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의대 본과 4학년 정세용 씨
다른 젊은이들과 달리, 의사가 "난 떼돈을 벌 거야!"라고 하면 왜 비윤리적이거나 불법적인 일을 할 거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를까. 지난 글에서 의사가 성직자나 공직자와 같은 직업이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보이고, 이어서 다른 전문 분야들과 비교를 해 보았지만 여전히 명쾌한 대답을 내지 못했다. 조금 더 분석해 나가 보자.
다시 의술의 본질로 돌아와서
다른 전문 분야의 직업과 비교해서도 답을 얻지 못했다면, 그 직업들과 의사가 차이나는 점이 무엇일까? 결국 다시 의술의 본질로 돌아와서, '의사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다.'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다. 시외버스 운전기사나 식료품 제조 회사 주인도 타인의 생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야 있겠지만, '생명'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전문’ 분야라 할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의사뿐이지 않겠는가.
돌 반지나 부조금을 통해 타인의 탄생과 죽음에 정확한 가격을 매기고 있는 이 시대에도, 죽음이 자신의 문제로 다가왔을 때 잘 대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다른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비윤리적으로 행동해도 돈의 문제가 되지만, 의사가 비윤리적으로 행동하면 건강 상 위해가 가해진다는 점은 분명히 다른 분야와의 큰 차이점이 될 것이다.
필자도 '의사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기에, 환자는 의사에게 다른 직종에 비해 더 높은 윤리적 잣대를 들이댄다.'는 말은 맞는 말이고, 실제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혹은 더 나아가 가능하냐 불가능하냐의 문제는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일단 이 '사실'이 의사가 떼돈을 원하면 안 되는 이유와 관계있는지만 생각해보자.
우선 이러한 경우가 흔한 경우인가? 3차병원에서도 의사의 '윤리' 여부가 환자 '목숨'에 직결되는 경우가 다수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2차병원이나 1차병원으로 오면 더욱 적다. 그리고 의사를 증오하는 국민의 이야기도, 의사가 환자의 건강에 대한 지위를 악용하여 '돈을 뜯는다'는 분노가 '건강을 해친다'는 분노보다 더 많기도 하다. 물론 이 두 가지는 어떠한 근거에 바탕 하기보다, 필자의 짧은 단상이기에 다소 조심스럽다.
분명한 것은, 여전히 젊은 의사가 "난 떼돈을 벌 거야!라고 외쳤을 때 그의 첫 인상이 잠재적 범법자가 될 이유는 없다. 의사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기에, 더 높은 윤리적 잣대가 필요하다고?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이 문제랑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전의 글에서 공직자와의 비교를 통해서 이야기했듯이,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돈을 번다. 그런데 왜 "떼돈을 벌겠다는 말을 "환자를 더 열심히, 성실히 치료하겠다."로 듣지 않고, "환자의 생명에 대한 지위로 떼돈을 뜯어내겠다."는 말로 이해한단 말인가.
이전의 글에서 필자도 "의사는 환자의 건강을 위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의사의 양심이 중요하다."는 구절을 썼는데, 그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양심과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환자에게, 몇 마디 말로 꾀어 값비싼 검사와 치료를 시켜 푼돈을 모으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성심성의를 다해 치료해 나감으로써 더 많은 환자를 치료하고 더 많은 지식을 알게 됨으로써, 그런 식으로 언젠가 유명한 의사가 되어 돈도 많이 벌고 싶다는 것이라면 말이다.
물론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환자 앞에서도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의사가 있을 수 있고 또 그것이 결코 옳다는 것이 아니지만, 그런 의사가 떼돈을 벌고 싶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그것 보다는 그 의사가 환자를 보는데 지치고, '명의'든 '떼돈'이든 어떠한 종류의 열정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역시나 크게 정당한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러면 다시 돌아와서, 벌써 몇 번째 되묻는지 모르겠지만, 의사가 "난 떼돈을 벌 거야!"라고 하면 왜 안 될까? 이쯤 되면 이제 그 이유가 어느 정도 보인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로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돈을 버는 것이 사실은 충돌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고, 두 번째는 의사가 이제까지 비윤리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기에 의사의 인상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두 가지 모두 영향을 미쳤고, 또 두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비윤리적이다!'는 주홍 글씨
2012년 9월, 노환규 제 37대 대한의사협회 (이하 의협) 회장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의사들이 그간 비윤리적인 행동들을 해왔음을 폭로했다. 3분 진료나 비보험 진료에 관한 이야기, 혹은 로봇 수술의 사망률이 80%에 달함에도 돈이 되기에 계속 한다는 이야기 등. 단독 행동 혹은 근거 부족 등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의협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그들의 잘못을 인정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 파장이 작지 않았다.
사실, 환자들의 눈에 비친 의사들의 모습이 항상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의사를 만날 시간 자체가 부족하여 자세한 정보를 얻지 못하는 것도 답답한데, 만나더라도 권위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모습. 1998년 김용익 당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의약품 비리를 통해 의사들이 얼마나 '양심이 마비'되고 '병균에 노출'되어 '타락'한 집단인가에 대해 역설했고, 이어 2000년 의약분업 당시 파업을 하며 수가 인상을 받아내는 의사들을 보며, 아마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을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만 이야기한다면 의사들의 입장에서도 억울한 면은 없지 않다. 최근 의정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의사들을 격렬히 비난하던 정홍원 국무총리마저도, 이제까지 한국 의료의 발전은 "의사들의 많은 헌신과 노력 덕분이었다.”고 인정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노환규 의협 회장의 인터뷰에서도, 왜곡된 의료 제도가 이러한 비윤리적인 행동들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여기서 왜곡된 의료 제도라 하면 과도한 근무 시간, 지나친 정부의 규제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원가 이하의 수가, '저수가' 문제 아니겠는가. 원가 이하의 수가는 정상 보험 진료만으로는 병원 운영이 어렵도록 함으로써, 비보험 진료를 유도하고 과잉 진료와 3분 진료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약가 마진이나 의약품 리베이트, 3대 비급여 (상급 병실료, 선택진료비, 간병비), 그리고 최근 논란이 된 영리 자회사도 결국 큰 그림에서 이 저수가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국민들의 분노에 대한 의사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고 해도, 정상 참작은 가능하지 않을까.
의사가 진료를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가 있었고, 의사들도 환자들에게 충분히 좋은 모습으로 비춰지지 못했다. 두 가지는 악순환을 반복하여, 이제는 의사가 "난 떼돈을 벌 거야!"라고만 해도 잠재적 범법자 취급을 받는 수준까지 왔다. 오로지 제도 때문이라 하는 것도 순전히 의사들의 탓이라 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이, 37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이를 고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이렇게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문장에서 시작해서, 한참을 돌아 여기까지 왔다. 그에 비해 다소 식상한 결론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 저수가와 의사들의 업보를 원인으로 꼽았다. 그런데 이 식상한, 돌려 말하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 문제를, 왜 아무도 고치지 않았을까. 기회가 없어서, 아니면 의지가 없어서?
37년 동안 문제를 제기할 기회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문제가 있을 것은 충분이 예측이 가능했다. 1977년 근로자를 대상으로 의료 보험이 최초로 시작될 때든, 2000년 건강보험 재정이 통합될 때든 말이다. 문제를 제기할 거리도 많았다. 보험료나 수가의 책정 기준이 된 시범 사업에 대해서든, 아니면 통합이라는 이념의 논리가 가진 허상에 대해서든 말이다.
의료계가 이 문제를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글쎄, 의료계가 이 저수가 문제를 얼마나 뜯어 고치고 싶어 하는지는, 이언주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과의 일만 봐도 알 수 있다. 2년 전 중범죄 의료인의 면허 영구 박탈을 추진하며 의사들의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았던 이 의원은, 최근 국정 감사에서 몇 차례 '저수가' 문제를 지적하기만 했음에도 금세 의사들에게 '구세주' 대접을 받곤 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결국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는 못했다. 때로 이에 관한 목소리를 낼 때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새로 도입되는 의료 제도에 대한 반대 근거의 일환으로 '저수가' 등의 문제가 따라 나올 뿐이었다. 게다가 저수가의 폐해를 지적하는 많은 사람들도, 수가를 교정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동의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등의 변명 하에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실제로 현재 수가가 적절하냐, 수가를 올리는 것이 해결책이냐, 다른 해결책은 없느냐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고, 필자도 전문가가 아니기에 여기서 이에 관해 특정한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두 가지는, 첫 번째로 의료계가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꺼려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 이 문제를 의료계 내부의 문제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저수가' 담론의 핵심은 사실 단순히 '적게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아야 할 만큼도 못 받는', '원가 이하의' 수가이다. '수가를 올리자'는 결론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점만을 제외하면, 사실 두 가지는 아주 다른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수가를 올리자’는 결론을 굳이 내세우지 않고도, 저수가를 포함한 여러 의료 제도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의료계에는 기본적으로 의사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하며, 이러한 담론이 밥그릇 싸움으로 비춰질 것을 미리 염려한다.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말은, 아마 37년 전에도 의사의 금기어였던 것 같다.
만약 이 문제가 그저 의료계만 고통 받음으로써, 혹은 단어 선택을 달리해서, 그저 '돈 잘 번다'는 의료계만 의무적으로 봉사와 헌신을 실천 당함으로써 해결될 문제라면, 그렇다면 정말 의술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해 보는 것이 중요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료 보험 제도 자체가 '저수가'라는 기형적 구조에서 시작하는 마당에, 이것이 환자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의사가 진단을 위해 MRI를 찍을지 말지 결정할 때, 혹은 똑같은 성분과 가격의 해열제 중 어느 것을 고를지 선택할 때, 이것의 영향이 없단 말인가. 저수가와 전공의의 과도한 근무 시간, 그리고 그에 의한 환자의 피해가 상관이 없는가. 만약 포괄수가제 문제를 '의료의 질'을 떼어 놓고 '의료비 절감'이라는 측면에서만 논의했다면, 아마 아무런 논란이 없었을 것이다.
"난 떼돈을 벌 거야!"
결국, 필자가 분석한 것은 이렇다.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말을 터부시하는 의사들의 문화가 있었고, 의료 보험 도입으로 인해 받을 만큼도 못 받는 상황이 펼쳐져도, 이를 고쳐달라는 정당한 요구를 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왔다. 그 사이 의료 보험 재정 악화와 함께 의료 제도의 왜곡은 더욱 심해졌고, 의사의 이미지는 더더욱 나빠졌다. 이제 의사는 떼돈을 벌겠다는 말을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당한 대가를 요청하는 것조차도 히포크라테스라는 이름의 철퇴에 가격 당한다.
이것을 의료계만의 일로 치부할 수 있다면, 그대로 덮어 두어도 외부인들에게는 상관이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의 원리라는 것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왜곡된 의료 제도는 물론이고, 나빠진 의사들의 이미지 역시 환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첫 글의 서두에서 밝혔다시피 이번 원격 의료나 영리 자회사 등의 논란에서 충분한 논의가 부족했던 것도 이러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이 문제를 더 미루지 말고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다음 글에서부터, 필자의 본격적인 주장을 시작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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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의술의 본질로 돌아와서
다른 전문 분야의 직업과 비교해서도 답을 얻지 못했다면, 그 직업들과 의사가 차이나는 점이 무엇일까? 결국 다시 의술의 본질로 돌아와서, '의사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다.'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다. 시외버스 운전기사나 식료품 제조 회사 주인도 타인의 생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야 있겠지만, '생명'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전문’ 분야라 할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의사뿐이지 않겠는가.
돌 반지나 부조금을 통해 타인의 탄생과 죽음에 정확한 가격을 매기고 있는 이 시대에도, 죽음이 자신의 문제로 다가왔을 때 잘 대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다른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비윤리적으로 행동해도 돈의 문제가 되지만, 의사가 비윤리적으로 행동하면 건강 상 위해가 가해진다는 점은 분명히 다른 분야와의 큰 차이점이 될 것이다.
필자도 '의사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기에, 환자는 의사에게 다른 직종에 비해 더 높은 윤리적 잣대를 들이댄다.'는 말은 맞는 말이고, 실제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혹은 더 나아가 가능하냐 불가능하냐의 문제는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일단 이 '사실'이 의사가 떼돈을 원하면 안 되는 이유와 관계있는지만 생각해보자.
우선 이러한 경우가 흔한 경우인가? 3차병원에서도 의사의 '윤리' 여부가 환자 '목숨'에 직결되는 경우가 다수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2차병원이나 1차병원으로 오면 더욱 적다. 그리고 의사를 증오하는 국민의 이야기도, 의사가 환자의 건강에 대한 지위를 악용하여 '돈을 뜯는다'는 분노가 '건강을 해친다'는 분노보다 더 많기도 하다. 물론 이 두 가지는 어떠한 근거에 바탕 하기보다, 필자의 짧은 단상이기에 다소 조심스럽다.
분명한 것은, 여전히 젊은 의사가 "난 떼돈을 벌 거야!라고 외쳤을 때 그의 첫 인상이 잠재적 범법자가 될 이유는 없다. 의사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기에, 더 높은 윤리적 잣대가 필요하다고?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이 문제랑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전의 글에서 공직자와의 비교를 통해서 이야기했듯이,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돈을 번다. 그런데 왜 "떼돈을 벌겠다는 말을 "환자를 더 열심히, 성실히 치료하겠다."로 듣지 않고, "환자의 생명에 대한 지위로 떼돈을 뜯어내겠다."는 말로 이해한단 말인가.
이전의 글에서 필자도 "의사는 환자의 건강을 위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의사의 양심이 중요하다."는 구절을 썼는데, 그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양심과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환자에게, 몇 마디 말로 꾀어 값비싼 검사와 치료를 시켜 푼돈을 모으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성심성의를 다해 치료해 나감으로써 더 많은 환자를 치료하고 더 많은 지식을 알게 됨으로써, 그런 식으로 언젠가 유명한 의사가 되어 돈도 많이 벌고 싶다는 것이라면 말이다.
물론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환자 앞에서도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의사가 있을 수 있고 또 그것이 결코 옳다는 것이 아니지만, 그런 의사가 떼돈을 벌고 싶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그것 보다는 그 의사가 환자를 보는데 지치고, '명의'든 '떼돈'이든 어떠한 종류의 열정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역시나 크게 정당한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러면 다시 돌아와서, 벌써 몇 번째 되묻는지 모르겠지만, 의사가 "난 떼돈을 벌 거야!"라고 하면 왜 안 될까? 이쯤 되면 이제 그 이유가 어느 정도 보인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로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돈을 버는 것이 사실은 충돌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고, 두 번째는 의사가 이제까지 비윤리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기에 의사의 인상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두 가지 모두 영향을 미쳤고, 또 두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비윤리적이다!'는 주홍 글씨
2012년 9월, 노환규 제 37대 대한의사협회 (이하 의협) 회장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의사들이 그간 비윤리적인 행동들을 해왔음을 폭로했다. 3분 진료나 비보험 진료에 관한 이야기, 혹은 로봇 수술의 사망률이 80%에 달함에도 돈이 되기에 계속 한다는 이야기 등. 단독 행동 혹은 근거 부족 등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의협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그들의 잘못을 인정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 파장이 작지 않았다.
사실, 환자들의 눈에 비친 의사들의 모습이 항상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의사를 만날 시간 자체가 부족하여 자세한 정보를 얻지 못하는 것도 답답한데, 만나더라도 권위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모습. 1998년 김용익 당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의약품 비리를 통해 의사들이 얼마나 '양심이 마비'되고 '병균에 노출'되어 '타락'한 집단인가에 대해 역설했고, 이어 2000년 의약분업 당시 파업을 하며 수가 인상을 받아내는 의사들을 보며, 아마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을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만 이야기한다면 의사들의 입장에서도 억울한 면은 없지 않다. 최근 의정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의사들을 격렬히 비난하던 정홍원 국무총리마저도, 이제까지 한국 의료의 발전은 "의사들의 많은 헌신과 노력 덕분이었다.”고 인정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노환규 의협 회장의 인터뷰에서도, 왜곡된 의료 제도가 이러한 비윤리적인 행동들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여기서 왜곡된 의료 제도라 하면 과도한 근무 시간, 지나친 정부의 규제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원가 이하의 수가, '저수가' 문제 아니겠는가. 원가 이하의 수가는 정상 보험 진료만으로는 병원 운영이 어렵도록 함으로써, 비보험 진료를 유도하고 과잉 진료와 3분 진료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약가 마진이나 의약품 리베이트, 3대 비급여 (상급 병실료, 선택진료비, 간병비), 그리고 최근 논란이 된 영리 자회사도 결국 큰 그림에서 이 저수가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국민들의 분노에 대한 의사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고 해도, 정상 참작은 가능하지 않을까.
의사가 진료를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가 있었고, 의사들도 환자들에게 충분히 좋은 모습으로 비춰지지 못했다. 두 가지는 악순환을 반복하여, 이제는 의사가 "난 떼돈을 벌 거야!"라고만 해도 잠재적 범법자 취급을 받는 수준까지 왔다. 오로지 제도 때문이라 하는 것도 순전히 의사들의 탓이라 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이, 37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이를 고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이렇게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문장에서 시작해서, 한참을 돌아 여기까지 왔다. 그에 비해 다소 식상한 결론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 저수가와 의사들의 업보를 원인으로 꼽았다. 그런데 이 식상한, 돌려 말하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 문제를, 왜 아무도 고치지 않았을까. 기회가 없어서, 아니면 의지가 없어서?
37년 동안 문제를 제기할 기회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문제가 있을 것은 충분이 예측이 가능했다. 1977년 근로자를 대상으로 의료 보험이 최초로 시작될 때든, 2000년 건강보험 재정이 통합될 때든 말이다. 문제를 제기할 거리도 많았다. 보험료나 수가의 책정 기준이 된 시범 사업에 대해서든, 아니면 통합이라는 이념의 논리가 가진 허상에 대해서든 말이다.
의료계가 이 문제를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글쎄, 의료계가 이 저수가 문제를 얼마나 뜯어 고치고 싶어 하는지는, 이언주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과의 일만 봐도 알 수 있다. 2년 전 중범죄 의료인의 면허 영구 박탈을 추진하며 의사들의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았던 이 의원은, 최근 국정 감사에서 몇 차례 '저수가' 문제를 지적하기만 했음에도 금세 의사들에게 '구세주' 대접을 받곤 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결국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는 못했다. 때로 이에 관한 목소리를 낼 때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새로 도입되는 의료 제도에 대한 반대 근거의 일환으로 '저수가' 등의 문제가 따라 나올 뿐이었다. 게다가 저수가의 폐해를 지적하는 많은 사람들도, 수가를 교정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동의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등의 변명 하에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실제로 현재 수가가 적절하냐, 수가를 올리는 것이 해결책이냐, 다른 해결책은 없느냐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고, 필자도 전문가가 아니기에 여기서 이에 관해 특정한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두 가지는, 첫 번째로 의료계가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꺼려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 이 문제를 의료계 내부의 문제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저수가' 담론의 핵심은 사실 단순히 '적게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아야 할 만큼도 못 받는', '원가 이하의' 수가이다. '수가를 올리자'는 결론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점만을 제외하면, 사실 두 가지는 아주 다른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수가를 올리자’는 결론을 굳이 내세우지 않고도, 저수가를 포함한 여러 의료 제도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의료계에는 기본적으로 의사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하며, 이러한 담론이 밥그릇 싸움으로 비춰질 것을 미리 염려한다.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말은, 아마 37년 전에도 의사의 금기어였던 것 같다.
만약 이 문제가 그저 의료계만 고통 받음으로써, 혹은 단어 선택을 달리해서, 그저 '돈 잘 번다'는 의료계만 의무적으로 봉사와 헌신을 실천 당함으로써 해결될 문제라면, 그렇다면 정말 의술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해 보는 것이 중요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료 보험 제도 자체가 '저수가'라는 기형적 구조에서 시작하는 마당에, 이것이 환자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의사가 진단을 위해 MRI를 찍을지 말지 결정할 때, 혹은 똑같은 성분과 가격의 해열제 중 어느 것을 고를지 선택할 때, 이것의 영향이 없단 말인가. 저수가와 전공의의 과도한 근무 시간, 그리고 그에 의한 환자의 피해가 상관이 없는가. 만약 포괄수가제 문제를 '의료의 질'을 떼어 놓고 '의료비 절감'이라는 측면에서만 논의했다면, 아마 아무런 논란이 없었을 것이다.
"난 떼돈을 벌 거야!"
결국, 필자가 분석한 것은 이렇다.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말을 터부시하는 의사들의 문화가 있었고, 의료 보험 도입으로 인해 받을 만큼도 못 받는 상황이 펼쳐져도, 이를 고쳐달라는 정당한 요구를 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왔다. 그 사이 의료 보험 재정 악화와 함께 의료 제도의 왜곡은 더욱 심해졌고, 의사의 이미지는 더더욱 나빠졌다. 이제 의사는 떼돈을 벌겠다는 말을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당한 대가를 요청하는 것조차도 히포크라테스라는 이름의 철퇴에 가격 당한다.
이것을 의료계만의 일로 치부할 수 있다면, 그대로 덮어 두어도 외부인들에게는 상관이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의 원리라는 것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왜곡된 의료 제도는 물론이고, 나빠진 의사들의 이미지 역시 환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첫 글의 서두에서 밝혔다시피 이번 원격 의료나 영리 자회사 등의 논란에서 충분한 논의가 부족했던 것도 이러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이 문제를 더 미루지 말고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다음 글에서부터, 필자의 본격적인 주장을 시작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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