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 평가만이 의료의 질을 높인다

조한익
발행날짜: 2004-01-14 13:08:52
  • 서울대의대 조한익 교수

“‘자유, 평등, 박애’의 추구만으로 인류의 발전과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는 없고 ‘신뢰’가 뒷받침되어야한다”는 사회학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할수록 사회학자는 거저 되는 것이 아니구나 감탄하게 된다. 인간이 가져야 할 지고지순의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반열에 “신뢰’를 올려놓은 것이다.

사실 의료는 최초부터 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고 실천해 왔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사회적 신뢰를 받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료의 전통에만 매달려서는 지속적으로 신뢰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의료 와 의사의 신뢰성에 의문을 갖는 사회가 되었다. 어떻게 의료의 신뢰성을 높이고 유지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의료의 質 자체를 향상시켜야 한다.

의료의 질 향상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 향상의 출발점은 불량품의 발견이다. 불량품을 발견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대책을 세워 실천해야 한다. 불량품은 평가에 의해 발견된다. 즉, 평가가 질 향상을 위한 첫 걸음이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 사회는 많은 규제를 풀었다. 당국의 허가 대상을 대폭 축소하였다. 즉 자율 사회로 가자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면 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신뢰성을 유지하는 장치가 없어진 것이다. 당국의 허가 과정에 의해 유지되든 신뢰 유지의 최소 조건조차 허물어진 것이다. 허가 과정이 없어졌으면 평가나 검증을 통해 신뢰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것을 갖추지 못한 채 풀어진 것이다.

의료에서도 의사를 대폭 양산하고 면허를 준 다음 마음대로 진료하도록 허락한 점 등 그야 말로 의사들을 믿고 풀어 놓은 것이다. 즉 최소한의 규제(면허 등)만하고 의료 행위는 마음대로 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의료의 품질이 낮아졌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우리나라의 불합리한 의료보험제도 등과 맞물려 의료의 품질이 낮아질 개연성은 충분하다.

의료의 품질에 문제가 있는가?

품질 개선의 출발은 불량품 즉 문제점을 발견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의료에서는 의료 평가 와 감사에 의해 불량품과 문제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현재 우리는 문제점 발견을 위한 평가와 감사 제도가 없으니 의료의 품질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르고 있다.

외국의 예를 들어 보자. 최근 아시아 지역 각국의 에이즈 검사 신뢰도를 조사한 보고가 발표되었다. 놀랍게도 가장 좋은 결과를 나타낸 나라의 정답률이 80% 수준이었고 상당수가 그보다 낮은 정답률을 보였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이 조사에 참여한 검사실들이 각국의 유수한 검사실들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임상검사정도관리협회가 2002년 전국의 약 200여개 검사실을 대상으로 에이즈 검사의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는 정답률이 99% 이상이었다. 즉 1-2개 검사실만이 오답을 낸 것이다. 이는 1995년의 95% 보다 크게 향상된 것이다. 이런 조사에서 60% 정답률을 90%로 올리는 일은 비교적 쉽다 그러나 95%를 99%로 높이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임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 검사의 신빙도가 크게 향상되었음을 단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정기적인 평가가 큰 몫을 한 것이다.

정답률은 사용된 검체의 성격과 회신된 결과의 평가 방법들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확실히 강한 양성을 보이는 검체를 사용하면 정답률이 높아진다. 아주 약한 양성을 보이는 검체를 사용하면 많은 검사실들이 음성 결과를 보고해 정답률이 낮아진다. 또한 ‘+++’ 인 것을 ‘+’로 보고하든가 HIV의 여러 항원 중에 하나라도 놓치면 틀린 것으로 엄격히 평가하면 정답률은 낮아 다. 물론 위의 오스트랄리아의 에이즈 검사 평가는 상당히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였다.

평가 조사 자체가 갖는 이런 한계를 감안해도 에이즈 검사 같이 중요한 검사는 어떤 경우라도 정답률이 100%이길 기대한다. 우리나라의 조사에서는 1-2 개 검사실이 오답을 낸다. 오답을 낸 검사실들도 최선을 다해서 검사했을 것이다. 결과가 틀렸다는 통보를 받으면 검사 방법이나 시약을 교체하는 등 개선을 해서 다음 조사에서는 정답을 내게 된다. 그런데 다음 조사에서는 또 다른 1-2개의 검사실이 오답을 낸다. 99%를 100%로 높이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임을 절감하게 된다.

검사 이외에 우리나라 의료의 질에 문제점은 없는가? 분명히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문제점 발견 장치가 없으니 무엇이 얼마나 크게 문제가 되는지도 모르고 있다.

평가 시스템이 시행되어야 의료의 질을 향상 시킬 수 있다

검사를 포함한 모든 의료 행위는 개관적인 평가를 받고 문제점을 찾아 개선해야 그 질을 높일 수 있다. 의사 개인의 자기 의료에 대한 평가 각 의료 기관의 자체 평가 그리고 각 전문 학회별 평가 그리고 국가 단위의 평가 등이 시행되어야 한다. 특히 각 학회나 정부 기관에 의한 객관적인 평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평가제도를 도입하여 의료 품질 향상에 기여토록 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

첫째 자율 참여 그리고 자율 개선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평가 결과(절대 평가와 타 기관과의 상대 평가)를 참여 의료 기관에 알려 주고 스스로 개선토록 해야 한다. 이 결과를 가지고 의료기관에 불이익을 주든가 제재를 가하는 것은 평가의 목표인 문제점 발견이나 평가의 최종 목표인 의료의 질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둘째 평가제도 자체의 품질을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평가 제도를 시작하여 10년 이상은 평가제도 자체를 평가하는 기간으로 삼고 계속 개선해야 한다.

잘된 평가는 의료의 질 향상과 의료의 신뢰 구축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평가한 결과를 가지고 의료 기관을 차등화하고 이에 따라 보험료를 차등 지급한다든가 하는 발상은 의료의 품질 향상을 위한 평가 목표를 잘못 이해한 것이고 평가를 하지 말자는 것 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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