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기·손신실 부부, 상금 1억원 아산의료봉사상 수상
대장암과 심장판막증, 심근경색에 걸려 삶과 죽음을 오가면서도 30여년간 한센인 곁을 지켜온 김신기, 손신실 의사 부부가 아산의료봉사상을 수상했다.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이 몰려드는 '왕궁면 명의' 의사 부부. 그들이 걸어온 30여년의 삶에는 참된 의사의 향기가 묻어난다.
김신기, 손신실 부부는 지난 28년 동안 전북 익산시 왕궁면에 한센인을 위해 만들어진 삼산의원(구 한일기독의원)의 원장을 맡아 한센인을 치료해왔다.
한센인 마을에 있는 병원인데도 명의로 소문이 나면서 10여 년 전부터는 전국에서 일반 환자들도 많이 찾아온다.
"여기 익산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환자들이 와요. 전라도 여수, 광양, 장성, 충청도 제천, 청주, 강원도 원주는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온다니까. 이상해. 그 이유를 나도 모르겠어요"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고령에도 진료실을 지키는 김신기 원장의 말이다.
김 원장은 여든다섯 살, 고령인 탓에 체력이 부쳐 하루 50명만 예약을 받아 진료한다.
남편과 함께 한센인 환자를 돌봤던 손신실 원장은 관절염이 심해져 걷기가 불편해지면서 2011년부터 진료를 보지 않지만 김 원장의 든든한 조력자다.
1929년 6월 7일 전북 익산에서 4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신기 원장. 그의 부친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익산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독립유공자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익산에 삼산의원을 운영했다.
김 원장은 1952년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공군 군의관과 전주예수병원 일반외과 수련의를 거쳐 1961년 익산에 부친의 병원 이름을 딴 삼산의원을 열었다.
그의 베필인 손신실 원장은 1935년 5월 10일 전남 목포에서 3남 3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1958년 전남대 의대를 졸업한 뒤 1957년 의대 졸업반 여름방학 때 집안 소개로 김신기 원장을 만나 1958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함께 삼산의원을 운영하면서 부부는 경제적으로 부러울 것 없는 안정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채워질 수 없는 갈증은 그들을 봉사의 길로 이끌었다.
그 갈증이 극에 달할 무렵 부부는 필리핀에서 의료봉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당시 필리핀은 치안이 너무나 불안했던 상황. 결국 김 원장은 평소 봉사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익산시 왕궁면 한센인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했다.
김신기 원장은 "의사이자 독립유공자였던 아버지의 삶을 보면서 죽을 때까지 돈만 벌고 세상에 베풀지 않으면 그것이 곧 죄라고 생각했다"며 "환갑이 넘으면 봉사하며 살자고 아내와 약속했었다"고 회상했다.
1986년 부부가 한센인을 위해 진료를 시작한 곳은 한일기독의원(현 삼산의원)이었다. 1949년 조성된 한센인 정착 농원인 익산농원 산하기관으로 세운 의원이다.
병원에 가면 문전박대 당하는 한센인을 위해 1981년 문을 열었지만 열악한 환경 탓에 의사들이 오기를 꺼려했고 대부분은 오더라도 2년을 못 채우고 떠났다.
김신기 원장은 주로 한일기독의원에서 환자를 봤고 손신실 원장은 농장 안에 있는 양로원에서 환자를 보살피면서 하루 평균 60여명을 진료했다.
그들은 한센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까지 어루만지려고 애썼다.
의원을 운영하면서 생계가 어려운 마을 노인을 위해 양로원 운영에 보태줬고 명절이면 돼지고기 등을 준비해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또한 봉사단체에서 후원을 받아 한센인을 위해 태양열시스템을 갖춘 공동목욕탕도 만들었고 한국전력공사에서 받은 상금으로 마을회관에 심야전기보일러도 설치했다.
삼산의원 박흥규 사무장은 "우리 마을에서 김신기 원장님은 없어선 안 될 분"이라며 "모두가 기피하는 한센인의 건강을 돌봐준 것은 물론이고 손을 잡아주면서 따뜻한 말로 위로해줬다"고 말했다.
왕궁면 한센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김신기 원장에게도 한 차례 위기가 왔었다. 7년 전 대장암, 심장판막증, 심근경색증을 앓으며 삶과 죽음 사이에서 헤메인 것. 하지만 다행히 세 차례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해 2년 뒤 한센인 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부부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한센인 환자를 돌보려는 의사가 없어 이미 한일기독의원은 폐원한 상태였다.
그러자 김신기 원장은 한일기독의원 건물을 임대해 부친과 부부가 운영했던 삼산의원 간판을 다시 내걸고 진료를 시작했다.
익산시 왕궁면에는 김신기 원장이 운영하는 삼산의원이 유일하다.
고령인 탓에 김 원장의 뒤를 이어 한센인을 돌봐줄 의사가 필요하지만 한센인에 대한 편견은 20여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돈을 얹어줘도 오려고 하는 의사가 없는 건 마찬가지다.
익산농원 박정수 회장은 "김신기 원장님이 투병생활을 하느라 의원을 떠난 후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오려는 의사가 없었다"며 "생각지도 못했는데 우리에게 은인 같은 두 분이 다시 돌아와 주어서 감사할 따름"이라고 전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금 1억원에 달하는 아산사회봉사상을 받았지만 김 원장은 덤덤하기만 하다.
김 원장은 "남은 삶도 한센인을 위해 계속 진료하고 싶다"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남을 도왔고 그 일로 이러한 훌륭한 상도 받게 되니 스스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고 간략한 소감을 전했다.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이 몰려드는 '왕궁면 명의' 의사 부부. 그들이 걸어온 30여년의 삶에는 참된 의사의 향기가 묻어난다.
김신기, 손신실 부부는 지난 28년 동안 전북 익산시 왕궁면에 한센인을 위해 만들어진 삼산의원(구 한일기독의원)의 원장을 맡아 한센인을 치료해왔다.
한센인 마을에 있는 병원인데도 명의로 소문이 나면서 10여 년 전부터는 전국에서 일반 환자들도 많이 찾아온다.
"여기 익산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환자들이 와요. 전라도 여수, 광양, 장성, 충청도 제천, 청주, 강원도 원주는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온다니까. 이상해. 그 이유를 나도 모르겠어요"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고령에도 진료실을 지키는 김신기 원장의 말이다.
김 원장은 여든다섯 살, 고령인 탓에 체력이 부쳐 하루 50명만 예약을 받아 진료한다.
남편과 함께 한센인 환자를 돌봤던 손신실 원장은 관절염이 심해져 걷기가 불편해지면서 2011년부터 진료를 보지 않지만 김 원장의 든든한 조력자다.
1929년 6월 7일 전북 익산에서 4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신기 원장. 그의 부친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익산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독립유공자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익산에 삼산의원을 운영했다.
김 원장은 1952년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공군 군의관과 전주예수병원 일반외과 수련의를 거쳐 1961년 익산에 부친의 병원 이름을 딴 삼산의원을 열었다.
그의 베필인 손신실 원장은 1935년 5월 10일 전남 목포에서 3남 3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1958년 전남대 의대를 졸업한 뒤 1957년 의대 졸업반 여름방학 때 집안 소개로 김신기 원장을 만나 1958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함께 삼산의원을 운영하면서 부부는 경제적으로 부러울 것 없는 안정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채워질 수 없는 갈증은 그들을 봉사의 길로 이끌었다.
그 갈증이 극에 달할 무렵 부부는 필리핀에서 의료봉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당시 필리핀은 치안이 너무나 불안했던 상황. 결국 김 원장은 평소 봉사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익산시 왕궁면 한센인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했다.
김신기 원장은 "의사이자 독립유공자였던 아버지의 삶을 보면서 죽을 때까지 돈만 벌고 세상에 베풀지 않으면 그것이 곧 죄라고 생각했다"며 "환갑이 넘으면 봉사하며 살자고 아내와 약속했었다"고 회상했다.
1986년 부부가 한센인을 위해 진료를 시작한 곳은 한일기독의원(현 삼산의원)이었다. 1949년 조성된 한센인 정착 농원인 익산농원 산하기관으로 세운 의원이다.
병원에 가면 문전박대 당하는 한센인을 위해 1981년 문을 열었지만 열악한 환경 탓에 의사들이 오기를 꺼려했고 대부분은 오더라도 2년을 못 채우고 떠났다.
김신기 원장은 주로 한일기독의원에서 환자를 봤고 손신실 원장은 농장 안에 있는 양로원에서 환자를 보살피면서 하루 평균 60여명을 진료했다.
그들은 한센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까지 어루만지려고 애썼다.
의원을 운영하면서 생계가 어려운 마을 노인을 위해 양로원 운영에 보태줬고 명절이면 돼지고기 등을 준비해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또한 봉사단체에서 후원을 받아 한센인을 위해 태양열시스템을 갖춘 공동목욕탕도 만들었고 한국전력공사에서 받은 상금으로 마을회관에 심야전기보일러도 설치했다.
삼산의원 박흥규 사무장은 "우리 마을에서 김신기 원장님은 없어선 안 될 분"이라며 "모두가 기피하는 한센인의 건강을 돌봐준 것은 물론이고 손을 잡아주면서 따뜻한 말로 위로해줬다"고 말했다.
왕궁면 한센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김신기 원장에게도 한 차례 위기가 왔었다. 7년 전 대장암, 심장판막증, 심근경색증을 앓으며 삶과 죽음 사이에서 헤메인 것. 하지만 다행히 세 차례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해 2년 뒤 한센인 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부부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한센인 환자를 돌보려는 의사가 없어 이미 한일기독의원은 폐원한 상태였다.
그러자 김신기 원장은 한일기독의원 건물을 임대해 부친과 부부가 운영했던 삼산의원 간판을 다시 내걸고 진료를 시작했다.
익산시 왕궁면에는 김신기 원장이 운영하는 삼산의원이 유일하다.
고령인 탓에 김 원장의 뒤를 이어 한센인을 돌봐줄 의사가 필요하지만 한센인에 대한 편견은 20여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돈을 얹어줘도 오려고 하는 의사가 없는 건 마찬가지다.
익산농원 박정수 회장은 "김신기 원장님이 투병생활을 하느라 의원을 떠난 후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오려는 의사가 없었다"며 "생각지도 못했는데 우리에게 은인 같은 두 분이 다시 돌아와 주어서 감사할 따름"이라고 전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금 1억원에 달하는 아산사회봉사상을 받았지만 김 원장은 덤덤하기만 하다.
김 원장은 "남은 삶도 한센인을 위해 계속 진료하고 싶다"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남을 도왔고 그 일로 이러한 훌륭한 상도 받게 되니 스스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고 간략한 소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