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항상 옳은가…올바른 보살핌에 대한 고민

황다예
발행날짜: 2021-06-21 05:45:50
  • 황다예 학생(동국의대 예과 2학년)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공감이 안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몇 주 전 한 수업 중의 팀 프로젝트를 위해 진행한 교수님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마디였다. '환자와의 공감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시나요'라는 질문 자체가 꽤나 진부했기에, 엄청난 답변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무척 싫어한다고 늘 말해온 나였기에, 그리고 학생들과 수업할 때도 한 명 한 명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시며 크고 작은 배려를 보여주신 교수님이셨기에 이러한 답변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어진 교수님의 말씀은 내 고개를 끄덕이게 했고 '공감'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해 보게 만들었다. 주변 사람들과 의견을 공유하고 책도 찾아 읽으며 나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공감을 바라보게 되었고, 이를 조심스럽게 나눠보고자 한다.

공감은 굉장히 다양한 상황에서 포괄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단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공감을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런 정의 하에서, 공감은 직접적 경험 없이도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도구이자 인간과 인간을 잇는 하나의 끈 같은 개념이다. 그래서 공감은 그 자체로 인간 존재의 본질적 요소이자 인류에게 내재된 속성 중 하나로 여겨지는데 각종 재난과 재해가 발생했을 때 모이는 성금, 낯선 이를 구해내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의인의 모습을 담은 뉴스 등을 보며 우리가 '인류애'를 느낀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공감은 분명 꼭 필요한 심리 작용이고 공감 능력은 인간성의 본질로 아주 소중하고 중요한 능력이다. 하지만 나는 공감이 곧 절대선이라고 여기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감에 반대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공감에 항상 찬성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공감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선입견과 성향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 이성적인 판단과 합리적인 절제가 결여된 과도한 공감 능력은 우리를 단순히 더 깊이 공감되는 쪽의 편에 서도록 이끈다. 하지만 어떤 것이 더 공감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더 옳은 것,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공감은 도움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을 제쳐 두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한 사람을 돕게 하고, 우리의 도움이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좋아하고 친숙하게 여기는 대상을 돕게 한다. 또 우리의 행동이 장기적으로 만들어낼 효과가 아니라 당장의 감정과 직관에 집중하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못하는(혹은 않는) 사람들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다시 말해 때로는 공감이 과도한 피암시성을 조장해 이성적 사고를 막는 눈가리개 혹은 족쇄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감은 정의(正義)의 실현보다는 우리의 초점이 향한 대상에게 돌아갈 이익으로 관심을 돌린다.

공감이 하나의 스펙 혹은 지능처럼 여겨지는 최근, 공감이라는 이름을 내세운 채로 이런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경향은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나의 의견에 공감해 주는 좋은 사람은 우리 편, 그렇지 못한 사람은 공감 능력이 부족한 나쁜 사람이자 적' 이렇게 사람들을 둘로 갈라놓은 뒤 반대쪽의 입장은 의도적으로 외면하면서, 세상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나의 생각이 반영되는 것이며 이 목표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세상의 부조리 내지는 악이라고 굳게 믿는 이들을 너무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요즘의 세상에는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만큼이나 공감 능력이 과도해서 생기는 문제가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시 교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교수님은 당신 스스로도 계속 건강한 상태로 살아오셨고 주변에서 그만큼 아픈 사람들을 본 적도 없기 때문에 환자의 아픔을 잘 공감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환자가 아프다고 말하니 그런 줄 아는 것이지, 어느 정도로 어떻게 아픈지 직접적으로 공감이 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이었다. 더불어 드라마를 비롯한 대중매체에서 보여지는 '공감하는 의사'의 모습을 실제 의료환경에서 보기는 어렵고 직접 그렇게 하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을 것이므로, 조금 다른 방향으로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현재 환자의 상태가 어떤지, 앞으로 진행될 치료는 무엇이며 왜 이런 치료를 하는지 등을 환자의 눈높이에서 최대한 이해시키고 충분히 설명한 후 환자와 보호자의 동의를 얻고 공감대를 이루려고 노력한다고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또 환자가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교수님의 능력이 닿지 않는 부분은 솔직하게 미리 알리는 편인데, 그럴 때마다 학회에 꾸준히 참석하며 개인적으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경험도 많이 쌓아서 몇 마디의 적당히 상투적인 위로를 건네기보다는 환자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알려주는 의사가 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씀하셨다.

나 역시 환자로 병원을 찾았을 때 "괜찮아질 것이다" 혹은 "그래도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어라" 등의 말을 의무처럼, 무성의하게 건네는 의사 분에게 상처를 받았던 경험이 있기에, 교수님의 말이 조금 더 와닿았던 것 같다. 가만히 내 말을 들어주고 함께 그 상황에서 최선을 고민해주는 의사 선생님을 만났을 때 오히려 그 선생님에 대한 신뢰감과 함께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여 주신다는 기분을 느꼈고, 지금보다 분명 나아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렇듯 종종 자신의 공감 능력이 훌륭하다고 확신할 때, 정확히 말해서는 공감의 힘을 과신하고 과대평가할 때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내가 당신을 다 안다' 혹은 '괜찮다' 등의 말은 꼭 의사-환자 관계가 아니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든 가볍게 건네서는 안 되는 말일 것이다. 자신이 상대를 다 이해하고 있다고 판단해 버리고 섣불리 보이는 말과 행동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상대방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위험을 내포한다.

공감 외에도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은 충분히 많이 존재하며, 실제로 우리는 타인에게 감정이입하지 않고도 타인을 충분히 이해하고 도울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우리는 길을 잃고 울고 있는 아이가 느끼는 두려움과 슬픔을 똑같이 느끼지 않고도 아이를 도울 수 있다. 인간에게는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존재하고, 이를 통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성을 발휘할 수 있다. 공감과 이해는 동의어가 아니며, 공감과 선함도 동의어가 아니다. 우리는 모든 선한 것들을 필요 이상으로 공감 능력과 연관짓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인류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염려와 같은 거창한 감정부터 시작해 의무감 혹은 자부심, 종교적인 신념 등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사람들은 자신 나름대로의 선함을 행하는데, 우리는 공감에 생각보다 너무 많은 공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최근 인상깊게 읽었던 김경인 시인의 시집 중 이라는 시의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올 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타인의 그늘을 온전히 읽어내려면, 또 환자의 그늘을 올바르게 보살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의 그늘을 다 안다며 성큼 그 그늘에 발부터 내뻗기보다는 '당신의 그늘을 다 알지 못하는 나이지만, 당신의 행복과 안녕을 나 역시 온 마음으로 바랍니다' 라는 마음으로 가만히 그 그늘을 바라보고 보듬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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