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의 기준 바꿔야…수술 후 관리 전문가 필요"

발행날짜: 2023-07-10 05:00:00
  • [학회초대석] 석승한 대한신경집중치료학회 이사장
    의료 패러다임 치료→예방으로…"관리 따라 예후 개선·재정 절감"

"의료의 패러다임이 변했습니다. 이제 명의의 기준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의료의 패러다임이 치료에서 예방·관리로 전환되면서 침묵하던 학회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예방 및 관리로 수술을 최소화하고 수술이 불가피하다면 수술 이후 관리에 집중해 환자의 빠른 건강 회복과 사회 복귀를 돕자는 것.

최근 대한마취통증의학회와 대한외과학회가 보건 당국에 '수술 후 회복 향상 프로그램'(Enhanced Recovery after Surgery, ERAS) 시범사업을 제안한 것도 수술이 만능이 아니라는 관점을 공유한다.

질병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겼던 과거에는 명의의 기준이 곧 수술 능력이었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일회성 수술보다는 지속적이고 전문적인 관리가 예후를 결정짓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인식 변화에 대한신경집중치료학회도 동참했다. 학술대회에서 첫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고 신경계 중환자 치료에 있어 수술이 전부가 아님을 주장한 것. 그 핵심으로 신경중환자의사(Neurointensivit)를 내세우고 있다.

수술 이전, 이후를 담당하는 신경중환자의사가 오히려 신경 중환자의 예후에 '키 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며 제도화를 주장하고 나선 석승한 대한신경집중치료학회 이사장(원광의대 신경과)을 만나 신경 중환자 치료의 현실적 문제 및 제도의 취지, 국내외 현황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달 17일 신경집중치료학회는 추계학술대회를 통해 '신경계 중환자의료의 현재와 unmet needs'를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시도, 신경중환자의사의 공론화에 불을 지폈다.

신경 중환자는 수술로 끝나는 게 아니라 수술 이후부터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환자 상태가 크게 바뀔 수 있다는 것.

석승한 이사장은 "신경계 질환 중에서 의식의 변화를 동반하며 급성인 경우 신경계 중증질환으로 본다"며 "뇌경색 및 뇌출혈을 포함한 뇌혈관질환, 뇌염이나 뇌수막염 같은 중증 염증 및 감염질환, 심정지 후 혼수, 간질중첩증, 섬망, 중증 말초신경 및 근육질환이 이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석승한 대한신경집중치료학회 이사장

그는 "신경외과는 수술적 방법으로 질병에 접근하고 신경과는 수술 외적인 부분을 포괄적으로 담당한다"며 "신경외과가 수술에서 역할을 다하고 나면 그 이후 이뤄지는 영역은 내과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신경과 의사인 신경중환자의사가 있다면 환자를 더 잘 돌볼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과거 의료의 패러다임은 질병의 대처에 집중됐기 때문에 질병을 수술로 해결한다는 인식 아래 수술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명의의 기준이었다"며 "반면 질병을 관리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수술은 치료의 시작일 뿐 치료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유럽, 미국 등의 의료선진국은 중증 신경계 질환자를 전문으로 돌보는 독립된 신경집중치료실(Neurocritical care unit)과 신경중환자의사 제도를 통해 수술, 관리 투 트랙으로 접근하고 있다. 집중치료실 및 신경중환자의사를 통해 중증 신경계 질환자를 치료한 결과 입원 기간과 합병증의 감소, 사망률의 감소까지 혜택은 충분히 증명이 됐다는 것.

▲해외는 신경집중치료실·신경중환자의사 활성화…"예후 변화 촉발"

석승한 이사장은 "신경계 중환자를 잘 돌보려면 신경계 환자에 맞춰진 진료 환경과 신경계 환자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전문인력이 필요하다"며 "이미 많은 논문을 통해 신경계 중환자가 신경집중치료실에서 신경중환자의사의 전문 치료를 받았을 때 사망 위험이 20~30% 이상 줄어들고 합병증, 입원 기간이 감소한다는 게 입증됐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나 유럽에선 웬만한 대학병원급 기관은 독립된 신경집중치료실을 운영한다"며 "뇌출혈 환자가 발생한 경우 신경외과 의료진이 수술을 담당하고 이후 집중치료실에 입원해 신경중환자가 관리하는 시스템이 확립돼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외국에서 예후 향상 연구가 축적되면서 집중치료실과 전문인력 양성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고 있다"며 "국내 역시 유사한 시스템을 도입한 일부 대학병원이 비슷한 연구 결과를 내놓으면서 분위기 반전을 노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집중치료실은 어떤 치료를 제공하기 때문에 예후 변화를 이끌어내는걸까.

석승한 이사장은 "일반 중환자실은 폐렴과 같은 감염, 합병증 예방에 초점을 맞춘다"며 "반면 신경계 집중 치료실은 이런 부분은 물론 뇌 신경계 문제를 빨리 찾아내기 위한 기기를 갖춰 뇌의 변화 확인 및 신속한 대응에 집중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독립된 신경계 집중 치료실을 갖춘 기관은 서울아산병원, 아주대병원, 분당서울대병원 등 상급종합병원급에 국한된다. 하지만 최근 필수의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환자 치료, 관리를 위한 새로운 제도에도 보건의료계의 시선이 미치게 됐다는 게 그의 판단.

그는 "3차 병원 지정에 중증 환자를 얼마나 잘 보는지가 중요한 지표로 설정되고 있어 대형병원들에서 중증 신경계 환자를 잘 돌보기 위한 시스템 구성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게다가 신경과 의사들 중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익히기 위해 해외로 연수를 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신경중환자의사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고 밝혔다.

▲"예후는 물론 재정 감소까지…제도화 미룰 이유없어"

아직 국내에는 신경중환자 치료를 위한 전문 펠로우십이 없는 실정. 학회는 인증의 제도를 통해 인력 양성에 팔을 걷었다.

석 이사장은 "일부 대학병원이 펠로우십을 운영하고 있지만 온전히 신경 중환자에 집중하기 어렵고 인력도 부족해 학회가 나서게 됐다"며 "중증 신경계 환자를 볼 수 있 필수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여름과 겨울에 아카데미 형태로 운영을 했고, 올해 처음으로 인증의를 배출했다"고 밝혔다.

그는 "인증의가 활성화되고 지속적인 인력 배출로 이어지려면 수가와 연동돼야 한다"며 "인증의가 중증 환자를 돌보거나 중환자실이나 독립된 신경집중치료실에서 진료할 때 수가 가산 등의 활성화 방안이 필요하다"고 제도화를 촉구했다.

상황은 학회에 우호적이다. 대중들이 의료 패러다임 변화 필요성에 공감할 뿐 아니라 유관 학회들도 비슷한 취지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한마취통증의학회와 대한외과학회의 수술 후 회복 향상 프로그램 시범사업을 제안도 수술 후 관리가 예후 및 재정 절감에 기여한다는 관점을 공유한다.

ERAS는 수술 후 관리에 따라 입원기간 및 수술 관련 합병증·사망을 감소시켜 의료비와 사회적비용 측면 모두 효용성이 있어 의료선진국의 경우 10여년 전부터 활발히 도입하는 추세.

석승한 이사장은 "ERAS와 신경중환자 집중 치료는 수술 환자에 대한 관리가 예후에 도움이 되고 궁극적으로 전체 의료비 절감에 도움이 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며 "수술로 질병 치료가 끝나지 않고 이후 관리가 의료의 질 향상에 직결된다는 인식은 전세계적인 흐름"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내과-외과 혹은 수술-관리와 같은 분절적인 인식이 아니라 수술 전후 다학제적인 접근이 연속적으로 이뤄진다는 그런 개념이 필요하다"며 "인프라와 전문 인력 확보가 환자뿐 아니라 건강보험 재정 모두에 도움이 된다는 걸 홍보해 인식 변화 및 제도화를 이끌어내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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