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사' 박경철 (안동 신세계클리닉 원장)
<고정칼럼 집필자 소개> |
인터넷에서 필명'시골의사'로 통하는 박경철 외과전문의는 국내 최고의 사이버애널리스트로 MBN 주식토크쇼를 진행하고 있으며 주식시장에 대한 남다른 철학과 날카로운 분석력을 인정받고 있다.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때 만들어진 좌파의 개념은 막스와 앵겔스로 이어지는 극좌파와 키에르케고르.루카치 사르트르로 이어지는 중도좌파로 나누어지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러한 정치철학적 구분보다는, 로크의 사회계약론이래 정부의 개입과 통제를 당연시하는 아메리카적 우파와(청교도적 질서), 푸르동등의 아나키즘적 영향이 남아 있는 유러피안적 좌파 (구교적 질서)를 우파와 좌파의 경계선으로 두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좌파적 정권으로 규정하는 참여정부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사실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 정부의 정책이 "사회주의적이다" 혹은 "좌파정권이다" 라고 주장하기에 앞서 '지피지기'의 관점에서 현 참여정부의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막연히 "좌파적이다, 사회주의적 정강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공허한 메아리에 다름아니다.
다시말해 지금은 과거 막스를 악마처럼 저주하는 우파도, 막스를 조상으로 신봉하는 좌파도 사실 그의 자본론 한번 제대로 읽어 보지 않은 채, 좌ㆍ우익으로 머리가 터지도록 싸웠던 7.80년대가 아니라, 이념의 시대가 가고 강령이 그자리를 이어받고 있는 '도그마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 참여정부의 강령은 어떠한가?
사실 엄밀히 말하면 참여정부는 유러피안적 실용주의 정부라고 볼 수 있다. 호남이라는 절대적 지지기반을 통해서도 극복하지 못한 소수정권의 약점을 눈여겨본(심지어 의약분업 투쟁에서도 제도도입자체는 성공하였으나 시행의 강령에서는 의사에게 패했으며 그것이 레임덕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현 정권의 테크노크랏들은 그나마 절반의 지역적 기반조차 없는 허약한 정치적 기반위에서 정권 성공의 가늠자가 대중의 지지라는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른바 참여정부의 한계는 일부러 상위 노블리스들의 주장을 외면하고 싶다기 보다는 같은 한표를 가진 다수의 대중의 지지가 더 중요한 절대적 기반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소수의 이익을 제한 하더라도 다수의 정서적 지지에 호소할 수 밖에 없는 유럽식 강령을 가져 갈 수 밖에 없다는 데 있다.(때문에 의료제도의 방향성 역시 미국보다는 영국식 모델을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참여정부의 정체성은 좌파적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실행강령은 자의던 타의던 근본적으로 포퓰리즘적 한계에 포박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면에서는 상당히 실용주의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만약 참여정부에서 처음 의약분업이 제안되었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보류쪽으로 결론이 났을 것이며, 그랬다면 지금 우리들의 현안도 '의약분업'이 아닌 공공의료의 확대나, 의료수가 인하, 혹은 세금부담의 강화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말해, 의약분업과같은 정책은 이념적인 결정이지, 강령적인 정책이 아니며, 강령적인 관점에서는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의료소비자 전체와 소수의사 둘중 하나의 지지를 선택하고 나머지 하나는 버리는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결정권자라면 어느쪽을 버리겠는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답지에 채점까지 끝나있는 것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아무리 우리가 집회를 하고, 병원문을 닿아 걸고, 직원가족 모두 모아서 결사항전을 벌인다고 해도 참여정부의 속성은 오히려 이것을 도전세력에 대한 시범케이스로, 희생양으로 삼으려 들 것이다.
특히 지난해 노동계와의 대립을 살펴보자. 당시 (자신들의 지지기반인 노조의 강공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들고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었던 포퓰리즘 정권의 입장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희생양이다. 이때 조흥은행 노조파업과, 국철파업등과 같은 화이트 칼러의 강공은 참여정부에게는 오히려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지만, 반대로 노조의 집행부에는 돌이 킬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가 되었으며, 이때 은행노조와 국철노조의 괴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게다가 참여정부의 강령이라는 입장에서에서 보면 남아있는 과제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처음 한해는 수백만의 신용불량자와 실업자문제를 전 정권의 유산이라는 주장으로 버틸 수있지만, 집권 이년차부터는 이것은 심각한 부담이다,
그렇기에 만약 내수경기의 추가적인 침체와 북핵문제 등의 난제들이 꼬이기 시작한다면 자칫 집권 초반기에 레임덕이 걸릴수도 있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참여정부의 입장에서는 일차적으로는 총선승리가 절박하지만, 만약 총선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이후부터는 대중정치에 호소 할 수 밖에 없는 결과가 도래한다.
다시말해 총선에 이기면 강령의 실현을 위한 강공이 시작 될 것이고, 패배한다면 직접적으로 대중의 정서에 호소하는 본격적인 포퓰리즘, 즉 대중정치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때 우리가 총선에서 집권세력의 대척점에 서서 혹은 총선을 전후한 시기에 물리적인 압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거나, 혹은 총선 후에 집권세력이 이기건 지건 이것을 기회삼아 대정부투쟁의 선봉에 선다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그길로 태극기 휘날리며 산산히 부서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의사협회의 '정치세력화' 구호와 명분은 옳지만, 그에 앞서 과연 정치세력화의 철학은 무엇인가? 혹은 상대는 얼마나 알고 있가? 만약 그렇다면 , 다부동 전투의 구멍뚫린 철모의 이름없는 용사처럼 모두가 산화할 준비는 되어 있는가?
아니면 불참자에게 벌금 수십만원을 매기고 일인당 수십만원씩 모아서 동원된 버스를 타고와서는 여의도 둔치보다, 63빌딩에 쇼핑몰에 더많은 사람들이 붐볐던 그날이 정말 전 의료인이 죽기살기로 하나임을 확인한 것은 분명했는지.. 이런 텍스트가 갖는 의미를 객관적으로 잘 새겨 보지 않고서는 그야말로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의사협회의 '정치세력화', 궁극적으로는 지향해야 할 바가 분명하지만, 만약 그것이 국회의원 출마자 몇명에게 정치자금 몇푼 대주거나, 의협간부 자리를 발판삼아 비례대표나 기웃거리기 위한 치기어린 발상이라면, 차라리 이대로 숨죽여 사는 것이 낫다.
그러면 최소한 몇 년안에 호구지책이 끊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차라리 비굴해지자,,
그러나 만약 싸우기로 작정하되 죽기를 각오하지 못한다면, 전혀 승산이 없는 게임이다. 어쩌면 죽어야 사는 게임인지도 모른다. 지도부는 지도부대로 죽고, 개인은 개인대로 철저히 자기를 죽여야 궁극적으로는 사는 것이며, 반대로 지도부는 자리가 아깝고, 개인은 기득권이 아까우면 살아도 죽는 것이다.
"죽어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