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현 학생(고대의대 본과 4학년)
때는 3년 전, 본과에 진입한지 갓 2학기 된 나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당시 해부학, 생리학, 약리학, 조직학, 병리학 등 기초의학 과목들을 배우고 있던 시기로 예과와 비교해 감당할 수 없는 공부양에 이미 압도당해 의학의 상당분야를 훑은 줄로만 알았다. 비록 기초의학과목들 뿐이었지만 강의록에 끊임 없이 등장하는 질병들과 교과서 각주에서 소개하는 질병 등이 도무지 정리되지 않고 머리 속에서 중구난방 떠도는 것이었다.
전공의 수련을 마쳐가는 동아리 선배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벌써 본과에 들어온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의학에 대한 체계가 잡히지 않습니다. 저에게 의학은 맞지 않는 걸까요. 어쩌면 제가 의학을 품기엔 너무 부족했던 건 아닐까요?"
"어려운 게 뭐 있어, 나중에 다 배우게 될 텐데. 결국엔 다 알게 될 거야!"라며 선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평소 믿고 의지했던 선배였음에도 그 말이 잘 와닿지 않아 의학의 벽은 더 높게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임상과목조차 배우지 않은 본과 1학년이 하기엔 너무 터무니 없는 고민이었다. 어떤 분과가 있는지도 잘 몰랐고 감염성 질환, 염증성 질환, 암 등 질병들을 큰 틀에서 보는 시각도 부족했다. 본과 4학년이 되어 의과대학 정규 교육과정을 한 번 밟아본 이제는 선배가 대수롭지 않게 여긴 이유에 대해서도 조금 이해가 된다.
의학이라는 분야는 무수한 질병들과 그 원인, 임상 양상, 진단, 치료 등을 전부 포괄하고 그 양은 실로 방대하다. 배우는 입장에서 구체적인 것까지 전부 알고 기억하는 게 최선이지만 우리는 컴퓨터가 아니기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하나 다 알기보다는 큰 틀에서 규칙을 파악하고 의학이 추구하는 방향, 논리를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치료는 국소적 치료에서 전신적 치료로 이어지며 보다 비침습적이고, 제한된 의료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향으로 결정된다. 영상학적 진단을 위해 MRI에 앞서 초음파나 CT를 찍어야 하고 전이성 암의 경우 수술적 치료 대신 전신 항암 요법을 해야함이 이제는 너무나 자명하다. 이렇듯 논리를 터득하면 단순 암기라고 생각했던 많은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학문의 체계를 잡는 게 수월해진다.
아직 나는 학생이고 모르는 것 천지이며 누군가에게 조언할 입장은 못되지만 의학의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고 있던 나를 떠올리며 지금 내가 당시 선배의 입장이 되어본다. 그림들을 눈에 바르고, 곳곳에 있는 표들을 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학의 큰 그림을 먼저 이해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 후에 틀을 짜고 살을 붙여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입장의 난처한 본과생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비록 갈 길은 멀고 배워야 할 것은 많겠지만 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한 줄기 빛이 되어 험난한 본과 생활을 헤쳐나가는 데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