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딩 공개 늦춰 재정 확대 막으려는 전략" 시각도 등장
손실보상금‧예방접종비 집중된 병‧의원 전망 밝지 않아
의료계의 한해 살림살이를 정하는 수가협상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수가 인상을 놓고 가입자와 공급자 의견이 어느 때보다 팽팽히 맞서고 있다. 대립의 중심에는 '코로나19'가 있다.
가입자 단체는 코로나19 대유행을 겪으면서 전 국민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기 때문에 보건의료계를 위해 수가를 퍼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수가 인상은 건강보험료 인상과 직결되기 때문.
반면, 공급자 단체는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어려움은 비단 일반 국민뿐만 아니라 여기에 감염병을 이겨내기 위한 보건의료계의 '헌신'이 있었다며 수가인상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가입자 단체가 보건의료계를 바라보는 보수적 시각이 수가인상에 투입할 건강보험 재정, 일명 밴딩(banding)을 설정하지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수가협상 만료 시한 하루 전까지도 1차 밴딩 공개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약 한 달 간의 협상 과정이 무색한 지경이 됐다.
통상 건보공단 재정운영위원회 소위원회에서 설정한 밴딩으로 협상이 이뤄지는데 공개되지 않았으니 수가협상 마지막 날 관련 협상을 모두 마무리 지어야 하는 상황이다.
정해진 파이 안에서 6개의 공급자가 나눠먹기를 해야 하는 눈치 싸움이 수가협상인 만큼 '밴딩 확대'는 6개 공급자 단체의 공통의 목표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밴딩 확대가 쉽지 않다는 게 중론.
실제 한 공급자 단체 관계자는 이 같은 상황을 놓고 "수가협상 마지막 날 밴딩을 공개함으로써 밴딩 확대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것 같다"라는 추측을 내놨다.
병원과 의원, 누가 더 많이 갖고 갈까 눈치싸움 치열 예상
밴딩이 정해졌다면 이번에는 누가 더 많이 갖고 갈 것인가를 놓고 공급자 단체 사이 눈치 싸움이 벌어진다.
그 중에서도 의원과 병원 유형이 투입 재정의 70% 이상을 가져가기 때문에 이들의 협상 결과에 가장 많은 관심이 쏠린다. 건보공단도 의원과 병원 유형이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둘 다 협상을 체결할 수 없다면 어느 한 유형과만 손을 잡고 가는 전략을 취해왔다.
지난해 협상에서 건보공단은 3년 연속 결렬을 맺던 의원 유형의 손을 잡았다. 진료비 증가율 등 의료기관의 경영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각종 통계지표가 마이너스를 가리킨 데다 반정부 성향이 강했던 대한의사협회 집행부가 소통을 강조하는 이필수 회장으로 바뀌면서 의정 관계가 보다 부드러워졌다. 더불어 개원가를 중심으로 코로나19 예방접종 사업 본격화를 앞두고 있어서 의원을 향한 훈풍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하지만 올해는 분위기가 반전되는 모습이다. 코로나19 예방접종 사업에 대한 건강보험 재정 쏠림 현상을 가입자 단체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 진료비 증가율 10%를 기록하며 예년 수준으로 돌아가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도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모습이다.
지난해 의원이 3%의 인상률을 받으면서 병원과 나눠 갖는 몫이 비슷해진 부분도 무시 못 할 부분이다. 의원이 갖고 간 추가 재정은 3923억원으로 병원 유형보다 91억원 적었다. 병원 유형이 '수가역전' 현상의 부당함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으며 건보공단과 가입자 역시 공감하고 있다는 점도 의원에게는 쉽지 않은 부분이다.
그렇다고 병원 유형의 전망이 상대적으로 밝다고만 할 수는 없다. 수가 인상률 결정의 주요 잣대인 진료비 증가율에서 병원 유형의 증가율은 7.6%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종별로 나눠보면 상급종합병원은 11%나 증가하며 예년 수준의 증가율을 보였다. 다만 병원 유형의 수가협상에서 매번 불리하게 작용했던 요양병원의 진료비는 마이너스를 기록해 단순히 통계만 놓고 봤을 때는 요양기관 중 유일하게 코로나19 경영난 연장선에 있었다.
가입자가 주목하고 있는 코로나19 손실보상금 2조5000억여원의 상당 부분이 병원 유형에 쏠리고 있다는 점도 불리한 부분이다.
의료계는 코로나19 대유행 과정에서 일어난 보상들을 수가 협상과 연결지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진료비 증가율 역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등 정부 정책을 수행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병협 송재찬 상근부회장(수가협상단장)은 "감염병 대유행 상황은 앞으로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고 이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적은 밴딩 인상률로 어떻게 의료계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동기부여가 되겠나"라고 반문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적은 보험료로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나라"라며 "수가 인상은 결국 질 좋은 의료서비스로 돌아온다.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는 게 중요하다고 인식해주길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의협 김동석 수가협상단장 역시 "코로나19 관련 비용은 수가협상과는 전혀 별개의 사안"이라며 "의사들이 목숨을 걸고 수행했던 코로나19 감염 검사와 치료를 수가협상과 연결시키는 것은 부당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올해 협상에서도 '1조원'의 벽 넘을 수 있을까
사실 밴딩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 이같은 논의는 의미 없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지난해 1조666억원(인상률 2.09%)으로 역대 최고액을 기록하면서 1조원 수준에서 밴딩이 만들어지고 있다.
재정운영위 관계자는 "물가인상률, 임금인상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한 적이 있지만 수가인상률은 해마다 올랐다"라며 "가입자는 보험료 인상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수가 인상 그 자체에 부정적 시각이 있다. 인상을 하더라도 인상폭 자체가 높지 않다"라고 귀띔했다.
그렇기 때문에 올해 협상 과정에서 전 유형 결렬 또는 한 유형을 제외한 모든 유형 결렬이라는 극단적 예측까지 나오고 있다. 과거 협상에서는 2020년 있었던 수가협상(2021년 환산지수)에서 병원, 의원, 치과 등 3개 유형이 결렬을 선언한 게 가장 많은 숫자였다.
실제 2008년 유형별 협상 이후 딱 한 번 결렬을 선언했던 대한한의사협회 조차도 올해는 어려운 수가협상이 될 것이라며 비관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이진호 수가협상단장은 "협상 타결 가능성에 가장 암울한 느낌"이라며 "두려움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밴딩 폭에 따라 각 유형의 눈치싸움이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가입자의 보수적인 시각, 뒤늦은 밴딩 공개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건보공단 수가협상단 역시 "적어도 지난해보다는 (눈치싸움이)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