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환자 경제 사정 알면 치료 더 잘할 수 있다"

메디칼타임즈
발행날짜: 2017-04-24 12:00:00
  • 해성산부인과 박혜성 원장의 '따뜻한 의사로 살아남는 법'(17)

해성산부인과 박혜성 원장의 '따뜻한 의사로 살아남는 법'(17)

개업 하고 20년 정도가 되어서야 깨달은 것들 중 하나가 '돈에 대한 개념'이다.

환자가 검사를 할지 말지, 수술을 할지 말지, 어떤 시술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변수가 뭘까? 시간, 평판, 여건, 위치, 절실함 등 여러 가지가 관여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다. 즉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우리 아버지 세대 이전에는 의료보험 제도가 없었고,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하거나 암 치료를 못 하고 돌아가신 분들도 많았다. 현재 미국에서도 의료보험 제도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맹장으로도 사망한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간경화였고, 몇 개월간 각혈을 하셨는데 그 때는 의료보험 제도가 없어서 병원에 가시는 것을 미루셨다. 아직도 대학에 보내야 할 두 아들이 있고, 집안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경화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비를 써 버리면 자식들을 교육시킬 수가 없었다.
그렇게 병원 가길 차일피일 미루다가 각혈한 것이 기도를 막아서 결국 손도 못 써보고 돌아가셨다. 내가 산부인과 레지던트 1년차였던 시기다. 돌아가신 후에야 집에 가 보니 아버지 머리맡 달력에 당신이 각혈한 날짜에 빨간 동그라미가 몇 달째 쳐져 있었다. 가슴이 콱 막히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버지는 자식 교육시킬 돈을 절약하시려고 치료를 포기하신 것이다. 돈 때문에 치료를 못 받으셨구나! 아버지가 그렇게 우리를 지켜내신 것이다.

그때 당시 의료보험 제도가 막 시작하려는 시기였고, 레지던트 1년차, 새내기 의사였지만 나는 아버지를 위해서 해드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는 조선시대 청렴결백한 양반,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을 내게 심어주셨다. 그래서 돈은 중요하지 않다는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의사가 돼 진료를 할 때도 환자가 돈 얘기를 꺼내면 접수에 가서 물어보라고 얘기하고 나는 돈 얘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 의사가 돈 얘기를 하는 것이 폼도 안 나고, 돈을 밝히는 의사라는 얘기를 듣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환자에게 필요한 검사만 설명했는데 검사를 받지 않고 가면 괜히 의사의 말을 무시한 것 같아 자존심 상하고 기분도 나빴다. 꼭 필요한 검사여서 권했는데, 나를 장사꾼 취급한다고 생각 했던 것 같다.

환자가 배가 아프고, 피가 비치고, 냉이 많고, 생리를 한두달 거르고, 허리가 아프며, 소변이 불편하다 얘기를 하면 "분명히 검사가 필요하다는 설명을 하고 초음파 검사나 성병 PCR 검사, 또는 자궁경부암 검사를 해야 원인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수납에서 왜 말도 않고 검사 했냐며 화 내며 검사를 다 취소하고 가는 환자가 가끔 있다. 돈을 벌려고 불필요한 검사를 한 것도 아니고, 꼭 필요한 검사만 하자고 해서 한 건데도 환자는 소리를 지르면서 간다. 그 환자가 혹시 다음에 다시 오면 절대 검사는 하지 않고, 약과 주사만 처방한다. 또 욕을 얻어먹기 싫기 때문이다.

몇 년이 지나 다시 오는 환자 중 대장암 3기 수술을 하고 오는 사람도 있고, 유방암 2기로 수술받고 오는 사람도 있다. 루프스에 걸려 치료받는 사람, 다른 병원에서 자궁경부암으로 자궁을 적출하고 오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검사를 잘 안 하는 사람들은 암이 초기에 발견이 잘 안 되고, 증상이 있어서 검사를 했을 때는 이미 진행이 돼 발견 된다. 그렇게 고생을 한 다음에야 의사가 검사를 하라고 얘기한 이유를 이해하게 되고, 검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검사를 안 하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가버린 환자의 공통점 중 하나가 살기가 팍팍하다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돈을 쓸 여유가 없으니까 증상이 있는데도 검사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환자들은 자신의 건강이 염려가 되어서 검사를 다 해달라고 한다. 그래서 무슨 병이 있어도 초기에 발견이 된다.

만약 나의 개인적 소견으로 검사가 필요없다고 얘기를 하면 무언가 걱정이 되었던 그 사람은 다른 병원이나 종합병원에 가서라도 검사를 해서 정상이라는 말을 들어야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환자가 검사를 해 달라고 하면 그 분이 원하는 검사는 모두 해 주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무증상일 때도 암이나 병이 발견되는 경우도 꽤 있다.

나는 아버지의 교육대로 돈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살려고 했지만 환자를 진료하다 보니 환자가 치료를 결정하는데 제일 중요한 요소가 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같은 1만원도 어떤 사람에게는 10만원이나 100만원의 가치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1000원이나 100원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돈이 없어서 검사를 못 하는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해서 돈이 없다고 절대 말 하지 않는다. 대신 화를 내거나, 필요없는 검사를 시킨다고 얘기를 하거나, 다른 일로 꼬투리를 잡는다. 필요없는 검사를 하자는 의사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1만원이 100만원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필요한 검사가 있으면 나는 일단 검사를 권한다. 그 사람의 경제적 사정이 안 좋다고 검사를 안 하거나 검사를 권하지 않으면 나중에 의료사고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일수록 병이 많다. 이런 분들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검사를 권한다.

즉 "며칠 치료해 보고 그래도 증상이 좋아지지 않으면 이런 검사가 필요하니까 고려를 해 보자"고 하거나 "종합병원에 가 보라"고 한다. 우리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검사는 해 준다. 돈이 없어서 검사를 못 해 병을 키울까 봐 걱정이 되어서 그렇게 한다. 응급수술이고 수술을 안 하면 생명이 위험한데도 환자가 돈이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수술은 해 준다.

호객행위가 아니다. 환자를 유치할 목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수술이고, 꼭 필요한 검사인데 환자가 돈 때문에 못 한다고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의료봉사를 한다. 아프리카에 일부러 가서 의료봉사를 할 수도 있을텐데 나에게 오는 환자에게 그 정도의 봉사도 못 하겠는가?

물론 이것이 의료법에 저촉된다고 얘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나의 의도가 환자를 늘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선한 의도이기 때문에 그리고 무료로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돈을 넣어서 해 주는 것이 때문에 의료법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환자가 암에 걸렸는데 그에게는 암을 치료할 돈이 없다. 그런데도 자꾸 의사가 비싼 항암제 치료를 하라고 권해봤자 환자는 그것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환자가 허리디스크가 있어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에게는 디스크 수술을 할 돈이 없다. 그럴 때 의사가 운동법이나 진통제, 물리치료를 처방해 줘야 한다.

반대로 환자가 무언가 이상하다고 판단해서 검사 해 달라고 했는데, 의사가 검사가 필요없다고 하면 그 환자는 다른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할 것이다. 의사는 환자가 해 달라고 하는 것을 제일 먼저 해결해 줘야 한다. 그런 다음 그 환자의 마음을 열어서 다음 치료를 권해야 한다. 그 치료는 환자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해야 한다. 환자가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는 정도의 경제적 수준에서 치료를 해 주어야지, 지출이 초과가 되면 치료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사는 환자가 치료를 선택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돈 문제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치료해야 한다. 만약 환자가 치료를 거부한다면 의사의 말이 못 미더워서라기보다 자신의 경제적 사정 때문일 수 있다는 이해가 있다면 환자에게 필요한 치료를 좀 더 효율적으로 잘 할 수 있다.

환자의 경제적인 사정을 잘 알고, 돈의 속성을 잘 알고, 돈에 대한 개념이 있으면 환자를 더 잘 치료할 수 있고, 돈의 노예가 되거나 돈에 의해서 조종 당하지 않고 나의 의도대로 돈을 활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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