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페인으로 간다
천년의 고도 톨레도(3)
타호강가에서 톨레도 구시가를 바라보면서 엘 그레코의 '톨레도 풍경'을 이야기한 것처럼 톨레도하면 엘 그레코가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기 마련이다. 엘 그레코(El Greco,1541년 - 1614년)는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인데, 스페인으로 올 때 '그리스 사람'이란 뜻의 스페인어 그레코(greco)로 개명한 것이다.
그리스에서 비잔틴 회화를 배웠고, 1567년 베네치아로 건너가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을 사사하면서 풍부한 색채사용을 배웠으며, 코레조의 깊이 있는 명암의 영향을 받아 중심이 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흐릿하게 표현하는 독특한 화풍을 완성하였다. 1577년에 스페인으로 건너왔지만 펠리페2세의 주목을 받지 못하자 후원자를 찾아 톨레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엘 그레코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18세기 들어와서야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고,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유대인 거주지역에 엘 그레코의 집이 마련되었다. 엘 그레코의 작품들은 산토 도밍고 수도원에 대부분 소장되어 있지만, 산타크루소 박물관과 톨레도 대성당의 성구보관실에서도 만날 수 있다.
톨레도 대성당을 나와 엘 그레코의 걸작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산토 토메교회로 간다. 회색벽돌담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니 조그만 공터가 나오고 사람들이 흩어져 서성이는 모습이 보인다. 사진촬영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반복해 들으면서 입장을 해보니 좁은 공간에 이내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다. 사람들 뒤편에 서서 조형진 가이드의 그림 설명을 먼저 듣고는 사람들이 빠져나간 다음에 그림 앞으로 다가서 꼼꼼히 살펴본다. 그림은 오르가스 백작의 관 위쪽 벽에 걸려 있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 <출처:위키피디아>(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은 산토 토메교회의 사제 안드레스 누네즈(Andres Nunez)의 요청을 받은 엘 그레코가 1586년부터 1588년까지 오르가스 백작의 전설을 바탕으로 그린 작품이다. 오르가스백작 곤잘로 루이스(Don Gonzalo Ruiz)는 생전에 자선을 많이 하였으며, 신앙심도 두터워 산토 토메교회를 위한 기금을 남기고 1312년 죽었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날 스테판 성인과 오거스틴 성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직접 오르가스백작을 묻었으며, 백작의 무덤에서 '하느님과 두 성인을 잘 모신 보상이니라'하는 천사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엘 그레코는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에 지상에서의 삶과 하늘에서의 영광을 담기 위하여 그림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소용돌이치는 구름으로 구분된 윗부분의 천국은 반추상적으로 구성되어 성자들이 크고 환상적으로 그려진 반면, 아랫부분에 담은 사람들은 형태적 비례가 정상으로 그려졌다. 천상에는 성모와 세례 요한을 좌우로 한 정점에 그리스도가 위치하고, 구름이 갈라진 틈으로 영광을 입은 남자를 천국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늘의 영광을 사도와 순교자 그리고 성서의 여러 왕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엘 그레코는 당시에 살아있던 스페인왕 필리페2세도 이 가운데 들어있다고 한다. 어쩌면 자신을 왕실화가로 불러주기를 바랐던 마음을 담았던 것은 아닐까하는 대목이다. 장례절차를 지켜보는 사람들 가운데 엘 그레코 자신도 그려져 있다. 왼쪽 편에 서 있는 소년은 엘 그레코의 아들 호르헤 마누엘(Jorge Manuel)이며, 그의 주머니에 꽂은 손수건에는 화가의 사인과 소년의 생일을 적었다고 한다.
▲산토 토메 교회 <출처:Spain is culture 사이트>(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12세기 무렵에 이슬람 사원의 폐허에 세워진 산토 토메교회는 오르가스백작의 후원으로 14세기 초에 재건축되었다. 종탑은 톨레도의 특징적인 무데하르양식의 대표작이다. 벽돌로 쌓은 탑에는 말굽모양의 창문을 내고 있는데 조가비 모양의 장식이 특징적이다.
오르가스백작이 교회를 위하여 남긴 기금을 후손이 제때 제공하지 않아 교회와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엘 그레코의 손끝으로 다시 태어난 오르가스 백작이 교회를 돌보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사나이의 약속은 소중한 것 같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을 구경하기 위하여 내는 2.3유로의 입장료가 교회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촐한 규모의 교회이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람브라키 플라카의 말대로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이 엘 그레코의 대표작으로 꼽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산토 토메 교회를 찾은 어떤 사람은 ‘작은 교회, 큰 그림(little chapel, big painting)’이라고 느낌을 적기도 했나보다.
산토 토메교회에서 나와 유대인거리로 들어가기 전에 조형진 가이드는 구경하다가 일행을 놓쳤을 때의 행동요령을 다시 일깨운다. 상점으로 들어가거나 일행을 찾는다고 우왕좌왕하지 말고 일행을 놓친 곳에서 기다리다보면 현지사정을 잘 아는 가이드가 가던 길을 되짚어 와서 찾아내게 된다는 것이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다. 나는 길을 묻지 않고 헤매는 편을 좋아했다. 멋을 아는 사람들은, 6시간 동안 헤매는 것이 자존심 상해가며 길을 묻는 것 보다낫다는 것을 안것다. 진짜 멋쟁이는 평생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다." 폴 퀸네트는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된다고 했지만, 분을 쪼개서 움직이는 단체여행에서 일행을 놓치면 길을 잃은 사람에게도 위험이 될 수 있지만, 일행에게도 피해를 주는 일이라서 조심해야 한다.
유대인거리를 걸어 도자기를 파는 상점 야드로와 금실을 상감하는 상품을 파는 상점 마조리까에 들르다. 작품제작에 빠져 있는 장인의 모습을 보면서 움직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진다. 놀라운 솜씨에 가격 역시 만만치 않아 결국 눈이 호사한 것으로 만족한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을 새긴 작품을 카메라에 담았다.
상점을 나와 골목에 숨어 있는 식당으로 간다. 이날 점심메뉴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처음으로 와인이 곁들여졌다. 참좋은 여행사에서 고단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잘 따라온 일행들을 위로하는 뜻으로 낸다고 했다. 점심메뉴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와인을 기억하는 것은 일행 가운데 한 분이 카드까지 들어 있는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대형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와인이 화를 불렀을까?
점심을 마치고 골목길을 따라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일행들이 떠드는 소리가 조금 컸나보다. 노상카페에 앉아있던 외국인 여성이 귀를 막고 얼굴을 찡그리며 옆에 앉은 일행에게 뭐라 한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톨레도를 구경하는 어떤 팀도 우리처럼 길거리에서 소란스럽게 떠드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면구스러워 빨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리를 건너서 버스에 승차한다. 그런데 일행들이 대부분 버스를 탔는데도 가이드가 오지 않는다. 알아보니 일행 한 분이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찾으러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그 분과 같은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었던 것 같다. 낮술이 취하면 부모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각별히 조심해야한다고 하는데 이 분은 점심 때 맛이 좋다면서 와인을 3잔이나 드셨다는 것이다.
정작 우리가 민망해진 것은 결국 휴대폰을 찾지 못하고 돌아온 그 분이 얼굴을 찌푸린 채 아무 말 없이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아버렸기 때문이다. 사고를 당하고 정신이 황망한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 사고 때문에 출발이 늦어졌을 뿐 아니라, 일행들 역시 그 사고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사과의 한 마디라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걱정을 해준 것이 억울하다는 못된 생각이 슬며시 든다.
점심 때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던 한 분은 술을 권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에 공감이 저절로 갔다. 조금은 찜찜한 가운데 우리는 마드리드를 통째로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라는 톨레도를 떠났다.
타호강가에서 톨레도 구시가를 바라보면서 엘 그레코의 '톨레도 풍경'을 이야기한 것처럼 톨레도하면 엘 그레코가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기 마련이다. 엘 그레코(El Greco,1541년 - 1614년)는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인데, 스페인으로 올 때 '그리스 사람'이란 뜻의 스페인어 그레코(greco)로 개명한 것이다.
그리스에서 비잔틴 회화를 배웠고, 1567년 베네치아로 건너가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을 사사하면서 풍부한 색채사용을 배웠으며, 코레조의 깊이 있는 명암의 영향을 받아 중심이 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흐릿하게 표현하는 독특한 화풍을 완성하였다. 1577년에 스페인으로 건너왔지만 펠리페2세의 주목을 받지 못하자 후원자를 찾아 톨레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엘 그레코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18세기 들어와서야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고,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유대인 거주지역에 엘 그레코의 집이 마련되었다. 엘 그레코의 작품들은 산토 도밍고 수도원에 대부분 소장되어 있지만, 산타크루소 박물관과 톨레도 대성당의 성구보관실에서도 만날 수 있다.
톨레도 대성당을 나와 엘 그레코의 걸작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산토 토메교회로 간다. 회색벽돌담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니 조그만 공터가 나오고 사람들이 흩어져 서성이는 모습이 보인다. 사진촬영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반복해 들으면서 입장을 해보니 좁은 공간에 이내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다. 사람들 뒤편에 서서 조형진 가이드의 그림 설명을 먼저 듣고는 사람들이 빠져나간 다음에 그림 앞으로 다가서 꼼꼼히 살펴본다. 그림은 오르가스 백작의 관 위쪽 벽에 걸려 있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 <출처:위키피디아>(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은 산토 토메교회의 사제 안드레스 누네즈(Andres Nunez)의 요청을 받은 엘 그레코가 1586년부터 1588년까지 오르가스 백작의 전설을 바탕으로 그린 작품이다. 오르가스백작 곤잘로 루이스(Don Gonzalo Ruiz)는 생전에 자선을 많이 하였으며, 신앙심도 두터워 산토 토메교회를 위한 기금을 남기고 1312년 죽었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날 스테판 성인과 오거스틴 성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직접 오르가스백작을 묻었으며, 백작의 무덤에서 '하느님과 두 성인을 잘 모신 보상이니라'하는 천사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엘 그레코는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에 지상에서의 삶과 하늘에서의 영광을 담기 위하여 그림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소용돌이치는 구름으로 구분된 윗부분의 천국은 반추상적으로 구성되어 성자들이 크고 환상적으로 그려진 반면, 아랫부분에 담은 사람들은 형태적 비례가 정상으로 그려졌다. 천상에는 성모와 세례 요한을 좌우로 한 정점에 그리스도가 위치하고, 구름이 갈라진 틈으로 영광을 입은 남자를 천국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늘의 영광을 사도와 순교자 그리고 성서의 여러 왕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엘 그레코는 당시에 살아있던 스페인왕 필리페2세도 이 가운데 들어있다고 한다. 어쩌면 자신을 왕실화가로 불러주기를 바랐던 마음을 담았던 것은 아닐까하는 대목이다. 장례절차를 지켜보는 사람들 가운데 엘 그레코 자신도 그려져 있다. 왼쪽 편에 서 있는 소년은 엘 그레코의 아들 호르헤 마누엘(Jorge Manuel)이며, 그의 주머니에 꽂은 손수건에는 화가의 사인과 소년의 생일을 적었다고 한다.
▲산토 토메 교회 <출처:Spain is culture 사이트>(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12세기 무렵에 이슬람 사원의 폐허에 세워진 산토 토메교회는 오르가스백작의 후원으로 14세기 초에 재건축되었다. 종탑은 톨레도의 특징적인 무데하르양식의 대표작이다. 벽돌로 쌓은 탑에는 말굽모양의 창문을 내고 있는데 조가비 모양의 장식이 특징적이다.
오르가스백작이 교회를 위하여 남긴 기금을 후손이 제때 제공하지 않아 교회와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엘 그레코의 손끝으로 다시 태어난 오르가스 백작이 교회를 돌보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사나이의 약속은 소중한 것 같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을 구경하기 위하여 내는 2.3유로의 입장료가 교회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촐한 규모의 교회이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람브라키 플라카의 말대로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이 엘 그레코의 대표작으로 꼽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산토 토메 교회를 찾은 어떤 사람은 ‘작은 교회, 큰 그림(little chapel, big painting)’이라고 느낌을 적기도 했나보다.
산토 토메교회에서 나와 유대인거리로 들어가기 전에 조형진 가이드는 구경하다가 일행을 놓쳤을 때의 행동요령을 다시 일깨운다. 상점으로 들어가거나 일행을 찾는다고 우왕좌왕하지 말고 일행을 놓친 곳에서 기다리다보면 현지사정을 잘 아는 가이드가 가던 길을 되짚어 와서 찾아내게 된다는 것이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다. 나는 길을 묻지 않고 헤매는 편을 좋아했다. 멋을 아는 사람들은, 6시간 동안 헤매는 것이 자존심 상해가며 길을 묻는 것 보다낫다는 것을 안것다. 진짜 멋쟁이는 평생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다." 폴 퀸네트는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된다고 했지만, 분을 쪼개서 움직이는 단체여행에서 일행을 놓치면 길을 잃은 사람에게도 위험이 될 수 있지만, 일행에게도 피해를 주는 일이라서 조심해야 한다.
유대인거리를 걸어 도자기를 파는 상점 야드로와 금실을 상감하는 상품을 파는 상점 마조리까에 들르다. 작품제작에 빠져 있는 장인의 모습을 보면서 움직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진다. 놀라운 솜씨에 가격 역시 만만치 않아 결국 눈이 호사한 것으로 만족한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을 새긴 작품을 카메라에 담았다.
상점을 나와 골목에 숨어 있는 식당으로 간다. 이날 점심메뉴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처음으로 와인이 곁들여졌다. 참좋은 여행사에서 고단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잘 따라온 일행들을 위로하는 뜻으로 낸다고 했다. 점심메뉴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와인을 기억하는 것은 일행 가운데 한 분이 카드까지 들어 있는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대형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와인이 화를 불렀을까?
점심을 마치고 골목길을 따라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일행들이 떠드는 소리가 조금 컸나보다. 노상카페에 앉아있던 외국인 여성이 귀를 막고 얼굴을 찡그리며 옆에 앉은 일행에게 뭐라 한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톨레도를 구경하는 어떤 팀도 우리처럼 길거리에서 소란스럽게 떠드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면구스러워 빨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리를 건너서 버스에 승차한다. 그런데 일행들이 대부분 버스를 탔는데도 가이드가 오지 않는다. 알아보니 일행 한 분이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찾으러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그 분과 같은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었던 것 같다. 낮술이 취하면 부모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각별히 조심해야한다고 하는데 이 분은 점심 때 맛이 좋다면서 와인을 3잔이나 드셨다는 것이다.
정작 우리가 민망해진 것은 결국 휴대폰을 찾지 못하고 돌아온 그 분이 얼굴을 찌푸린 채 아무 말 없이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아버렸기 때문이다. 사고를 당하고 정신이 황망한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 사고 때문에 출발이 늦어졌을 뿐 아니라, 일행들 역시 그 사고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사과의 한 마디라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걱정을 해준 것이 억울하다는 못된 생각이 슬며시 든다.
점심 때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던 한 분은 술을 권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에 공감이 저절로 갔다. 조금은 찜찜한 가운데 우리는 마드리드를 통째로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라는 톨레도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