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페인으로 간다
스페인 학문의 성지 - 살라망카(2)
마요르 광장에서 얻은 자유시간을 무료한 듯 벤치에 앉아 보냈다. 오가는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지켜보면서 마치 이곳에 오랫동안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느낌이 좋아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살라망카 성당으로 이동한다. 마요르광장에서 성당 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벽에 조가비가 붙어 있는 건물을 만나게 된다.
이 조가비를 두고 누군가는 사랑의 상징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그저 건물을 장식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가하면 어떤 이는 성 제임스의 명령을 상징하는 것으로 믿는다고 한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자를 보호하던 콤포스텔라 기사단의 숙소로 사용되던 건물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 싶다.
이 건물에는 조가비가 350개나 붙어있어 '조개의 집(The House of Shells)'이라고 부르는데, 15세기에 고딕양식, 무어양식 그리고 이탈리아양식이 섞인 것이라고 한다. 앞장 서 가는 가이드를 쫓아가기도 바빠서 안에는 들어가 보지는 못했는데, 스페인 건물의 특징대로 가운데에 중정(中庭)이 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살라망카의 공공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살라망카 성당은 고딕양식으로 지은 신성당과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은 구성당이 있어서 두 가지 건축양식을 서로 비교해보는 좋은 기회가 된다. 김재원 등은 [유럽 그리스도교 미술사]에서 두 건축양식의 차이를 잘 정리하고 있다.
로마네스크양식은 1818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샤를 드 제르빌이 창안한 개념으로 연대기적으로는 10세기에서 12세기에 이르는 수도원이 전성기를 이루던 시기에 많이 적용되었다. 과거 목조천장으로 덮던 성당을 석조궁륭으로 대치하였는데, 신을 모시는 공간으로서의 의미에 더하여 시각적 통일성과 음향효과를 높일 수도 있는 양수겹장의 효과가 있었다.
석주 궁륭(穹窿, 돌이나 벽돌 또는 콘크리트의 아치로 둥그스름하게 만든 천장)을 덮다보니 하중이 현저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치는 벽체가 두껍고 견고해야 했기 때문에 창을 넓게 개방할 수 없었다. 따라서 로마네스크건축 특유의 중후한 외관에 어두운 내부공간이 생겨났다.
반면에 12세기에 등장하여 15세기까지 전유럽을 풍미한 고딕예술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가 중세를 지배한 고트족의 미술과 문화를 비하하여 만든 용어이다. 바사리가 보기에 고트족은 옛 로마제국과 고대문화를 파괴한 이방의 오랑캐로 야만적이고, 무지하고, 고전적인 미감이 결여된 종족이었다. 하지만 고딕건축은 유럽에서는 처음 자생적으로 나타난 대규모 예술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한다.
고딕양식은 절제와 겸덕을 우선으로 하던 수도원의 미적 취향과는 달리 세속적인 성격이 강화된 시대적 변화가 반영된 것이었다. 로마네스크 건축이 벽을 이용한 축성이었다면, 고딕건축은 골조 구조로 형성된 경쾌함과 공간성이 특징으로 골조 구조 사이에 많은 공간을 창출해낼 수 있었고, 이 공간을 스테인드글라스나 석조장식 등으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고딕 성당의 내부는 마치 우산살을 연상하게 하는 지지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가늘고 높은 기둥과 벽은 천장에 이르러 우산살과 같이 퍼지면서 궁륭과 지붕을 받친다. 그래서 마치 천장이 중력과 무관하게 떠 있는 느낌을 준다.
이로써 더 많은 빛을 교회내부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는 외부의 빛을 끌어들이는 기능 이외에 유리의 색면이 교회 내부의 공간을 신비하고 황홀한 천국의 공간으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 그리스도교의 교회가 예수의 몸이며, 천국의 구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고딕시대의 교회야말로 천국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이 가장 잘 실현된 것이라고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외부에서 보아 건물을 높이 쌓기 위하여 창문이 아주 적고 벽이 두꺼운 것이 로마네스크양식의 특징이라면, 건축술의 발달로 벽이 얇아지고 창문이 많아지면서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장식이 들어가 있으면 고딕양식이라고 보면 된다. 살라망카의 구성당은 12세기에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었고, 신성당은 16세기에 짓기 시작해서 18세기에 완공한 고딕 양식의 건물이다.
살라망카의 구성당은 페리고드(Perigord)의 제롬(Jerome)주교가 주도하여 12세기에 짓기 시작하여 14세기에 완공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씨(See)의 성모께 봉헌되었다. 제단 뒤편의 반원형으로 된 애프스(apse)에는 모두 53개의 제단화가 걸려 있는데, 그 가운데 12개는 이탈리아의 미술가 델로 델리(Dello Delli)가 예수와 성모의 삶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살라망카의 신성당은 구성당의 옆에 있다. 카스티야의 페르디난드 5세의 명으로 1513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733년 완공되었다. 고딕양식으로 짓기 시작하였지만, 점차 신 르네상스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안톤 데 에가스(Anton de Egas)와 알론소 호드리게스(Alonso Rodriges)가 건축한 살라망카의 신성당은 세고비아의 성당과 함께 스페인에서 마지막으로 지어진 고딕 양식의 건물이라고 한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인한 균열과 부서진 창이 남아 있다. 내부에는 황금의 예배당, 면사포의 예배당 그리고 성 로크의 예배당이 있다. 주제단 뒤에는 레콩키스타의 승리자, 엘 시드(El Cid)의 상을 모셨다.
우리 일행들은 일반인들이 성당으로 들어가는 주 출입문 푸에르타 드 라모스(Puerta de Ramos) 앞에 모여서 처음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신성당을 배경으로 하는 사진 명당자리로 일행을 안내한 조형진 가이드가 독사진 혹은 커플사진을 멋있게 찍어주었다. 그리고는 토르메스 강가에 주차된 버스를 타기 위하여 골목길을 돌아 빠져나갔다.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다보니 홀연 작은 공터가 나온다. 공터를 내려다보는 2층에서 나이든 노인과 고양이 한 마리가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누군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급히 문을 닫는다. 물론 몰려든 관광객들이 지역사회의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하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다.
언젠가 북촌 한옥마을에 갔을 때, 집안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엿보기 위해서 담장너머로 시선을 옮기다 주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계면쩍다는 생각과 함께 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리고는 아내와 함께 골목을 걸어 내려오면서도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리게 되었다.
공터에서 만난 기념품가게에서는 개구리를 본뜬 기념품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살라망카에서 만나는 웅크린 개구리는 살라망카 대학생들의 상징이라고 한다. 꼬물거리면서 공부를 하고 이제는 웅지를 펴 뛰려고 하는 기상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참 소박하면서도 기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개구리가 어디로 뛸지 모른 것이 세상의 3대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라고 들었으니 말이다.
골목을 빠져 나가자 버스가 기다리기로 한 토르메스강가에 이른다. 토르메스강에 걸려 있는 다리가 바로 기원 89년에 건설되었다고 하는 로마교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 길이가 356m에 달한다는 로마교는 모두 15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는데, 교각 일부가 17세기에 홍수로 유실되면서 재건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년 가까이 건재해온 것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살라망카의 구시가지 쪽으로 수퇘지의 조각이 서 있다. 켈트의 영향을 받은 로마이전시기의 살만틴(Salmantine) 미술 양식으로 된 것이라고 한다. 로마교는 메리다(Merida)에서 아스토르가(Astorga)에 이르는 로마의 은통로(Silver route)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한다.
마요르 광장에서 얻은 자유시간을 무료한 듯 벤치에 앉아 보냈다. 오가는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지켜보면서 마치 이곳에 오랫동안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느낌이 좋아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살라망카 성당으로 이동한다. 마요르광장에서 성당 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벽에 조가비가 붙어 있는 건물을 만나게 된다.
이 조가비를 두고 누군가는 사랑의 상징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그저 건물을 장식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가하면 어떤 이는 성 제임스의 명령을 상징하는 것으로 믿는다고 한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자를 보호하던 콤포스텔라 기사단의 숙소로 사용되던 건물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 싶다.
이 건물에는 조가비가 350개나 붙어있어 '조개의 집(The House of Shells)'이라고 부르는데, 15세기에 고딕양식, 무어양식 그리고 이탈리아양식이 섞인 것이라고 한다. 앞장 서 가는 가이드를 쫓아가기도 바빠서 안에는 들어가 보지는 못했는데, 스페인 건물의 특징대로 가운데에 중정(中庭)이 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살라망카의 공공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살라망카 성당은 고딕양식으로 지은 신성당과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은 구성당이 있어서 두 가지 건축양식을 서로 비교해보는 좋은 기회가 된다. 김재원 등은 [유럽 그리스도교 미술사]에서 두 건축양식의 차이를 잘 정리하고 있다.
로마네스크양식은 1818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샤를 드 제르빌이 창안한 개념으로 연대기적으로는 10세기에서 12세기에 이르는 수도원이 전성기를 이루던 시기에 많이 적용되었다. 과거 목조천장으로 덮던 성당을 석조궁륭으로 대치하였는데, 신을 모시는 공간으로서의 의미에 더하여 시각적 통일성과 음향효과를 높일 수도 있는 양수겹장의 효과가 있었다.
석주 궁륭(穹窿, 돌이나 벽돌 또는 콘크리트의 아치로 둥그스름하게 만든 천장)을 덮다보니 하중이 현저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치는 벽체가 두껍고 견고해야 했기 때문에 창을 넓게 개방할 수 없었다. 따라서 로마네스크건축 특유의 중후한 외관에 어두운 내부공간이 생겨났다.
반면에 12세기에 등장하여 15세기까지 전유럽을 풍미한 고딕예술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가 중세를 지배한 고트족의 미술과 문화를 비하하여 만든 용어이다. 바사리가 보기에 고트족은 옛 로마제국과 고대문화를 파괴한 이방의 오랑캐로 야만적이고, 무지하고, 고전적인 미감이 결여된 종족이었다. 하지만 고딕건축은 유럽에서는 처음 자생적으로 나타난 대규모 예술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한다.
고딕양식은 절제와 겸덕을 우선으로 하던 수도원의 미적 취향과는 달리 세속적인 성격이 강화된 시대적 변화가 반영된 것이었다. 로마네스크 건축이 벽을 이용한 축성이었다면, 고딕건축은 골조 구조로 형성된 경쾌함과 공간성이 특징으로 골조 구조 사이에 많은 공간을 창출해낼 수 있었고, 이 공간을 스테인드글라스나 석조장식 등으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고딕 성당의 내부는 마치 우산살을 연상하게 하는 지지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가늘고 높은 기둥과 벽은 천장에 이르러 우산살과 같이 퍼지면서 궁륭과 지붕을 받친다. 그래서 마치 천장이 중력과 무관하게 떠 있는 느낌을 준다.
이로써 더 많은 빛을 교회내부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는 외부의 빛을 끌어들이는 기능 이외에 유리의 색면이 교회 내부의 공간을 신비하고 황홀한 천국의 공간으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 그리스도교의 교회가 예수의 몸이며, 천국의 구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고딕시대의 교회야말로 천국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이 가장 잘 실현된 것이라고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외부에서 보아 건물을 높이 쌓기 위하여 창문이 아주 적고 벽이 두꺼운 것이 로마네스크양식의 특징이라면, 건축술의 발달로 벽이 얇아지고 창문이 많아지면서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장식이 들어가 있으면 고딕양식이라고 보면 된다. 살라망카의 구성당은 12세기에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었고, 신성당은 16세기에 짓기 시작해서 18세기에 완공한 고딕 양식의 건물이다.
살라망카의 구성당은 페리고드(Perigord)의 제롬(Jerome)주교가 주도하여 12세기에 짓기 시작하여 14세기에 완공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씨(See)의 성모께 봉헌되었다. 제단 뒤편의 반원형으로 된 애프스(apse)에는 모두 53개의 제단화가 걸려 있는데, 그 가운데 12개는 이탈리아의 미술가 델로 델리(Dello Delli)가 예수와 성모의 삶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살라망카의 신성당은 구성당의 옆에 있다. 카스티야의 페르디난드 5세의 명으로 1513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733년 완공되었다. 고딕양식으로 짓기 시작하였지만, 점차 신 르네상스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안톤 데 에가스(Anton de Egas)와 알론소 호드리게스(Alonso Rodriges)가 건축한 살라망카의 신성당은 세고비아의 성당과 함께 스페인에서 마지막으로 지어진 고딕 양식의 건물이라고 한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인한 균열과 부서진 창이 남아 있다. 내부에는 황금의 예배당, 면사포의 예배당 그리고 성 로크의 예배당이 있다. 주제단 뒤에는 레콩키스타의 승리자, 엘 시드(El Cid)의 상을 모셨다.
우리 일행들은 일반인들이 성당으로 들어가는 주 출입문 푸에르타 드 라모스(Puerta de Ramos) 앞에 모여서 처음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신성당을 배경으로 하는 사진 명당자리로 일행을 안내한 조형진 가이드가 독사진 혹은 커플사진을 멋있게 찍어주었다. 그리고는 토르메스 강가에 주차된 버스를 타기 위하여 골목길을 돌아 빠져나갔다.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다보니 홀연 작은 공터가 나온다. 공터를 내려다보는 2층에서 나이든 노인과 고양이 한 마리가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누군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급히 문을 닫는다. 물론 몰려든 관광객들이 지역사회의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하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다.
언젠가 북촌 한옥마을에 갔을 때, 집안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엿보기 위해서 담장너머로 시선을 옮기다 주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계면쩍다는 생각과 함께 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리고는 아내와 함께 골목을 걸어 내려오면서도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리게 되었다.
공터에서 만난 기념품가게에서는 개구리를 본뜬 기념품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살라망카에서 만나는 웅크린 개구리는 살라망카 대학생들의 상징이라고 한다. 꼬물거리면서 공부를 하고 이제는 웅지를 펴 뛰려고 하는 기상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참 소박하면서도 기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개구리가 어디로 뛸지 모른 것이 세상의 3대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라고 들었으니 말이다.
골목을 빠져 나가자 버스가 기다리기로 한 토르메스강가에 이른다. 토르메스강에 걸려 있는 다리가 바로 기원 89년에 건설되었다고 하는 로마교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 길이가 356m에 달한다는 로마교는 모두 15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는데, 교각 일부가 17세기에 홍수로 유실되면서 재건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년 가까이 건재해온 것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살라망카의 구시가지 쪽으로 수퇘지의 조각이 서 있다. 켈트의 영향을 받은 로마이전시기의 살만틴(Salmantine) 미술 양식으로 된 것이라고 한다. 로마교는 메리다(Merida)에서 아스토르가(Astorga)에 이르는 로마의 은통로(Silver route)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