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수 학생(순천향의대 본과 2학년)
본과 2학년 첫 중간고사가 끝났다. 처음으로 마주한 임상과목들은 결코 자비롭지 않았다. 거짓말이라 믿고 싶은 2만 장에 달하는 강의록을 부여잡고 있자니 어영부영 시험 기간이 다가왔고, 모든 시험이 그렇듯 아쉬움으로 점철된 채 마무리되었다.
교수님들은 '의대 공부는 콩나물 시루와 같다'고 격려해주시곤 한다. 이 말인즉슨 우리의 지식은 매일 물을 부어도 티가 나지 않다가 어느새 쑥 자라있는 콩나물처럼 성장 중이라는 것인데, 시험 직후 내 콩나물들은 끝없이 밀려오는 물에 휩쓸려 사라진 느낌이었다.
동기들 사이에서는 사자에게 쫓기는 사슴처럼 공부한다는 '사슴 공부법'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중간고사 마지막 과목이었던 심장학 시험을 준비하던 밤, 동기들은 우스갯소리로 이미 우린 다리 정도는 뜯어먹힌 사슴이더랬다. 분명 학기 시작부터 사자에게 잡히지 않으려 열심히 달려왔건만 사슴의 종종걸음은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내일부터 또 다시 성킁성큼 찾아올 사자를 피하고자 달려야 한다.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업을 듣다 보니 나의 주체적인 '하루'는 해가 저물어갈 무렵 시작된다. 저녁을 먹고 공부 더미에 고개를 파묻은 채 최소한 당일 복습을 끝내려 고군분투하다 보면 어느덧 이 짧았던 하루도 다 지나간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다음날, 또 다음날이 되는 쳇바퀴 같은 무미건조한 시간을 살아가다 보니 삶 자체에 대해 여러 고민을 하게 된다.
피할 수 없는데 즐길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심스럽게 생각을 나눠보자면, 행복에 대한 강박을 버리는 것이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 당장, 그것도 꼭 매일매일 나의 하루에서 충분한 기쁨을 느껴야만 좋은 삶을 사는 것인가? 그보다는 특별한 행복이 없어도 불행(우울, 불안) 역시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는 '힐링'과 '소확행'이 유행 중이다. 이 두 키워드는 행복, 자기만족에 초점을 두고 있다 보니 행복은 일상에 지속해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고, 행복과 불행은 공존할 수 없다는 오인을 심어주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본래 행복이란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일시적인 감정이며, 당연히 행복과 불행은 공존할 수 있다. 고로 즐길 수 없는 상황이라면 행복의 부재를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불행의 감정에 잠식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겠다. 초조해하며 콩나물이 잘 자라고 있는지 수없이 시루를 들춰보기보다는 평정심을 갖고 물을 주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단,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평정심, 말은 쉽지만 늘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몸속 수분이 커피로 몽땅 대체된 것만 같은 본과 학생들에게 대부분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동요되지 않고 항상 평안한 감정을 유지하는 마음'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공간은 매우 비좁다. 매일매일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잠시 그 불행의 근원지에서 도망치는 것도 방법이다. 대신 도망 나온 자신을 '쉽게 회피하는 사람'이라 자책하지 말고, 여유를 갖는 동안 사자를 피해 달릴 전략을 짜는 현명한 사슴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