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다른 곳, 베네치아(3)
양기화의 '이야기가 있는 세계여행'
세상의 다른 곳, 베네치아(3)
자유시간 다음에는 선택관광상품으로 곤돌라를 타기로 했다. 베네치아에서 곤돌라를 타보지 못하면 베네치아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를 제대로 보려면 걸어서 다리를 건너다니면서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는 방법과, 곤돌라를 타고 좁은 수로를 따라 가면서 역시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는 방법이 있다.
비발디광장에 이르는 골목길을 조금 걸은 것으로 퉁치고, 이번에는 수로를 따라 가보기로 했다. 우리는 산 마르코 광장 입구에 있는 성 마가의 사자가 앉아 있는 원주 가까이 있는 선착장에서 곤돌라를 탔다. 일행들 가운데 두 팀만이 곤돌라타기를 신청했다. 나머지 일행들은 그만큼 자유시간을 더 즐길 수 있는 셈이다.
곤돌라를 모는 뱃사공을 곤돌리에라고 하는데, 베네치아의 좁은 수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멋들어진 목소리로 노래 한 자락을 뽑는 상상을 해보지만, 흔들리는 곤돌라에 주눅이 들었던 탓인지 곤돌리에하고는 한 마디를 섞어보지도 못했다.
쫘악 빠진 몸매로 날아갈 듯한 자세로 중심을 잡으면서 곤돌라를 모는 환상적인 모습의 곤돌리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뚱뚱한 몸매에 배가 가라앉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는 곤돌리에도 있다. 총독궁 앞을 떠난 곤돌라는 탄식의 다리가 걸려있는 수로를 따라 들어갔다.
다리가 높지 않은 탓에 머리를 잔뜩 숙여야 했다. 그리고 보니 왼쪽은 총독궁이고 오른쪽은 감옥이다. 곤돌리에는 우리를 생각해서인지 총독궁 가까이 길을 잡는다.
곤돌라를 타고 베네치아의 좁은 수로를 따라가는 느낌을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렇게 적었다.
"나의 곤돌라는 소운하를 가고 있었다. 저 동방도시의 미로를 안내하는 마신의 손처럼, 내가 나아감에 따라서, 멋대로 그은 가느다란 항적으로, 무어풍의 작은 창문이 난, 줄지은 높다란 집들을 양쪽으로 밀어붙이면서, 그 구역 한가운데에 길을 트고 나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 간혹 더 훌륭한 건물이 비밀 상자를 열 듯이 뱃길에 나타나기도 한다. 코린트식 기둥들이나 정면에 우의적인 조각상이 있는 상아로 만든 조그만 신전 같은 건물은, 주위의 평범한 사물들 사이에 끼여서 약간 메떨어지고 쓸쓸해 보였으며, 운하와 잇닿은 그 앞마당은 야채 짐을 부리는 선창 같았다.(1)"
베네치아의 속살이라고 할 수 있는 수로를 따라 곤돌라가 나아가면서 프루스트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곤돌라 두 대가 비껴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좁은 수로를 돌아나가면 번듯한 호텔이 등장하는가 하면, 건물 안에서 내다보는 사람과 눈길이 마주치기도 하고, 공간이 없을 것 같은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에서 관광객이 '깍꿍'하고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다리 위를 지나던 관광객들이 우리에게 손짓을 하기도 한다. 가끔은 너무 낡아서 사람이 살지 않은 듯한 집도 있는데, 그런 집들은 수로의 물길이 출입문을 위협하는 듯 보였다. 골목길 수로에는 모터를 단 배가 다니면 안된다고 들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40여분을 이리저리 흔들리다보니 곤돌라는 벌써 선착장에 들어서고 가이드를 비롯한 우리 일행들이 반긴다. 다음 일정이 빠듯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음 일정은 전세낸 모터보트를 타고 그랑 카날(Canal Grand)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랑 카날의 초입 왼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la Salute)은 '건강의 성모성당'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 성당는 1630년 베네치아를 강습했던 흑사병과 연관이 있다.
1630년 여름에 시작한 흑사병은 1931년까지 기승을 부려 베네치아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 도시에서만 46,000명 석호 전체로 따지만 9만 4,000명이 죽었다. 1930년 10월 베네치아 의회는 16세기 흑사병이 유행할 때처럼 교회를 세울 것을 결정하였는데, 도시의 수호성인 성 마르코가 아니라 성모에게 헌정하기로 한 것을 두고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찌되었던 성당은 1631년 착공하여 1687년 완공을 보았다. 발데사레 롱게나(Baldassare Longhena)가 설계한 비잔틴양식의 8각형 건물에는 두 개의 돔을 올렸고, 뒤쪽으로는 그림 같은 두 개의 종탑을 세웠다. 교회에는 티치아노의 '성령 강림', '아브라함의 희생', '산 마르코와 성자들'과 틴토레토의 '가나의 혼인잔치' 등이 소장되어 있다.(2)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을 지나 본격적으로 그랑 카날을 탐험(?)한다.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 건너편에는 헤밍웨이가 머물면서 '노인과 바다'를 집필했다는 그리티 팰리스 호텔(Hotel Gritti Palace)이 있다.
가이드가 설명한 '노인과 바다'는 쿠바의 아바나 교외에 있는 핀카 비히아라는 집에서 집필을 했고, 베네치아에서는 '강건너 숲속으로'를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랑 카날을 지나면서 처음 만나는 다리는 나무로 만든 산 마르코 구역과 아카데미 미술관을 연결하는 아카데미아 다리이다. 베네치아 예술대학이 있는 곳이다.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는 그랑 카날에 걸려 있는 4개의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1181년 니콜로 바라티에리가 부교형태로 만들었고, 동쪽 입구에 주조소가 있었기 때문에 모네타 다리라고 불렀다.
동쪽 둑에 있던 리알토시장이 점점 번성하면서 교통량이 늘게 되어 1255년에 나무다리로 교체되었다. 개폐교로 된 다리는 큰배가 지나가면 중앙부분이 풀려서 들리게 되어 있었다.
1310년 바자몬테 티에폴로(Bajamonte Tiepolo)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일부가 불타기도 했고, 1444년에는 선박축제에 참가한 배의 행렬을 보기 위하여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붕괴되었으며, 1524년에도 붕괴사고가 있었다.
1503년 석조다리를 건설하자는 제안이 나와 오랜 공모 끝에 베네치아 건축가 안토니오 다 폰데(Antonio da Ponte)의 설계로 1591년 완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개의 경사로가 중앙 주랑(central portico)으로 들어올려진 모습으로 경사로에는 2열로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3)
영국의 문필가 토머스 코리에이트에 따르면 리알토다리를 건설하는데 8만크로네(영국돈으로 환산하여 2만2천 파운드)가 들었다고 했다. 코리에이트는 리알토다리의 난간에 있는 기둥이 모두 252개였다고 기록할 정도로 꼼꼼했다.(4)
아카데미아다리에서 조금 더 가면 시각예술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그라씨 궁전(Palazzo Grassi)이 나오고, 이어서 피사니 모레타 궁전(Palazzo Pisani Moretta)을 볼 수 있다. 피사니 모레타 궁전은 러시아 황제 파벨 페트로비치, 나폴레옹황제의 조세핀황후, 신성로마제국의 요제프 2세 등이 머물렀다.
궁안에는 티에폴로(Tiepolo), 과라나(Jacopo Guarana), 디지아니(Gaspare Diziani), 안젤리(Giuseppe Angeli) 등 바로크 미술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고, 특히 1786년 베네치아를 방문한 괴테는 파올로 베로네세의 그림 '알렉산더의 발치에 엎드린 다리오 왕의 가족'을 보기 위하여 방문하기도 했다.(5)
1582년에 지은 발비궁전은 베네치아의 귀족 발비가문의 집으로 19세기 무렵 미켈란젤로 구겐하임의 소유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아드리아 전기협회로 넘어갔고 1971년에는 베네토주의 소유가 되어 주의회가 사용하고 있다.
1638년에 세계 최초로 문을 열었다는 카지노도 있다. 집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카사(casa)에 작다는 의미의 어미 이노(ino)를 결합한 것이다. 카지노는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 귀족들의 사교용 별관을 의미하였다. 배는 산타 루치아 역까지 갔다가 처음 버스에서 내렸던 장소로 돌아갔다.
산타 루치아 역은 밀라노와 연결되는 노선의 종점으로 산타 루치아 교회가 있던 자리에 1860년에 착공하여 1952년에 완공을 본 것이다.(6) 산타 루치아 성당에 모시고 있던 산타 루치아 성녀의 유해는 가까운 성 제레미아 성당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7)
그랑 카날을 따라 서있는 수많은 건물에 얽힌 이야기들을 가이드로부터 들으면서 사진을 찍었지만, 지금 사진을 찾아보니 기억이 가물거린다. 역시 가이드의 말대로 가슴으로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
불과 한 나절에 베네치아 돌아보기를 마쳤으니 무어 하나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것 같다. 역시 베네치아에서 머물면서 해가 뜰 때, 그리고 해가 질 때의 베네치아의 모습, 기회가 된다면 안개낀 베네치아, 비가 내리는 베네치아를 경험해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베네치아를 뒤로 했다.
참고자료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0. 사라진 알베르틴 270-271쪽, 국일미디어, 2007년
(2) Wikipedia. Santa Maria della Salute.
(3) Wikipedia. Realto bridge.
(4) 클라우스 틸레-도르만 지음. 베네치아와 시인들 72-73쪽, 열림원, 2007년
(5) Wikipedia. Palazzo Pisani Moretta.
(6) Wikipedia. Venezia Santa Lucia railway station.
(7) Wikipedia. San Geremia.
세상의 다른 곳, 베네치아(3)
자유시간 다음에는 선택관광상품으로 곤돌라를 타기로 했다. 베네치아에서 곤돌라를 타보지 못하면 베네치아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를 제대로 보려면 걸어서 다리를 건너다니면서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는 방법과, 곤돌라를 타고 좁은 수로를 따라 가면서 역시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는 방법이 있다.
비발디광장에 이르는 골목길을 조금 걸은 것으로 퉁치고, 이번에는 수로를 따라 가보기로 했다. 우리는 산 마르코 광장 입구에 있는 성 마가의 사자가 앉아 있는 원주 가까이 있는 선착장에서 곤돌라를 탔다. 일행들 가운데 두 팀만이 곤돌라타기를 신청했다. 나머지 일행들은 그만큼 자유시간을 더 즐길 수 있는 셈이다.
곤돌라를 모는 뱃사공을 곤돌리에라고 하는데, 베네치아의 좁은 수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멋들어진 목소리로 노래 한 자락을 뽑는 상상을 해보지만, 흔들리는 곤돌라에 주눅이 들었던 탓인지 곤돌리에하고는 한 마디를 섞어보지도 못했다.
쫘악 빠진 몸매로 날아갈 듯한 자세로 중심을 잡으면서 곤돌라를 모는 환상적인 모습의 곤돌리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뚱뚱한 몸매에 배가 가라앉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는 곤돌리에도 있다. 총독궁 앞을 떠난 곤돌라는 탄식의 다리가 걸려있는 수로를 따라 들어갔다.
다리가 높지 않은 탓에 머리를 잔뜩 숙여야 했다. 그리고 보니 왼쪽은 총독궁이고 오른쪽은 감옥이다. 곤돌리에는 우리를 생각해서인지 총독궁 가까이 길을 잡는다.
곤돌라를 타고 베네치아의 좁은 수로를 따라가는 느낌을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렇게 적었다.
"나의 곤돌라는 소운하를 가고 있었다. 저 동방도시의 미로를 안내하는 마신의 손처럼, 내가 나아감에 따라서, 멋대로 그은 가느다란 항적으로, 무어풍의 작은 창문이 난, 줄지은 높다란 집들을 양쪽으로 밀어붙이면서, 그 구역 한가운데에 길을 트고 나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 간혹 더 훌륭한 건물이 비밀 상자를 열 듯이 뱃길에 나타나기도 한다. 코린트식 기둥들이나 정면에 우의적인 조각상이 있는 상아로 만든 조그만 신전 같은 건물은, 주위의 평범한 사물들 사이에 끼여서 약간 메떨어지고 쓸쓸해 보였으며, 운하와 잇닿은 그 앞마당은 야채 짐을 부리는 선창 같았다.(1)"
베네치아의 속살이라고 할 수 있는 수로를 따라 곤돌라가 나아가면서 프루스트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곤돌라 두 대가 비껴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좁은 수로를 돌아나가면 번듯한 호텔이 등장하는가 하면, 건물 안에서 내다보는 사람과 눈길이 마주치기도 하고, 공간이 없을 것 같은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에서 관광객이 '깍꿍'하고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다리 위를 지나던 관광객들이 우리에게 손짓을 하기도 한다. 가끔은 너무 낡아서 사람이 살지 않은 듯한 집도 있는데, 그런 집들은 수로의 물길이 출입문을 위협하는 듯 보였다. 골목길 수로에는 모터를 단 배가 다니면 안된다고 들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40여분을 이리저리 흔들리다보니 곤돌라는 벌써 선착장에 들어서고 가이드를 비롯한 우리 일행들이 반긴다. 다음 일정이 빠듯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음 일정은 전세낸 모터보트를 타고 그랑 카날(Canal Grand)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랑 카날의 초입 왼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la Salute)은 '건강의 성모성당'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 성당는 1630년 베네치아를 강습했던 흑사병과 연관이 있다.
1630년 여름에 시작한 흑사병은 1931년까지 기승을 부려 베네치아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 도시에서만 46,000명 석호 전체로 따지만 9만 4,000명이 죽었다. 1930년 10월 베네치아 의회는 16세기 흑사병이 유행할 때처럼 교회를 세울 것을 결정하였는데, 도시의 수호성인 성 마르코가 아니라 성모에게 헌정하기로 한 것을 두고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찌되었던 성당은 1631년 착공하여 1687년 완공을 보았다. 발데사레 롱게나(Baldassare Longhena)가 설계한 비잔틴양식의 8각형 건물에는 두 개의 돔을 올렸고, 뒤쪽으로는 그림 같은 두 개의 종탑을 세웠다. 교회에는 티치아노의 '성령 강림', '아브라함의 희생', '산 마르코와 성자들'과 틴토레토의 '가나의 혼인잔치' 등이 소장되어 있다.(2)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을 지나 본격적으로 그랑 카날을 탐험(?)한다.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 건너편에는 헤밍웨이가 머물면서 '노인과 바다'를 집필했다는 그리티 팰리스 호텔(Hotel Gritti Palace)이 있다.
가이드가 설명한 '노인과 바다'는 쿠바의 아바나 교외에 있는 핀카 비히아라는 집에서 집필을 했고, 베네치아에서는 '강건너 숲속으로'를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랑 카날을 지나면서 처음 만나는 다리는 나무로 만든 산 마르코 구역과 아카데미 미술관을 연결하는 아카데미아 다리이다. 베네치아 예술대학이 있는 곳이다.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는 그랑 카날에 걸려 있는 4개의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1181년 니콜로 바라티에리가 부교형태로 만들었고, 동쪽 입구에 주조소가 있었기 때문에 모네타 다리라고 불렀다.
동쪽 둑에 있던 리알토시장이 점점 번성하면서 교통량이 늘게 되어 1255년에 나무다리로 교체되었다. 개폐교로 된 다리는 큰배가 지나가면 중앙부분이 풀려서 들리게 되어 있었다.
1310년 바자몬테 티에폴로(Bajamonte Tiepolo)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일부가 불타기도 했고, 1444년에는 선박축제에 참가한 배의 행렬을 보기 위하여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붕괴되었으며, 1524년에도 붕괴사고가 있었다.
1503년 석조다리를 건설하자는 제안이 나와 오랜 공모 끝에 베네치아 건축가 안토니오 다 폰데(Antonio da Ponte)의 설계로 1591년 완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개의 경사로가 중앙 주랑(central portico)으로 들어올려진 모습으로 경사로에는 2열로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3)
영국의 문필가 토머스 코리에이트에 따르면 리알토다리를 건설하는데 8만크로네(영국돈으로 환산하여 2만2천 파운드)가 들었다고 했다. 코리에이트는 리알토다리의 난간에 있는 기둥이 모두 252개였다고 기록할 정도로 꼼꼼했다.(4)
아카데미아다리에서 조금 더 가면 시각예술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그라씨 궁전(Palazzo Grassi)이 나오고, 이어서 피사니 모레타 궁전(Palazzo Pisani Moretta)을 볼 수 있다. 피사니 모레타 궁전은 러시아 황제 파벨 페트로비치, 나폴레옹황제의 조세핀황후, 신성로마제국의 요제프 2세 등이 머물렀다.
궁안에는 티에폴로(Tiepolo), 과라나(Jacopo Guarana), 디지아니(Gaspare Diziani), 안젤리(Giuseppe Angeli) 등 바로크 미술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고, 특히 1786년 베네치아를 방문한 괴테는 파올로 베로네세의 그림 '알렉산더의 발치에 엎드린 다리오 왕의 가족'을 보기 위하여 방문하기도 했다.(5)
1582년에 지은 발비궁전은 베네치아의 귀족 발비가문의 집으로 19세기 무렵 미켈란젤로 구겐하임의 소유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아드리아 전기협회로 넘어갔고 1971년에는 베네토주의 소유가 되어 주의회가 사용하고 있다.
1638년에 세계 최초로 문을 열었다는 카지노도 있다. 집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카사(casa)에 작다는 의미의 어미 이노(ino)를 결합한 것이다. 카지노는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 귀족들의 사교용 별관을 의미하였다. 배는 산타 루치아 역까지 갔다가 처음 버스에서 내렸던 장소로 돌아갔다.
산타 루치아 역은 밀라노와 연결되는 노선의 종점으로 산타 루치아 교회가 있던 자리에 1860년에 착공하여 1952년에 완공을 본 것이다.(6) 산타 루치아 성당에 모시고 있던 산타 루치아 성녀의 유해는 가까운 성 제레미아 성당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7)
그랑 카날을 따라 서있는 수많은 건물에 얽힌 이야기들을 가이드로부터 들으면서 사진을 찍었지만, 지금 사진을 찾아보니 기억이 가물거린다. 역시 가이드의 말대로 가슴으로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
불과 한 나절에 베네치아 돌아보기를 마쳤으니 무어 하나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것 같다. 역시 베네치아에서 머물면서 해가 뜰 때, 그리고 해가 질 때의 베네치아의 모습, 기회가 된다면 안개낀 베네치아, 비가 내리는 베네치아를 경험해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베네치아를 뒤로 했다.
참고자료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0. 사라진 알베르틴 270-271쪽, 국일미디어, 2007년
(2) Wikipedia. Santa Maria della Salute.
(3) Wikipedia. Realto bridge.
(4) 클라우스 틸레-도르만 지음. 베네치아와 시인들 72-73쪽, 열림원, 2007년
(5) Wikipedia. Palazzo Pisani Moretta.
(6) Wikipedia. Venezia Santa Lucia railway station.
(7) Wikipedia. San Gerem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