동기와 내 이름을 확인했다. 내년에는 인턴이 아닌 성형외과 전공의다. 당시 비뇨기과 인턴이었기에 수술실에서 같이 일하는 비뇨기과 전공의 선생님과 스크럽 간호사들에게 합격 소식을 전했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여기저기서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명성이 자자한 성형외과라 어떻게 버티면서 일할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떨어진다면 군대에서 재충전하고 다시 지원하자는 생각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지난 1년보다 더 지옥 같은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전부를 바칠 수 있을 시간과 기회가 있다면 멋있지 않을까.
합격 소식이 있으면 다른 한편에는 불합격 소식도 있었다. 친한 동기들의 낙방 소식은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합격한 친구를 위해 축하할 수만은 없었다. 간절히 원했던 친구들은 얼마나 씁쓸할까. 몇몇 동기들은 내년에 인생의 휴식을 취하겠다며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친구들은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조금이라도 늦기 전에 1년 정도 시간을 갔겠다고 했다.
그 시간 동안 여행을 다니고 책을 읽고 봉사도 하고 자신을 위해 오롯이 투자할 시간을 갖겠다는 것이다. 그 친구들의 계획이 부러웠다.
아직 인턴 수련이 2개월이나 남았지만 '빵년차'라고 불렸다. 레지던트 수련은 대개 4년을 거친다. 그래서 레지던트 몇 년차 식으로 칭하는데 아직 레지던트는 아니지만 내정되어 있으니 0년차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의사라는 글자 앞에 '성형외과'라는 수식어를 달게 된다는 사실이 와 닿지 않았다. 고생하여 말턴이 되었는데 이제 다시 1년차가 되어 일을 배워야 한다.
인턴 근무 첫 날의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어김없이 오프인 주말에도 아침 6시면 눈이 떠진다. 새벽 일이 몸에 익은 '인턴 노예 근성'일지도 모른다. 서젼이 되고 싶은 꿈, 그 꿈이 이루어져 성형외과 의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60]편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11월 전공의 지원을 할 즈음 환아의 간질 진단을 위해 뇌파검사실로 검사를 하러 갔다. 환아의 증세가 불안정하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검사를 마치기 위해서는 30여 분 정도 협조가 필요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마취 시행 후 검사를 진행했다. 수술실이 아닌 검사실에서 하는 마취는 '출장 마취'로 이루어진다.
마침 출장 마취를 담당하던 마취의가 모교 선배였는데 마취된 환아의 곁을 지키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때가 때인지라 자연스레 전공의 지원 현황과 최근 추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피안성의 시대가 지나가고 정재영을 지나 마방진의 시대가 도래했다."
2011년 당시 과별 인기는 그렇게 요약됐다. 10년 전에는 비보험 진료과목이 돈을 많이 벌 수 있어 인기였다.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이 셋을 줄여 '피안성'의 시대라고 불렀다. 하지만 '피안성'의 파급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의료 환경의 변화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이 '정재영'을 일으켰다. 정신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이 세 곳의 특징은 몸이 고되지 않고 오래 진료를 할 수 있는게 장점이었다.
서젼은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하고 손의 감각이 떨어지면 수술하기 힘들다. 2010년 어느 순간부터 젊은 세대는 예전처럼 부나 권력을 탐하는 욕심이 줄었다. 공무원이나 교사가 최고의 직업으로 떠오르던 때였다.
의료계에도 그런 경향은 여실히 반영되어 '마방진'의 시대가 도래했다. 마취과, 방사선종양학과, 진단검사의학과. 이 세 곳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환자를 직접 진료하지 않는 대표적인 '서비스과'이다. 환자를 직접 마주하는 것도 의사들의 스트레스와 의료 소송이 늘어나는 세태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원한 과는 성형외과였다. 모교 선배는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다.
"야, 너는 왜 생고생을 하려고 하냐? 어차피 성형외과 해도 예전처럼 돈 벌기 힘들어. 몸 편한 게 제일 좋아."
그때는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성형외과로 결정했을 때 다들 멋있는 과라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힘든 과정을 알기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나는 하고 싶은 전공을 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견뎌내고 버틸 수 있었다.
성형외과뿐이랴. 본원에서는 힘들기로 유명한 과가 흉부외과, 일반외과, 신경외과였기에 지원자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과를 바라보는 젊은 의사들이 있으니 안정 지
향, 여가 지향의 세태 속에서도 유지가 되는 것이 아닐까.
수십 년 동안 한국의 의료 환경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나 의료 수가는 발전이 없었다. 의료 수가의 상승률은 물가 상승률에 턱없이 부족하다. 선배는 '그런 불행한 의료 환경 속에서 서젼을 택하는 것은 매니아들이나 하는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
전공의 시험과 면접을 최종적으로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2월 중순, 레지던트 합격자가 발표되었다. 명단 속 성형외과에 다른 2명의 동기와 내 이름을 확인했다. 내년에는 인턴이 아닌 성형외과 전공의다. 당시 비뇨기과 인턴이었기에 수술실에서 같이 일하는 비뇨기과 전공의 선생님과 스크럽 간호사들에게 합격 소식을 전했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여기저기서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명성이 자자한 성형외과라 어떻게 버티면서 일할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떨어진다면 군대에서 재충전하고 다시 지원하자는 생각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지난 1년보다 더 지옥 같은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전부를 바칠 수 있을 시간과 기회가 있다면 멋있지 않을까.
합격 소식이 있으면 다른 한편에는 불합격 소식도 있었다. 친한 동기들의 낙방 소식은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합격한 친구를 위해 축하할 수만은 없었다. 간절히 원했던 친구들은 얼마나 씁쓸할까. 몇몇 동기들은 내년에 인생의 휴식을 취하겠다며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친구들은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조금이라도 늦기 전에 1년 정도 시간을 갔겠다고 했다.
그 시간 동안 여행을 다니고 책을 읽고 봉사도 하고 자신을 위해 오롯이 투자할 시간을 갖겠다는 것이다. 그 친구들의 계획이 부러웠다.
아직 인턴 수련이 2개월이나 남았지만 '빵년차'라고 불렸다. 레지던트 수련은 대개 4년을 거친다. 그래서 레지던트 몇 년차 식으로 칭하는데 아직 레지던트는 아니지만 내정되어 있으니 0년차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의사라는 글자 앞에 '성형외과'라는 수식어를 달게 된다는 사실이 와 닿지 않았다. 고생하여 말턴이 되었는데 이제 다시 1년차가 되어 일을 배워야 한다.
인턴 근무 첫 날의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어김없이 오프인 주말에도 아침 6시면 눈이 떠진다. 새벽 일이 몸에 익은 '인턴 노예 근성'일지도 모른다. 서젼이 되고 싶은 꿈, 그 꿈이 이루어져 성형외과 의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60]편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