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대 본과 4학년 이성우 씨
의사는 친절해야 한다. 의과대학 입학 이후로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수도 없이 들어온 말이다. 환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서 친절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친절한 의사가 되고 싶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답답한 마음이 든다.
서비스업에서 요구되는 친절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친절이라 생각되는 것 같다. 일부 환자들도 이것을 친절이라 생각하고 당연한 것이라 요구한다. 일부 환자에서, 의료는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요구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불친절하다고 한다. 그런데 환자의 요구가 항상 옳고, 치료에 도움이 된다면 의사라면 누구나 친절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환자들이 포털지식검색이나 TV프로그램에서 접한 지식이 대부분이고, 그 지식은 환자의 의학적 소견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진단과 치료 과정에서 환자의 기대를 무너트릴 수밖에 없게 된다. 소신없이 무조건 친절하게 환자가 원하는 것에 맞춰 치료 하는 것은 환자에 대한 위선과 기만이다.
물론 의료에서 환자 경험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환자 만족도가 상승하려면 평균적인 환자 기대치를 만족해야 한다. 하지만 일부 환자들 중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고 무한정 시간을 잡아먹는 환자들도 있다. 이런 자세가 전체적인 의료 서비스를 향상시킬까.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신분의 벽이 허물어지고 자본주의가 발달했지만, 인간성과 지성의 형성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건전한 합리성은 사라져간다. 끊임 없이 주변 사람 눈치를 봐야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손님'이 되었을 때 비로소 대접 받을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손님이 왕이다. 의료 영역 역시 마찬가지다. 천민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구전되는 이야기 중에 푸줏간 백정 이야기가 있다. 두 양반이 '박상길'이란 자가 운영하는 푸줏간에 고기를 사러 왔는데, 한 사람은 '얘 상길아, 고기 한근 썰어라', 다른 한 사람은 '박 서방, 고기 한 근 주시게'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고기덩어리는 눈으로 봐도 확 차이날 만큼 달랐다. 적게 받은 양반이 불만을 표시하자, 백정이 '그거야 양반님의 고기는 상길이 놈이 썬 것이고, 저 양반님의 고기는 박 서방이 썬 거라서 그렇습죠'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다.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쨌든 의사는 친절해야 한다. 그런데 환자에게 친절할 수 있으려면 의사에게도 친절하기 위한 여유가 있어야 한다. 환자 진료 외에도 보험 심사과, 민간 보험회사의 진단서 독촉에 쉴 새 없이 시달린다. 본업보다는 잡무에 시달린다. 환자와 교류 없이 지내던 환자의 보호자가 갑자기 나타나 환자 상태를 보고하라 추궁한다. 무조건 멱살부터 잡고 보는 보호자도 있다. 그게 보호자가 응당 취해야할 의무라고 생각한다. 환자 상태가 나쁠수록 의사는 죄인이 되어버린다.
이리저리 치이고 나면 신경이 곤두선다. 오히려 마음씨 넓은 대부분의 환자들은 이리저리 치인 의사들의 신경질을 받아준다. 그래서 무조건 의사의 친절함을 강요하는 누군가에게는 억울한 마음이 들고, 친절하지 못한 자신에게는 죄의식이 든다. 이 악순환의 고리는 어디서 시작되었나.
논의를 조금 확장해보면, 우리는 상식과 원칙이 실종된 사회를 살고 있다. 하나의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범이 필요하다. 도덕, 관습과 함께 강제성을 지닌 법의 존재가 공동체의 유지를 담보해 주기 때문이다. 자유란 우리 스스로 지키기로 동의한 법과 규범 안에서 유효한 것이다. 따라서 법치와 민주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는 법치에 대한 신뢰의 부재에서 온다. 떼법이니 국민정서법이니 하는 사이비가 득세한다. 우기면 그만이고 목소리가 크면 이긴다.
환자 의사 관계도 하나의 공동체로 본다면 비슷한 원리로 접근해갈 수 있을 것이다. 환자-의사 관계의 위기는 바로 환자와 의사 간 신뢰관계의 단절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환자들은 의사들의 불친절에 끊임없이 상처받고, 의사들은 친절하기 힘든 여건에 나름의 고충이 있다. 의료는 서비스업인가. 환자-의사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의료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다. 나도 친절한 의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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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업에서 요구되는 친절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친절이라 생각되는 것 같다. 일부 환자들도 이것을 친절이라 생각하고 당연한 것이라 요구한다. 일부 환자에서, 의료는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요구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불친절하다고 한다. 그런데 환자의 요구가 항상 옳고, 치료에 도움이 된다면 의사라면 누구나 친절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환자들이 포털지식검색이나 TV프로그램에서 접한 지식이 대부분이고, 그 지식은 환자의 의학적 소견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진단과 치료 과정에서 환자의 기대를 무너트릴 수밖에 없게 된다. 소신없이 무조건 친절하게 환자가 원하는 것에 맞춰 치료 하는 것은 환자에 대한 위선과 기만이다.
물론 의료에서 환자 경험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환자 만족도가 상승하려면 평균적인 환자 기대치를 만족해야 한다. 하지만 일부 환자들 중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고 무한정 시간을 잡아먹는 환자들도 있다. 이런 자세가 전체적인 의료 서비스를 향상시킬까.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신분의 벽이 허물어지고 자본주의가 발달했지만, 인간성과 지성의 형성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건전한 합리성은 사라져간다. 끊임 없이 주변 사람 눈치를 봐야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손님'이 되었을 때 비로소 대접 받을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손님이 왕이다. 의료 영역 역시 마찬가지다. 천민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구전되는 이야기 중에 푸줏간 백정 이야기가 있다. 두 양반이 '박상길'이란 자가 운영하는 푸줏간에 고기를 사러 왔는데, 한 사람은 '얘 상길아, 고기 한근 썰어라', 다른 한 사람은 '박 서방, 고기 한 근 주시게'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고기덩어리는 눈으로 봐도 확 차이날 만큼 달랐다. 적게 받은 양반이 불만을 표시하자, 백정이 '그거야 양반님의 고기는 상길이 놈이 썬 것이고, 저 양반님의 고기는 박 서방이 썬 거라서 그렇습죠'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다.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쨌든 의사는 친절해야 한다. 그런데 환자에게 친절할 수 있으려면 의사에게도 친절하기 위한 여유가 있어야 한다. 환자 진료 외에도 보험 심사과, 민간 보험회사의 진단서 독촉에 쉴 새 없이 시달린다. 본업보다는 잡무에 시달린다. 환자와 교류 없이 지내던 환자의 보호자가 갑자기 나타나 환자 상태를 보고하라 추궁한다. 무조건 멱살부터 잡고 보는 보호자도 있다. 그게 보호자가 응당 취해야할 의무라고 생각한다. 환자 상태가 나쁠수록 의사는 죄인이 되어버린다.
이리저리 치이고 나면 신경이 곤두선다. 오히려 마음씨 넓은 대부분의 환자들은 이리저리 치인 의사들의 신경질을 받아준다. 그래서 무조건 의사의 친절함을 강요하는 누군가에게는 억울한 마음이 들고, 친절하지 못한 자신에게는 죄의식이 든다. 이 악순환의 고리는 어디서 시작되었나.
논의를 조금 확장해보면, 우리는 상식과 원칙이 실종된 사회를 살고 있다. 하나의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범이 필요하다. 도덕, 관습과 함께 강제성을 지닌 법의 존재가 공동체의 유지를 담보해 주기 때문이다. 자유란 우리 스스로 지키기로 동의한 법과 규범 안에서 유효한 것이다. 따라서 법치와 민주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는 법치에 대한 신뢰의 부재에서 온다. 떼법이니 국민정서법이니 하는 사이비가 득세한다. 우기면 그만이고 목소리가 크면 이긴다.
환자 의사 관계도 하나의 공동체로 본다면 비슷한 원리로 접근해갈 수 있을 것이다. 환자-의사 관계의 위기는 바로 환자와 의사 간 신뢰관계의 단절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환자들은 의사들의 불친절에 끊임없이 상처받고, 의사들은 친절하기 힘든 여건에 나름의 고충이 있다. 의료는 서비스업인가. 환자-의사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의료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다. 나도 친절한 의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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