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개 빠진 의사

박호진
발행날짜: 2007-07-05 06:00:22
  • 박호진 청주 박내과 원장

요즈음 12월 대선을 앞두고 정국이 혼미하다. 후보를 정하지 못한 범여권은 한 방의 치명타를 외치며 무언가를 장담한다. 야당은 권토중래의 각오를 다지면서 다투는 소리가 요란하다. 의료는 정치철학의 구현이라는 점에 비추어 선거철을 맞는 의료계도 조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의사집단은 대충 10년간 지속된 이른바 개혁에 지칠 대로 지쳤고, 이제는 자해(自害)를 마다하지 않는 패닉 상태에 빠진 것 같다. 또 이들이 지르는 비명은 남을 향해 울부짖는 반항인지, 아니면 축 늘어진 채 그저 끙끙대는 신음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일군의 인사들은 건강보험 30년의 역사를 자신들의 ‘성공한’ 개혁 탓으로 돌리는 데 여념이 없는 것 같다.

이런 극단적인 차이는 일부 의사들의 독선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지. 일례로, 양식이 있는 일부 의사들조차 ‘의학적 사고’로 모든 세상사를 재단하려고 한다. 어쩌면 의학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크게 보면 이것이 오늘날 의사들에게 불행을 가져온 주범일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독선이 있다. 그것은 ‘보건학’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일부 학자와 무슨 관리학을 운운하는 사람들에서 보이는 현상이다. 이들에게 건강권은 다른 모든 기본권에 우선하는 권리이다. 여기에 어긋나면 공공의 적이 되고 특히 의사는 사익으로 똘똘 뭉친 프티부르주아로 매도된다. 그런데 최근 “건강의 가치는 모든 이에게 평등하다.”고 표현을 바꾸었다. 심각한 문제는 특정 가치를 강요하는 게 ‘비-윤리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비-윤리적 사고 혹은 소아적 사고력은 어디서 길러졌을까? 필자는 유교 그 중에도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분들의 다수는 교직에 있다. 군사부일체의 전근대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의사라는 직업을 완벽주의로 해석하여 규범윤리 즉 이래야 한다거나 저래야 한다는 생활 규범만을 윤리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런 학자들이 내놓는 정책은 규제 일변도이거나, 명분에 맞으면 일방의 희생을 당연시하거나, 완벽을 요구하는 게 태반이다. 서로의 관계에서 권리와 의무가 엇갈리며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윤리인 것을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24시간 365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윤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 외에 성과불제는 절대 악이고 총액계약제는 선인가? 어떤 보건경제학자는 한국의 의료에서 진료비 지불방법을 빼고 모두 개혁이 되었다고 외국 저널에 발표했다. 반면 다수의 학자는 성과불제는 심사라는 강력한 장치가 있어 한국에서 의료비의 증가를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진술한다. 여기서 ‘강력한’이라는 게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으나, 필자의 생각으로 그것은 의사의 진료 행위에 대해 정부가 자의적으로 간섭할 수 있다는 점잖은 표현이다. OECD 국가 중 이런 나라가 있는지 묻고 싶다. 그럼에도 무슨 총액제에 그렇게 미련을 갖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외국 문헌에 나오는 신약 혹은 신기술을 써보고 싶어 하는 임상 의사처럼 아마도 새로운 제도를 한 번 적용해보고 싶다는 뜻일 게다. 아니면 관의 뚜껑에 마지막 못질을 하고야 말겠다는 증오에 찬 비명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주치의 등록제와 마찬가지로 총액제가 의료의 국가-서비스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국가-서비스에 대한 논쟁은 일단 접자. 그러나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어떤 성격의 국가가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과거에 어떠했는지 자신의 견해를 밝혀야 한다. 국가의 성격에 대한 논의를 생략하고 의료의 국가 서비스를 주장하는 것은 용서 받기 어려운 대단히 무책임한 짓이다. 비용-효과에 대한 의미도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효율적인지 아닌지 그 기준은 누가 결정하는가? 그 결정은 독단적이고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내포하며, 게다가 효율성에 대한 객관적이며 고정된 기준은 없다. 효율성이란 용어를 정의하는 기준은 인위적이고 학문의 외부에 존재하는 경제적 혹은 정치적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한국에서는 과잉진료에 대한 기준도 마찬가지이다. 진료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그리고 의사들이 사욕에 눈이 어두워, 혹은 환자이송체계나 게이트키퍼가 없어서 국민의료비가 치솟았는가? 지금도 의료비의 사용은 OECD 국가 중 최하위를 맴돌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나 진보를 자처하는 인사들은 환자가 직접 지불하는 비용에만 집착하여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적은 진료비에도 불구하고 영아사망률과 기대여명은 중간 정도의 순위이다. 이와 정반대로, 재원에 대한 긴축 정책과 의사에 대한 규제 정책은 OECD 국가 가운데 아마 최상위일 것이다. 따라서 일부 보건행정학자나 행정가들은 오로지 자신의 존재를 위해 일부 사실을 확대하거나 반대로 축소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반면 이를 지적하는 의사들의 목소리는 정권과 일부 인사의 안위를 위해 집단이기주의로 매도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의사들은 어쩌면 영원히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정부와 환자들은 아쉬울 때에만 선생님, 교수님, 박사님, 원장선생님으로 부르면서 면종복배해왔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즉 의사를 단순히 기능적 필요로만 대한 것이고, 존칭은 의사의 최선을 바라는 안타까운 심정의 표현일 것이다. 잘 나가는 어느 학자의 주장처럼, 보수정권이 들어선다 해도 의사들을 옥죄는 기존의 방책들은 환영을 받고 계속 유지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다! 왜냐하면 의사들의 운명은 깨달음 속에 스스로 개척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의사들에 대한 걱정만은 제발 접어주기 바란다. 아무리 못난 의료계라 하더라도 보건학자에게 삶을 또는 직업의 자유를 구걸할 만큼 쓸개 빠진 사람이 없을뿐더러 그들보다 결코 적은 지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건을 좋아하거나 사회주의를 강요하는 일부 인사들의 깊은 성찰을 기대한다. 앞으로도 의사들은 의사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 국가의 독선을 배제하고 스스로 선행을 판단하여 실천에 옮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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