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동후디스 전념…"새로운 도약은 후배들의 몫"
이금기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
일동제약은 이 회장은 오는 28일 열리는 정기주주총회에서 재선임에 나서지 않기로 했다고 9일 밝혔다. 사유는 일동제약이 면모를 일신하여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이 회장은 앞으로 일동후디스의 경영에만 전념하게 된다.
영원한 일동인
이 회장은 지난 50년 동안 단 한번도 일동을 떠난 적 없는 '뼛속까지 일동인'으로, 지난 1960년 서울대학교 약학과를 졸업한 후 회사에 입사했다.
"일동제약은 작은 회사였지만, 한국 최초의 유산균제인 비오비타를 개발하는 등 경쟁력과 소신이 있는 회사였습니다. 이런 회사라면 젊음을 걸 수 있겠다 싶었죠."
이렇게 시작된 일동제약과의 인연은 결국 인생의 전부가 됐다.
입사 후 곧바로, 아로나민의 개발에 뛰어든 이 회장은 3년간의 노력 끝에 개발과 생산에 성공하게 되고, 발매 후에는 곧바로 영업부로 자리를 옮겨 아로나민의 마케팅을 주도하게 된다.
이 회장의 주도 하에 스포츠 마케팅, 캠페인 광고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펼쳤고, 이런 노력과 우수한 약효에 힘입어 아로나민은 경쟁 브랜드를 제치고 시장을 석권하게 되며 이후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개발과 생산, 영업에 이르기까지 그의 고민과 손길을 거쳤기에, 아로나민에 대한 이 회장의 애착은 남다르며, 당시 직원들 사이에서 '아로나민부장'이라는 별칭으로 통하기도 했다.
아로나민의 대성공으로 창업주였던 윤용구 회장의 굳은 신임을 얻은 이 회장은 1971년 전무이사로 승진하면서 사실상 일동제약의 경영을 책임지게 됐다.
1970년대에는 치료제 메이커로의 변모를 꾀했다. 일반의약품에만 치중해서는 장기적인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선견지명의 덕분이었다.
선진 제약사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최신 의약품 생산 노하우를 익히고, 다양한 치료군의 전문의약품 생산라인을 구축함으로써 대형 제약사의 발판을 마련했다.
아로나민, 비오비타 등 간판 브랜드들의 순항에 안주하지 않고, 생산시설에 대한 투자와 함께 원료합성기술과 제제기술 등을 꾸준히 축적한 결과, 1980년대 초에는 국내 제너릭 제품의 효시격인 '큐란'의 개발에 성공하기도 했다.
1995년부터는 전문경영인으로는 최초로 한국제약협회장을 역임하며, 공정경쟁규약을 만들어 약가 질서를 확립하는 등 혼란스러운 의약품 거래질서를 바로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특히, 당시 원료가격과 인건비만을 의약품의 원가로 생각하는 것은 제약의 특수성을 모르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연구 개발에 소요되는 비용도 원가에 포함해야 한다는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기도 했다.
새로운 도약은 후배들의 몫
1998년 일동제약은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외환위기 상황 속에서 계열사였던 맥슨전자에 대한 지급보증 문제로 인해 모회사인 일동제약에 불똥이 튄 것.
결국 일동제약은 워크아웃이라는 불가피한 선택을 하게 된다.
당시 일동후디스의 경영에 전념하던 이 회장은 경영 일선 복귀했고, 이 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모든 임직원이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단행한 결과 워크아웃을 3년 만에 조기 졸업했다. 이는 지금도 워크아웃의 성공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위기를 겪은 이후 10년간은, R&D와 첨단 생산시설 구축 등 중장기적인 경쟁력 마련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기업문화의 쇄신을 위해 회사의 모든 부문에 대한 혁신을 단행했다.
회사에 대한 지급보증이 원인이 되었지만, 부지불식간에 조금씩 조직에 스며든 안이한 기업문화도 위기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한 이 회장은, 워크아웃의 교훈을 계기로 중장기적인 경쟁력 강화에 보다 주력했다.
다양한 신약개발 과제를 추진함은 물론 첨단의 연구소를 새롭게 설립하고, 국제 GMP 수준의 신공장도 완공했다.
도전적인 기업문화를 위해 새로운 목표관리제도와 신인사제도를 도입하고, KMS, ERP, CRM 등의 선진 프로세스를 도입, 혁신적인 정보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워크아웃 졸업 후 일동제약은 거의 매년 두 자리 수의 매출 성장을 이루고 지난해에는 매출 3천억 원을 돌파했다.
이 회장은 이제부터 제2의 경영인생을 일동후디스에서 불태우게 된다.
"일동제약이 또 한 번의 도약을 위한 활주로를 닦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 길을 달려 날아오르는 것은 후배 일동인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일동제약은 이 회장은 오는 28일 열리는 정기주주총회에서 재선임에 나서지 않기로 했다고 9일 밝혔다. 사유는 일동제약이 면모를 일신하여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이 회장은 앞으로 일동후디스의 경영에만 전념하게 된다.
영원한 일동인
이 회장은 지난 50년 동안 단 한번도 일동을 떠난 적 없는 '뼛속까지 일동인'으로, 지난 1960년 서울대학교 약학과를 졸업한 후 회사에 입사했다.
"일동제약은 작은 회사였지만, 한국 최초의 유산균제인 비오비타를 개발하는 등 경쟁력과 소신이 있는 회사였습니다. 이런 회사라면 젊음을 걸 수 있겠다 싶었죠."
이렇게 시작된 일동제약과의 인연은 결국 인생의 전부가 됐다.
입사 후 곧바로, 아로나민의 개발에 뛰어든 이 회장은 3년간의 노력 끝에 개발과 생산에 성공하게 되고, 발매 후에는 곧바로 영업부로 자리를 옮겨 아로나민의 마케팅을 주도하게 된다.
이 회장의 주도 하에 스포츠 마케팅, 캠페인 광고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펼쳤고, 이런 노력과 우수한 약효에 힘입어 아로나민은 경쟁 브랜드를 제치고 시장을 석권하게 되며 이후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개발과 생산, 영업에 이르기까지 그의 고민과 손길을 거쳤기에, 아로나민에 대한 이 회장의 애착은 남다르며, 당시 직원들 사이에서 '아로나민부장'이라는 별칭으로 통하기도 했다.
아로나민의 대성공으로 창업주였던 윤용구 회장의 굳은 신임을 얻은 이 회장은 1971년 전무이사로 승진하면서 사실상 일동제약의 경영을 책임지게 됐다.
1970년대에는 치료제 메이커로의 변모를 꾀했다. 일반의약품에만 치중해서는 장기적인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선견지명의 덕분이었다.
선진 제약사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최신 의약품 생산 노하우를 익히고, 다양한 치료군의 전문의약품 생산라인을 구축함으로써 대형 제약사의 발판을 마련했다.
아로나민, 비오비타 등 간판 브랜드들의 순항에 안주하지 않고, 생산시설에 대한 투자와 함께 원료합성기술과 제제기술 등을 꾸준히 축적한 결과, 1980년대 초에는 국내 제너릭 제품의 효시격인 '큐란'의 개발에 성공하기도 했다.
1995년부터는 전문경영인으로는 최초로 한국제약협회장을 역임하며, 공정경쟁규약을 만들어 약가 질서를 확립하는 등 혼란스러운 의약품 거래질서를 바로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특히, 당시 원료가격과 인건비만을 의약품의 원가로 생각하는 것은 제약의 특수성을 모르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연구 개발에 소요되는 비용도 원가에 포함해야 한다는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기도 했다.
새로운 도약은 후배들의 몫
1998년 일동제약은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외환위기 상황 속에서 계열사였던 맥슨전자에 대한 지급보증 문제로 인해 모회사인 일동제약에 불똥이 튄 것.
결국 일동제약은 워크아웃이라는 불가피한 선택을 하게 된다.
당시 일동후디스의 경영에 전념하던 이 회장은 경영 일선 복귀했고, 이 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모든 임직원이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단행한 결과 워크아웃을 3년 만에 조기 졸업했다. 이는 지금도 워크아웃의 성공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위기를 겪은 이후 10년간은, R&D와 첨단 생산시설 구축 등 중장기적인 경쟁력 마련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기업문화의 쇄신을 위해 회사의 모든 부문에 대한 혁신을 단행했다.
회사에 대한 지급보증이 원인이 되었지만, 부지불식간에 조금씩 조직에 스며든 안이한 기업문화도 위기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한 이 회장은, 워크아웃의 교훈을 계기로 중장기적인 경쟁력 강화에 보다 주력했다.
다양한 신약개발 과제를 추진함은 물론 첨단의 연구소를 새롭게 설립하고, 국제 GMP 수준의 신공장도 완공했다.
도전적인 기업문화를 위해 새로운 목표관리제도와 신인사제도를 도입하고, KMS, ERP, CRM 등의 선진 프로세스를 도입, 혁신적인 정보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워크아웃 졸업 후 일동제약은 거의 매년 두 자리 수의 매출 성장을 이루고 지난해에는 매출 3천억 원을 돌파했다.
이 회장은 이제부터 제2의 경영인생을 일동후디스에서 불태우게 된다.
"일동제약이 또 한 번의 도약을 위한 활주로를 닦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 길을 달려 날아오르는 것은 후배 일동인들에게 맡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