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규 경북대학교 의대 졸업생(전공의 수료)

4년이 흘렀다. 풋내기 본과 3학년이었던 내가 이제는 흰 가운을 입고 환자를 진료한다. 학생 시절, 넘치는 패기를 담아 세 차례 기고한 글에는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모든 의대생이 임상의사를 꿈꾸는 것은 아니며, 의사는 병원 밖에서도 환자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의사가 되어 그때 썼던 글을 다시 읽으며 당시의 열정과 지금의 현실을 음미해 본다. 감회가 새롭다.
"이 기술이 과연 환자에게 도움이 될까?"
8년 전, 의료기기를 연구하는 대학원생이던 나는 이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공학적으로 혁신적인 기술이었지만, 실제 환자에게 닿지 못하는 현실이 답답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에 대한 답을 공동 연구하던 의대 교수님으로부터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환자들한테 별 도움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때 나는 땀에서 전해질 농도를 측정하는 센서를 개발하고 있었다. 며칠 밤을 지새우고, 지도교수님에게 혼나기를 여러 차례, 대학원생의 피와 땀이 스며든 결과물을 들고 의대 교수님께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돌아온 대답은 냉담했다.
"전해질 수치를 매일 재는 사람은 없어요. 입원해서 내일모레 하는 중환자라면 모를까"
그 말은 마치 사형선고처럼 차가웠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다음 날, 지도교수님께서 센서 디자인을 완전히 바꾸자는 연락을 주셨다. 그동안 정들었던 센서들을 모두 폐기 처분해야 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의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니까.
대학원 과정 내내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나를 괴롭혔고, 그 괴로움에 두 발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대학원에서 의과대학으로, 그리고 대학병원으로. 그동안 나이 앞자리가 바뀌었고, 세상도 많이 변했다. 나는 이제 겨우 흰 가운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기술은 이미 저 멀리 앞서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와 컴퓨터 앞에 앉는다.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Perplexity로 최신 협심증 진료지침에서 달라진 내용이 있는지 확인한다.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어제 숨이 차다고 왔던 환자의 심전도 결과를 확인한다.
심전도 사진을 찍어 ECG Buddy 앱의 분석 결과와 내가 생각한 해석을 한 번 더 확인한다. 결국 환자를 더 큰 병원에 의뢰하기로 결정한 후 진료 의뢰서를 적는다. 작성한 문서가 어색하거나 오타가 없는지 최종 확인을 위해 ChatGPT의 도움을 받는다.
이처럼, AI는 이제 우리 삶에서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ChatGPT 없이는 문서 작업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의료에서도 마찬가지다. AI는 이미 의료 현장 곳곳에 도입되었다. 환자가 하는 말을 실시간으로 듣고 요약한 뒤 진료 차트에 자동으로 입력하는 서비스, AI를 활용한 흉부 X-ray 판독, 피부 질환을 진단하는 분석 서비스 등이 대표적이다. 대학병원에서도 AI의 역할은 점점 커지고 있다. 위암 수술에 사용되는 복강경에 AI 기술이 도입되어 실시간으로 혈관과 구조물을 식별하고, 보행 장애 환자의 걸음 패턴을 분석해 개인 맞춤형 치료법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의료 현장에서의 파괴적 혁신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소프트웨어로 시작한 AI 혁신이 로봇과 같은 하드웨어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AI 기반 내시경은 이미 초보 소화기내과 의사보다 높은 정확도를 보이며, 사람의 피부처럼 온도, 압력, 습도를 감지하는 전자 피부도 개발 중이다. AI와 로봇 기술의 발전이 의료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고 있다.
4년 전 기사의 마지막 문장에서는 '눈앞으로 다가온 기회 혹은 위기를 적극적으로 붙잡으라'고 외쳤다. 그러나 지금 의사가 되어 마주한 위기는 훨씬 더 가까이 와 있다. 다시 말해,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기회가 있다. 기회는 용기 있는 자가 차지하는 법이다.
4년 전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묻는다.
두 눈과 두 발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