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해진 스승의 날의 풍경…"우리 때와 같을 수 있겠나"
# A의과대학 김모 교수(약리학과)는 여자 의대생이 연구실을 찾아오면 자연스레 방문을 열어둔다. 한때 언론을 뜨겁게 달궜던 잇따른 대학교수의 제자 성추행 사건 이후 생긴 습관이다. 혹시라도 오해를 받는 게 싫어서다.
특히 아청법(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이후로는 두렵기까지하다. 전에는 제자들과 술 한잔 기울이며 농담도 주고받았지만 말도 조심스럽다.
2차로 노래방에 가서 함께 여흥을 즐기는 것은 옛날 얘기가 된 지 오래다. 간혹 학생들이 함께 하자며 권해도 이젠 김 교수 스스로 자리를 피한다.
스승을 날을 맞이한 오늘, 그 또한 지금의 현실이 씁쓸하지만 당분간은 바뀌기는 힘들 것이라고 본다. 과거 의과대학의 낭만이 그리울 뿐이다.
# B의과대학 이모 교수(예방의학과)는 얼마 전 의과대 학생들과의 면담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면담 도중 한 학생은 앞에 앉은 교수들을 향해 현재 의과대학 교육과정에 불만을 조목조목 제기하며 개선사항을 요구했다. 비싼 의대 등록금을 내고 수업을 듣는데 고작 이 정도밖에 배울 수 없느냐는 식이었다.
이 교수는 '우리 때와는 정말 다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과거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어려웠던 의과대학 시절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5월 15일. 스승의 날을 맞이하는 의과대학 교수들의 심정은 보람과 뿌듯함 보다는 달라진 세태에 대한 씁쓸함이 앞서는 듯 하다.
의국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 교수들은 전공의들과 어울려 맥주 한잔하고 노래방에서 흥겹게 놀며 피로를 풀었지만 최근에는 찾아보기 힘든 자리가 됐다.
가볍게 저녁식사하는 것으로 갈음하거나 아예 점심시간을 활용해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전공의들이 교수를 찾아와 선물과 함께 꽃바구니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때만 되면 으레 의국에서 돈을 모아 준비하는 형식적인 선물에 오히려 부담스럽다는 게 교수들의 전언이다.
또한 의과대학 수가 적고 배출되는 의사 수 또한 적었던 과거와 비교하며 달라질 수 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봤다.
C대학병원 내과 교수는 "과거 교수라고 하면 나를 끌어주고 보호해주는 은사로 모셨지만 요즘엔 다르다. 당장 의대 졸업 후 전공의 마치고 나오면 당장 환자를 뺏고 뺏기는 관계가 되기 십상인 치열한 의료환경에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사라질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교수의 말인 즉, 법으로 통했던 과거의 분위기가 정답이라고 할 순 없다"며 "시대가 변한만큼 사제지간도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의과대학 교수(인문사회의학과)는 "최근의 의과대학에서 나타나는 스승과 제자간의 관계 변화는 단지 의료계 뿐이 아니다. 이는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가 의료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게 맞다"고 봤다.
그는 이어 "지금의 의대교수들은 과거 자신이 의대시절을 기준으로 학생을 바라보는데 학생들은 과거의 그들이 아니기 때문에 문화적 갈등이 나타나는 것"이라며 "의대교수들도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고, 또 상당수 이미 적응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