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차병원 소아응급센터 박수현 교수
'작은 심장아, 제발, 제발, 조금만 더 뛰어라. 얇은 관을 통해 들어가는 산소가 제발 이 아이의 몸 곳곳에 전달되길, 혹시라도 눈을 떴을 때 손상된 부위가 최소화되도록. 제발, 제발…'
마음 속으로 제발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아직 생사에 기로에 있는 것이라면 제발 이 아이의 숨결을 조금만 더 붙잡을 수 있기를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아이의 심장 리듬은 플랫, 일자선으로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이가 그토록 사랑했을 엄마에게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할까, 아이의 병원 도착 소식을 듣고 모든 것을 팽개치고 달려온 아빠한테 어떤 단어로 이 비극을 전해주어야 할까. 가족이 아님에도 마음이 미어져서 눈물이 나는데,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을 매일 보던 부모는 어떨지 상상 조차 할 수 없다.
아이를 사랑한 가족들의 마음은 슬픈소식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버릴 텐데 어떡하면 좋을까… 그래도 꾹 이를 물고 아이가 사망했음을 선고하고, 보호자에게 사실을 전달한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이가 중심이었던 가족들의 세계를 부숴버리는 단어와 문장들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를 대신해서 말한다. 영원한 이별을 고한다.
응급실은 죽음과 가까운 곳이다. 어디서 사망했던지 의사가 사망했음을 확인해야 사망절차로 넘어가기 때문에 수련을 받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생과 사의 가운데 있는 환자들이 오기 때문에 그 어느 곳보다 죽음이 가깝다.
위급한 환자들을 치료하며 삶의 문턱으로 끌어와 삶을 연장 시켜주는 경우도 있지만, 끝내 사망하는 경우도 많다. 많은 환자들이 응급실에서 다양한 진단과 사인으로 사망한다. 그 중에서는 고령의 환자들의 존엄한 죽음도, 젊은 환자의 자의적인 죽음, 그리고 질환의 말기로 들어서 더 이상의 소생술이 의미가 없어 끝의 길로 들어서는 일도 있다.
그 환자의 '끝'을 지켜주는 것도 의사의 숙명 같은 것이고, 그 끝을 보호자들이 조금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그 뜻과 말을 전달해주는 것도 의사의 중요한 역할이다. 보다 나은 마무리를 해줄 수 있도록 그 역할을 하면서 같이 슬픔을 공유하기도 하고, 죽음 앞에 경건해지도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죽음에 대하여 환자와 보호자의 감사인사를 받기도 한다.
생사의 경계에 있다 보면, 죽음과 마무리에 익숙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아응급실에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전공을 잘 못 선택했는지에 대한 심각한 갈등을 맞이했다.
응급환자를 보고 처치하는 것이, 그리고 그 존엄한 죽음을 지켜주는 것이 가장 의미 있고 맞는 적성이라 생각했는데, 삶의 색채가 짙어야 하는 아이들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참고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다.
엄마의 극단선택으로 인해 같이 떠나버린 아기 대신 억울해하고 분노하기도 하였으며, 여러 차례 심장 리듬이 돌아왔다가 끝내 가버린 아이를 보내고 극심한 무기력감과 우울함에 시달리기도 했다.
환자를 떠나 보내고 나서 무엇을 조금만 더 했으면 소아환자를 살릴 수 있었을지 끊임없이 되뇌면서 한동안 멍하니 식음을 전폐하고 폐인처럼 있기도 했다. 동료 의료진들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으니 다들 비슷한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면서, 견뎌내야 한다고 했다.
떠나 보낸 아이들을 가슴에 묻고 또다른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한다고 하였다. 경험이 쌓이고 시간이 흘러도 의료진에게 소아 환자들의 죽음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떠나버린 아이들의 마지막은 좀처럼 지워지지도 크게 희미해지지도 않는다. 몇 년 전의 기억도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은 아직도 엊그제 일인 것처럼 또렷하고 가슴이 아프다.
소아응급실에서는 보통 심폐소생술 유지하는 시간보다 두 세배 이상은 심폐소생술을 유지한다. 머리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지만 냉정하게 중단하고 사망선고를 할 수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서 최선을 다하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소아환자 진료를 자신의 길로 선택할 때, 가장 큰 이유는 소아를 정말 좋아해서다. 병원에 내원한 아기들은 정말 예쁘다. 아기들의 똥기저귀 마저 더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아응급실의 의료진은 누구보다 아이들을 살리고 싶고, 아이들이 치료받고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는 것을 소망한다. 그것이 의료진들의 가장 큰 보람이다. 그렇기에 소아 환자의 마지막은 큰 고통이고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를 준다.
개인적인 슬픔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넘어서서 소아환자들의 사망은 사회적인 파장 또한 크다. 누구라도 아이가 죽었다고 하면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다.
아이가 사망한 것이 너무나 큰 슬픔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누군가의 책임을 찾기도 하고 그 화살이 안타깝게도 의료진에게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법적으로 봐도 아이들은 기대여명이 길기 때문에 소송시에도 배상이 몹시 크다. 단, 한 명도 죽지 않으면 좋겠지만, 불의의 사고들이 발생하는 것처럼 같은 질환도 아이들마다 다른 과정으로 진행하고 다른 결말을 맞이한다. 필사적으로 살리고자 노력하지만 의사는 신이 아니다.
모든 아이들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료진들은 소아 환자들을 보면서 매순간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과만을 놓고 1분 1초에 해당하는 그때그때의 역할에 대하여 분석하기 시작하면 과연 법적인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 그렇지가 못하다.
그렇다면 모든 환자를 살릴 수 없는 전제하에, 소아응급환자를 본다는 것은 잠재적 범죄자라는 굴레 안에 언제든 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소아환자의 엄청난 배상액이나 구속되는 의료진의 기사가 나올 때마다 언제 그것이 소아응급실에서 일하는 의료진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는다. 이는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소아응급실의 의료진의 무거운 부담감이며 새로운 의료진의 진입을 막은 큰 장벽이다.
생의 열정을 소아 응급환자를 보는데 쓰는 소아응급실 의료진들이 자리를 지키고 최선을 다해 진료할 수 있도록 보호해줄 수 있는 법적, 사회적 방안이 절실하다. 그러한 안전망 없이 이를 누군가에게 의무로 부과하여 진료하게 하는 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의료의 각 분야도 과에 따라서 적성이 매우 다르다.
수술방에서 손을 떨거나 환자의 죽음에 트라우마를 갖는 의사들에게 적성이 아닌 필수과를 무조건 강요하게 한다면 이는 환자의 건강에도 큰 해가 될 수 있다. 강요보다는 진료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소아 진료를 보는 의료진들은 소아 환자를 보는 것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이런 의료진들이 소아 응급실을 떠나지 않고, 또 소아 환자를 보고 싶어하는 많은 의료진들이 양성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미래와도 같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소아응급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체계 확립이 필요하다.
※분당차병원 소아응급센터 박수현 교수님의 '삐뽀 삐뽀 소아응급 금쪽이' 연재칼럼 마지막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