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적응

박성우
발행날짜: 2016-12-31 05:00:57
  • 인턴의사의 좌충우돌 생존기…박성우의 '인턴노트'[63]

쾌락 적응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즐기고 있는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이지만 이제 갓 사회로 나와 일을 시작한 초년생들에게는 특히 중요한 질문이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일을 즐기고 있는가 라는 질문보다 이 직장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과 백수가 아니라는 안도감, 보수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할 것이다. 바쁜 1-2년 차가 지날 즈음 문득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일을 정말 즐기면서 하는 것일까.'

누구나 그렇듯 취직의 기쁨은 크다. 취직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어려울수록 더 그렇다. 사시나 행시에 합격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의사 역시 길고 힘들었던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 명의 어엿한 의사로 면허를 받았을 때의 기쁨과 성취감이 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동안 헤쳐나간 길보다 더 긴 길을 헤쳐나아가야 하는 사실을 체화하는 순간 성취감과 쾌락은 잠잠해진다.

목표 의식 없이 주어진 것에 매진하고 희생해서 얻어진 순간적인 쾌락도 잠시다. 쾌락에도 점차 적응되어 다시금 희생을 당위하는 상태로 회귀한다.

그렇기에 일상에서 끊임없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재량이 필요하다. 가진 것과 가지고 싶은 것을 교묘하게 저울질해서 스스로에게 쾌락 아닌 쾌락을 선사할 수 있어야 한다.

어차피 스스로 행복을 찾아야 한다면 일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좋다. 열정적이고 삶이 즐거워 보이는 이들에게서는 일의 행복이 느껴졌다. 세상을 위해 하는 일이 육체적으로 힘들고 남의 시선이 두렵더라도 자랑스러워하고 그 안에서도 작은 쾌락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의사는 혼자 일하지 않는다. 의사 면허를 받고 전공의 과정을 거쳐 종합병원에서 수련할 때는 다양한 이들과 어울려 일해야 한다. 인턴을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의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였다. 의사도 타고나야 한다는 말이다.

의대를 입학할 때는 '타고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했고 의사가 되고 나서도 정말 내가 의사로 타고난 것일까라는 의문을 수없이 해야 했다.

의사는 피와 설사 오물, 찢겨진 상처, 토사물, 사체, 아픈 신음 소리를 곁에 두고 살아야 한다.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의사 면허를 받으면서 느꼈던 쾌락의 유통기한은 끝나버린다.

의사의 행복은 환자들로부터 '선생님'이라 불리는 존경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기대감 혹은 금전적인 풍족함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향유하는 행복에 도움을 줄진 모르나 단순히 그것만을 바라보고 하기에는 의사로서 필요한 희생과 일상의 고통을 견디기 힘들다.

순간순간 판단이 어려울 때나 환자와 보호자에게서 느껴지는 불신의 눈길, 행여 내가 하는 처치가 환자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나를 찾아온 응급 환자를 살려내야 한다는 부담감은 의사로 커가는 과정에서 매일 부딪혀야 한다. 하지만 그런 압박감과 두려움 속에서도 즐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모든 것이 의사로서 나의 자질을 향상시켜줄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밤새 한 시간도 못 자서 얼굴이 누렇게 뜨고, 진땀 빼느라 가운 속 와이셔츠가 흠뻑 젖었음에도 샤워조차 하지 못하고 다시 환자를 보러 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고 밤 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구조를 시간이 지나면 편해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만으로 버텨야만 한다면 얼마나 슬플까. 그러한 현실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스스로 현실을 비참함으로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

스승님은 실패하는 것과 혼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실패는 마지막 순간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끊임없이 무대 위를 올라와서 우리를 괴롭힌다. 실패하는 인생을 살지 않을 것이라는 자존감은 무대 위에서 나를 무참히 끌어 내릴 뿐이다. 실패와 행복은 함께하는 동반자라는 것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주지시켜야 한다.

피난처를 방불케 하던 응급실이 잠잠해지면서 동료들과 함께 하는 냉커피의 시원함, 밤새 지키던 응급실을 나서며 마시는 새벽 공기의 상쾌함, 환자의 모호한 증상에 서로 머리 맞대며 배우고 깨닫는 과정, 이 모든 것이 행복이고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아닐까.

[64]편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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