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생력의 기반, 주의주장 쓰기

메디칼타임즈
발행날짜: 2016-09-26 11:23:18
  • 고주형의 '헬스케어 스타트업 리더십'

고주형의 '헬스케어 스타트업 리더십'
15. 자생력의 기반, 주의주장 쓰기


헬스케어 스타트업을 앞두고 ‘홀로 일어섬’의 길로 안내하는 자생력 확보의 기반, 두 번째 칼럼이다.

의료비 지출이 많지만 기대수명이 높지 않은 미국을 흔히들 의료 선진화 국가라 말한다. 기술 발전은 의료 선진화의 한 부분이다. 기술은 성숙된 문화가 함께할 때 선진화된다. 의료계 구성원이 일부 반발을 무릅쓰고라도 업(業)의 문제를 스스로 밝히는 개선 의지가 있을 때 가능하다. 개인 스스로의 자정작용을 기대할 수 있을 때까지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선진화에도 순서가 있다

미국이 그랬다. 의료의 질 향상에 대한 논의는 1970년대에 시작되었지만, 실질적인 의료 선진화 1단계는 1999년 미국의학연구소(IOM)가 열었다. 의료사고와 환자안전이라는 용어를 대중의 이야깃거리에 추가했다.

"최소 4만4천 명에서 최대 9만8천 명이 매년 피할 수 있는 의료과실로 사망한다"는 한 문장으로 미국 전체가 뒤집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o Err is Human'에 이어 2001년 출간된 'Crossing the Quality Chasm'은 의료의 질 향상이라는 용어를 국민상식으로 만들며, 업(業)의 문제를 스스로 까발리는 글쓰기에 돌입했다.

의료 선진화 2단계는 아툴 가완디라는 구성원 개인이 나섰다. 조직이 나섰지만 개인이 함구하면 잘돼야 논리정연한 정책에 그친다. 그러나 저널리즘으로 무장한 개인이 대중에 가까이 가면 이는 의료문화가 된다. 하버드 브리검여성병원의 가완디는 뉴요커와 슬레이트에 실었던 기고를 단행본으로 냈다.

필자가 미국에서 경영자문을 하며 접한 'Complications'은 당시 한국 의료에 익숙했던 내게 충격이었다. 이후 발간된 'Better'와 'Being Mortal' 역시 미국 최고의 병원이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비효율과 태만, 환자가 겪는 안전실태, 수술방이 비지 않아 환자와 나누는 대화까지 여과 없이 내뱉었다.

남극에 서식하는 황제펭귄의 주저하는 몸짓(다소 비겁한)에 대한 연구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다. 황제펭귄은 바다표범에 잡아먹힐까봐 쉽사리 바다로 뛰어들지 못한다고 한다. 물가에 떼 지어 서서 바다표범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지만 물속에 들어가지 않는 한 모른다. 누군가 한 마리만 들어가줘도 알 수 있는데 다들 희생물이 되기 싫어 기다릴 뿐이다.

때로는 뒤에서 밀치고 앞에 서 있는 펭귄 중 한 마리를 떠밀기도 한다. 반면, 작은 새는 포식자가 날아들면 특유의 경계음을 내어 전체 무리가 도망가도록 한다. 톰슨가젤 역시 사자가 접근하면 작은 새가 내는 경계음처럼 경계 도약을 하며 무리를 구한다. 얼핏 봐도 자기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타인을 구하는 이타적 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

외과 의사이자 작가인 아툴 가완디는 스스로 물속으로 뛰어내리고 경계음을 낸 이타적인 전문가다.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의료행위를 놓고 병원에서 벌어지는 의료진의 자세와 실천에 관한 주의주장 쓰기의 정점을 찍었다. 가완디는 TED와 같은 오픈포럼에도 모습을 내비쳤고, 브라이언 골드맨과 같은 솔직한 개인을 다수 만들어냈다.

우리나라 의료계는 지금 선진화되었는가. 몇 단계 정도에 와 있을까. 우리나라 의료계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데 있어서는 아직은 언론사의 PD와 아나운서의 역할이 큰 것 같다. 그것도 탤런트 박주아나 가수 신해철과 같은 유명인이어야만 ‘PD수첩’이나 ‘그것이 알고 싶다’의 소재가 된다.

앞선 의학전문기자는 양악수술 후 몇 시간 만에 환자가 사망했다는 기사를 내기도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여전히 의료계의 중심에서 나오는 자성의 목소리를 듣기에는 제약이 많다.

요즘 부쩍 의학에 의문을 제기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책들이 많이 출간된다.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의사에게 기대지 않고 사는…', '의사에게는 비밀이…'라는 제목만 봐도 섬뜩하다. 의료계 핵심구성원이 저널리즘에 나서지 않는 한 이런 현상은 계속될 것이고 국민이 보내는 의료계의 신뢰 수준은 점점 낮아질 것이다.

우리는 글을 잘 쓰는 방법에 대해 중고등학생 시절 교과서를 통해 이미 배웠다. 중국 송나라의 문장가 구양수는 글을 잘 쓰려면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독은 많이 읽으라는 뜻이고 다작은 자주 습작을 해보라는 뜻이다. 다상량에서 '상'과 '량'은 둘 다 헤아린다는 뜻인데, 온갖 정신을 집중하여 탐구하고 몰입하라는 의미이다.

어느 분야건 논문을 발표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다독, 다작, 다상량은 일상에서 늘 실천해야 하는 일이다. 교실 선생의 직간접적인 도움으로 학생 시절 논문에 도전하기도 한다. 개원의도 논문을 써야 브랜딩이 되는 시대이기에 우리나라도 SCI급 SCOPUS 논문이 많이 늘었고 앞으로도 상향세를 유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주의주장 쓰기는 개인의 영역으로 남겨진다. 한국출판연감 통계를 보면 10년 전보다 출판 조건이 다양해졌고 언론 통제는 거의 사라졌으니 예전보다 대중을 향한 주의주장 쓰기에 좋은 환경인 것은 분명하다.

"대학 선생은 미주, 각주의 글쓰기밖에 못한다"는 어느 지식인의 자조적인 목소리 탓일까. 다행히도 가벼운 서평에서 칼럼, 책에 도전하는 대학 선생이 전보다 많아졌고 분야도 전문서적 외에 의학상식, 소설, 수필, 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모두 다독, 다작에 이은 다상량의 결과물이다.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비고츠키가 말한 내적 언어를 이야기하는 글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의주장 글쓰기가 개인의 영역으로 남겨진 것은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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