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환자와 만나야 합니다" 만든 정철 카피라이터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의 광고 카피 하나 쯤은 알고 있다. 카피라이터는 이름 대신 카피를 남기니까.
상업 광고계에서 정치 광고와 작가 등으로 '외도'를 한 정철 카피라이터가 다시 한번 한 눈을 팔았다. 이번엔 '의사는 환자를 만나야 한다'는 감성적인 문구를 들고 나왔다.
'말살', '강행', '죽이는 행위', '죽음' 등의 살벌한 문구가 난무하던 기존의 의료계 광고와 다른 접근법에 벌써부터 신선하다는 호평이 줄을 잇고 있다.
정부가 대면진료를 대체하는 수단으로 원격의료를 들고나온 마당에 의사는 과연 환자를 만날 수 있을까.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겠다는 정철 카피라이터를 만났다.
"꽃 한다발을 주면 꽃송이가 보이지 않는다."
의료계와의 조우는 조인성 의협 비상대책위원장과의 술 자리가 인연이 됐다. 조 위원장이 원격의료 추진을 막을 묘안을 주문했다. 순전히 술김이었다. "부족하지만 돕겠다"는 말이 고생의 문을 여는 열쇠였을 줄이야.
"카피라이터의 장점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돼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30년 경력 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났지만 사실 의료계와는 연이 없었습니다. 올해 여름 사석에서 조인성 위원장을 만나 원격의료 저지에 대해 의기투합을 했습니다. 국민을 위한 캠페인이라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었죠. 사실 술김에 무모하게 덤벼든 것 같아요.(웃음)"
의사들의 이야기를 그 때 처음 들었다. 의사들이 반대하는 원격의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고민에 사로잡혔다.
매번 열리는 비대위 회의를 두 달 넘게 쫓아다녔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원격의료, 대면진료, 안전성·유효성 등 아리송한 단어들이 그를 괴롭혔다.
공부하듯 메모장에 떠오르는 생각과 단어를 적으며 자신을 비워냈다. 본인 스스로 '의사'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할 무렵 단순하고도 당연한 명제가 떠올랐다. 의사는 환자를 만나야 한다는.
"요즘 광고는 100%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울림 있는 메세지 주려고 합니다. 마음을 움직이면 알아서 찾아보게 됩니다. 광고가 모든 걸 전달하려는 것은 욕심이자 가장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단순하면서 고정불변의 진리에 다가서려고 노력했습니다."
꽃다발을 주면 꽃송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그의 말처럼 여러 주장을 한꺼번에 말하면 결코 사람들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지 못하게 된다. 논리 싸움으로 가다가는 정부와의 밥그릇 싸움으로 비춰질 게 뻔할 터.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감성적 접근으로 마음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포스터는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는 사진 한 장에 '오진 가능성이 큰 원격의료 반대'라는 간결한 문구를 덧붙여 여러 주장들을 함축했다. 단순하게 가자는 설득에 비대위원들이 먼저 움직였다. "참신한데요?" 그렇게 문구가 결정됐다.
"인간의 구성 성분은 사랑·배려·감사·희망"
감성을 들고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음을 흔드는 카피의 뿌리에는 감성의 카피라이터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가 상업적 광고를 떠나온 것도 경쟁과 승리·패배와 같은 살벌한 삶이 싫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카피 철학이자 인생의 목적은 사람이라는 키워드입니다. 그 분이 광주 경선에서 기적같이 당선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면서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뭉클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광고주의 주구가 돼버린 채 상업 광고와 경쟁에 매몰된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노 전 대통령의 카피에 매료됐다.
정치 광고로 입문하며 쏟아낸 '보람이가 행복한 서울'이나 '사람특별시' '사람이 먼저다'와 같은 카피는 사실상 그의 반성문인 셈이다.
"사람 중심이라는 공통 분모가 없었다면 비대위의 카피 제작 요청을 수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만든 광고나 책을 본 후 가슴에 '사람'이라는 두 글자가 남았으면 합니다. 인간의 구성 성분은 물과 칼슘이 아니라 사랑과 희망, 배려, 감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