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태현 가톨릭대 ‘김수환 추기경 기념’ 장기이식병원 교수(신장내과)
[메디칼타임즈 & ‘김수환 추기경 기념’ 장기이식병원 공동기획]
장기 기증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나, 여전히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부족한 실정입니다. 일선 현장의 의료진들이 경험한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 장기 기증 인식률을 높이고, 이를 촉진하는 공동기획 시리즈 ‘오늘, 장기이식병원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7회] 긍정적인 기증문화 확산을 위한 의료진의 작은 약속
반태현 가톨릭대 ‘김수환 추기경 기념’ 장기이식병원 교수(신장내과)
어느 가족의 자녀, 어머니, 아버지, 누군가의 친구, 직장동료로서 관심과 사랑을 주고받던 사람을 갑자기 보내야 하는 그런 아픔 속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의료진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장기기증을 위한 언급을 하기도 어렵고, 가족 사이에 함께 충분한 논의를 하고 결정을 하기에도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어려운 결정을 내리면, 의료진은 그 뜻이 헛되지 않도록 장기기증을 위하여 거쳐야 하는 모든 단계와 순간마다 신속하고 오차 없이 절차를 진행하고자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가슴 아픈 시간은 가족들이 이별을 받아들이고 말이나 글로 보내는 편지입니다. 연세가 많은 기증자의 부모님부터 막 글을 쓰기 시작한 어린아이의 글에 이르기까지, 마주하는 순간마다 먹먹해짐을 느낍니다.
서울성모병원 근무를 거쳐 2019년부터 새롭게 진료를 시작한 은평성모병원에 합류하면서 서울과 경기 서북 지역에 장기이식을 알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신생병원이자 이른바 Big5 병원이 아니라는 점은 개원 초기 은평성모병원이 헤쳐 나가야 하는 일종의 장애물이었으며, 어떻게 해야 장기이식과 기증에 대한 숭고한 의미를 지역에 긍정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병원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며 장기이식과 관련된 공간을 꾸며보고 싶었습니다.
먼저, 생체 신장이식 분야에서, 이식 환자를 만나는 과정은 주로 신장을 기증받아야 하는 수혜자가 이식을 준비하고, 이식 후에 신장의 기능을 지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치료하는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생체 이식의 과정은 다소 수혜자 중심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기증자가 느낄 수 있는 소외감과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하는 고민은 언제나 의료진에게 숙제처럼 남습니다.
뇌사 기증자들과 마찬가지로 생체 기증자들 역시 가족이나 지인을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려 자신의 몸과 삶의 일부를 기증했다는 점은 같습니다. 생명나눔이라는 숭고한 뜻을 실천한 살아 있는 기증자들인 셈입니다. 하지만 생체 기증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생체 기증자들의 숭고한 뜻에 보답하기 위해 의료진이 할 수 있는 것은 남은 콩팥을 지키며 평생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실 수 있도록 관리해 드리는 일입니다. 이 같은 배경에서 ‘김수환 추기경 기념’ 장기이식병원은 ‘신장이식 공여자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기증자께 오랫동안 건강을 지켜드리기 위하여 비뇨의학과와 함께 연 1-2회 정기적으로 안부를 나누면서 신장 기능의 추이를 확인하는 검사와 함께 기초적인 혈압, 혈당, 고지혈증 등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콩팥을 주고받으며 서로 깊은 유대감과 사랑 역시 나누었지만, 기증자와 수혜자 모두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여전히 사회에서는 뇌사 기증자와 유가족에 대한 위로와 감사함을 표하는 많은 움직임이 있습니다. 뇌사 기증자들의 남은 가족들은 모임을 활성화해 서로 위로를 주고받으며 고인의 뜻을 기리고 새로운 삶의 동력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리에 의료진이 함께 하기에는 다소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대신에 많은 가톨릭 의료기관들은 매년 11월 위령성월에 장기기증자를 기리는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행사는 1991년부터 ‘장기기증자 봉헌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년에 한 번 오는 이 시간은 멀리 떠난 그리운 가족을 만나기 위하여 그들을 보낸 공간으로 오는 시간입니다.
은평성모병원 장기이식병원은 이 시간을 조금 더 확대하고 싶다는 염원을 담아 추모공간도 만들었습니다. 뇌사 기증자를 추모하고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한 ‘기억의 벽’(Wall of Remembrance)입니다. 장기기증자의 남은 가족들이 이 공간을 찾아오는 날은 가족들에게 언제나 ‘오늘’입니다. 기억의 벽은 가족들에게는 그리운 이름을 기릴 수 있는 공간이며, 고귀한 뜻을 의료진과 내원객이 함께 나누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나누어주신 분들과 그 생명으로 힘차게 살아가는 분들을 보며 우리 모두는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장기기증과 이식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합니다. 장기기증을 몸소 실천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 모든 기증자들을 위해 마음속 ‘기억의 벽’을 세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