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슨' 설립 성공 신화…벤처 붕괴로 실패한 기업가 오명도
기업가적 도전정신, 국내 의료기기산업 발전 토대 마련
갑작스러운 비보였다.
한국 벤처기업 대부이자 의료기기업체 사관학교로 불렸던 ‘메디슨’(현 삼성메디슨) 설립자 이민화 이사장이 지난 3일 향년 66세로 영면에 들었다.
의료기기업계에서는 국내 의료기기산업 산증인이자 큰 별이 졌다며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고(故) 이민화 이사장은 1995년 벤처기업협회를 설립하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또 코스닥 설립 추진과 벤처기업특별법 제정에 앞장서는 등 벤처기업들의 자금조달과 창업 생태계 조성에도 힘썼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료기기공업협동조합 이사장, 사법개혁추진위원회 위원, 한국기술거래소 이사장, 한국디지털병원 수출사업협동조합 초대이사장, 창조경제연구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민화 이사장은 국내 의료기기산업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과거 ‘벤처기업 신화’로 불리며 40곳이 넘는 계열사를 거느린 메디슨의 고속 성장을 이끌어 의료기기산업 태동의 초석을 쌓았기 때문이다.
반면 차입금에 의존한 무리한 투자와 문어발식 사업 확장으로 메디슨이 부도를 맞자 ‘벤처 거품론’의 대표적인 기업가로 꼽히는 불명예도 안았다.
이러한 명암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
그의 기업가적 도전정신은 불모지와 다름없었던 국내 의료기기산업 토양에서 ‘의료기기 국산화’의 꽃을 피운 소중한 씨앗이 됐다는 점이다.
국내 의료기기산업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고(故) 이민화 이사장의 족적을 되짚어봤다.
벤처 신화 ‘메디슨’ 설립부터 몰락까지
국산 초음파진단기를 최초로 개발한 메디슨은 고인에게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메디슨은 1985년 이민화 이사장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AIST) 출신 연구원 3명과 함께 자본금 5000만원으로 설립한 벤처기업.
창업 후 첫 모델 ‘SA4000’을 출시했고 1986년 서울녹십자병원에 처음으로 제품을 납품했다.
이민화 회장은 매년 매출액의 약 15%를 연구소에 투자할 정도로 연구개발에 힘을 쏟았다.
이를 통해 1995년 최초의 컬러영상 초음파진단기 개발에 이어 1996년 오스트리아 크레츠테크닉社를 인수해 3D 영상기술을 자체 기술과 접목시켜 4D 초음파진단기를 상용화했다.
메디슨은 1990년대 중반부터 계열사들을 빠르게 늘려나가며 소위 ‘메디슨 연방’으로 불리는 독특한 의료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98년 메디슨 관계사 및 기타 회사에 출자한 취득가격기준 총액 851억원은 불과 1년 뒤 1882억원으로 2배 이상 급증했다.
2000년도 당시 메디슨 연방에는 ▲메디다스(현 유비케어) ▲메디페이스(현 인피니트헬스케어) ▲비트컴퓨터 ▲매디너스 ▲바이오시스 ▲프로소닉 ▲메리디안 ▲인포피아 ▲메디코아 ▲메디링스 등 40곳 이상 의료관련 벤처기업들이 참여했다.
이들 벤처기업들은 향후 ▲EMR ▲PACS ▲X-ray ▲MRI 등 국내 진단영상장비 및 의료정보화솔루션의 근간이자 밑거름이 됐다.
메디슨 연방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차입금에 의존한 무리한 투자와 사업 확장은 메디슨의 몰락을 가져왔고, 메디슨 연방 또한 붕괴됐다.
메디슨은 2000년도 접어들어 닷컴과 벤처 거품이 꺼지고 미국 나스닥 폭락을 정점으로 투자기업 주가가 10분의 1로 떨어지면서 심각한 자금난과 현금 유동성 위기를 맞아 한때 약 3600억원의 부채를 떠안게 된다.
그러자 투자주식과 자회사 크레츠테크닉社 보유 지분 전량을 GE에 1100억원에 매각하는 등 자금 확보에 나섰다.
하지만 기업어음 66억원을 막지 못해 2002년 1월 29일 최종 부도를 맞는다.
메디슨 부도는 당시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금융권 부채를 감당 못한 의료기기업체 파산의 의미보다 화려하게 등장했던 1세대 벤처기업의 몰락이 가져온 충격과 후폭풍이 더 컸기 때문이다.
이후 2002년 춘천지방법원 법정관리에 돌입한 메디슨은 강도 높은 회생 자구책을 통해 정리채무를 변제하면서 2006년 6월 1일 조기에 법정관리를 졸업했다.
하지만 2012년 12월 14일 칸서스인베스트먼트 3호 사모투자전문회사와 3313억원의 인수계약을 체결한 삼성전자에 인수돼 현 삼성메디슨으로 이름을 바꿨다.
국내 의료기기업체 해외진출 돌파구 제시
이민화 이사장은 메디슨이 최종 부도처리 된 2002년 1월에 앞서 약 3개월 전인 2001년 10월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고 대표이사직을 사퇴했다.
한동안 공식적인 대외활동이 뜸했던 고인은 2011년 3월 정식 설립된 ‘한국디지털병원 수출사업협동조합’(KOHEA) 초대 이사장을 맡으면서 의료기기업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기자는 2011년 4월 이민화 이사장과 KOHEA 설립 목적과 역할에 대해 약 2시간 동안 단독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KOHEA 역할을 “의료기기·의료정보화솔루션 공급은 물론 병원 건설에서부터 IT통신·의료서비스까지를 하나의 패키지 상품으로 묶은 디지털병원을 해외시장으로 수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국산 의료기기·의료정보화솔루션은 물론 진료, 수술, 처치, 교육훈련, 유지보수 등과 같은 의료서비스와 인력을 비롯해 병원 설계, 시공, 감리, 운영까지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해외로 수출하는 턴키사업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민화 이사장의 디지털병원 수출 계획은 국내 의료기기산업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좁은 내수시장을 고려할 때 국내 의료산업시장 발전에는 분명 한계성이 있다. 또 개별 중소업체들의 해외시장 개척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고, 마지막으로 창구역할을 해줄 대기업이 마땅하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에 머물지 않고 해외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하나로 묶어 나갈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다.”
고(故) 이민화 이사장에 대한 평가는 명암이 엇갈린다.
하지만 그의 기업가적 도전정신은 초음파진단기 등 의료기기 국산화에 기여한 것은 물론 한국 의료기기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고(故) 이민화 이사장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오는 6일이다.
한국 벤처기업 대부이자 의료기기업체 사관학교로 불렸던 ‘메디슨’(현 삼성메디슨) 설립자 이민화 이사장이 지난 3일 향년 66세로 영면에 들었다.
의료기기업계에서는 국내 의료기기산업 산증인이자 큰 별이 졌다며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고(故) 이민화 이사장은 1995년 벤처기업협회를 설립하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또 코스닥 설립 추진과 벤처기업특별법 제정에 앞장서는 등 벤처기업들의 자금조달과 창업 생태계 조성에도 힘썼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료기기공업협동조합 이사장, 사법개혁추진위원회 위원, 한국기술거래소 이사장, 한국디지털병원 수출사업협동조합 초대이사장, 창조경제연구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민화 이사장은 국내 의료기기산업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과거 ‘벤처기업 신화’로 불리며 40곳이 넘는 계열사를 거느린 메디슨의 고속 성장을 이끌어 의료기기산업 태동의 초석을 쌓았기 때문이다.
반면 차입금에 의존한 무리한 투자와 문어발식 사업 확장으로 메디슨이 부도를 맞자 ‘벤처 거품론’의 대표적인 기업가로 꼽히는 불명예도 안았다.
이러한 명암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
그의 기업가적 도전정신은 불모지와 다름없었던 국내 의료기기산업 토양에서 ‘의료기기 국산화’의 꽃을 피운 소중한 씨앗이 됐다는 점이다.
국내 의료기기산업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고(故) 이민화 이사장의 족적을 되짚어봤다.
벤처 신화 ‘메디슨’ 설립부터 몰락까지
국산 초음파진단기를 최초로 개발한 메디슨은 고인에게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메디슨은 1985년 이민화 이사장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AIST) 출신 연구원 3명과 함께 자본금 5000만원으로 설립한 벤처기업.
창업 후 첫 모델 ‘SA4000’을 출시했고 1986년 서울녹십자병원에 처음으로 제품을 납품했다.
이민화 회장은 매년 매출액의 약 15%를 연구소에 투자할 정도로 연구개발에 힘을 쏟았다.
이를 통해 1995년 최초의 컬러영상 초음파진단기 개발에 이어 1996년 오스트리아 크레츠테크닉社를 인수해 3D 영상기술을 자체 기술과 접목시켜 4D 초음파진단기를 상용화했다.
메디슨은 1990년대 중반부터 계열사들을 빠르게 늘려나가며 소위 ‘메디슨 연방’으로 불리는 독특한 의료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98년 메디슨 관계사 및 기타 회사에 출자한 취득가격기준 총액 851억원은 불과 1년 뒤 1882억원으로 2배 이상 급증했다.
2000년도 당시 메디슨 연방에는 ▲메디다스(현 유비케어) ▲메디페이스(현 인피니트헬스케어) ▲비트컴퓨터 ▲매디너스 ▲바이오시스 ▲프로소닉 ▲메리디안 ▲인포피아 ▲메디코아 ▲메디링스 등 40곳 이상 의료관련 벤처기업들이 참여했다.
이들 벤처기업들은 향후 ▲EMR ▲PACS ▲X-ray ▲MRI 등 국내 진단영상장비 및 의료정보화솔루션의 근간이자 밑거름이 됐다.
메디슨 연방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차입금에 의존한 무리한 투자와 사업 확장은 메디슨의 몰락을 가져왔고, 메디슨 연방 또한 붕괴됐다.
메디슨은 2000년도 접어들어 닷컴과 벤처 거품이 꺼지고 미국 나스닥 폭락을 정점으로 투자기업 주가가 10분의 1로 떨어지면서 심각한 자금난과 현금 유동성 위기를 맞아 한때 약 3600억원의 부채를 떠안게 된다.
그러자 투자주식과 자회사 크레츠테크닉社 보유 지분 전량을 GE에 1100억원에 매각하는 등 자금 확보에 나섰다.
하지만 기업어음 66억원을 막지 못해 2002년 1월 29일 최종 부도를 맞는다.
메디슨 부도는 당시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금융권 부채를 감당 못한 의료기기업체 파산의 의미보다 화려하게 등장했던 1세대 벤처기업의 몰락이 가져온 충격과 후폭풍이 더 컸기 때문이다.
이후 2002년 춘천지방법원 법정관리에 돌입한 메디슨은 강도 높은 회생 자구책을 통해 정리채무를 변제하면서 2006년 6월 1일 조기에 법정관리를 졸업했다.
하지만 2012년 12월 14일 칸서스인베스트먼트 3호 사모투자전문회사와 3313억원의 인수계약을 체결한 삼성전자에 인수돼 현 삼성메디슨으로 이름을 바꿨다.
국내 의료기기업체 해외진출 돌파구 제시
이민화 이사장은 메디슨이 최종 부도처리 된 2002년 1월에 앞서 약 3개월 전인 2001년 10월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고 대표이사직을 사퇴했다.
한동안 공식적인 대외활동이 뜸했던 고인은 2011년 3월 정식 설립된 ‘한국디지털병원 수출사업협동조합’(KOHEA) 초대 이사장을 맡으면서 의료기기업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기자는 2011년 4월 이민화 이사장과 KOHEA 설립 목적과 역할에 대해 약 2시간 동안 단독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KOHEA 역할을 “의료기기·의료정보화솔루션 공급은 물론 병원 건설에서부터 IT통신·의료서비스까지를 하나의 패키지 상품으로 묶은 디지털병원을 해외시장으로 수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국산 의료기기·의료정보화솔루션은 물론 진료, 수술, 처치, 교육훈련, 유지보수 등과 같은 의료서비스와 인력을 비롯해 병원 설계, 시공, 감리, 운영까지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해외로 수출하는 턴키사업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민화 이사장의 디지털병원 수출 계획은 국내 의료기기산업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좁은 내수시장을 고려할 때 국내 의료산업시장 발전에는 분명 한계성이 있다. 또 개별 중소업체들의 해외시장 개척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고, 마지막으로 창구역할을 해줄 대기업이 마땅하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에 머물지 않고 해외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하나로 묶어 나갈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다.”
고(故) 이민화 이사장에 대한 평가는 명암이 엇갈린다.
하지만 그의 기업가적 도전정신은 초음파진단기 등 의료기기 국산화에 기여한 것은 물론 한국 의료기기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고(故) 이민화 이사장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오는 6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