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평원의 고가약 삭감탓에 의료기관들 정상치료 '난색'
항체 혈우병 환자들에 대한 고가약 처방을 최소화시키려는 심평원의 진료비 삭감 내지는 무리한 행정지도로 인해, 의료기관들마저 고가약의 삭감이 두려워 너도나도 이들 환자들에 대한 정상적인 치료를 기피하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이 더 해가고 있다.이제는 ‘삭감예고’까지?
지난 2월말 울산광역시에 사는 항체 혈우병 환자 김 모(32)씨는 이 지역의 모 대학병원에 무릎관절 부위의 출혈증상으로 입원한 지 이틀째 되는 날 병원측으로부터 청천벽력같은 통보를 받았다.
심평원에서 김씨에게 고가의 항체 혈우병 치료제인 훼이바(FEIBA)를 투여하면 삭감하겠다는 ‘삭감예고(?)’ 통보를 해와서 더 이상 훼이바를 처방해줄수 없으며 저가의 대체제제인 그린모노만을 투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하지도 않았고, 물론 진료비를 청구하지도 않았는데 미리부터 삭감을 하겠다고 예고를 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씨와 그의 주치의는 그동안의 치료경험을 통해 8인자에 대한 억제인자를 갖고 있는 김씨에게 그린모노가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서 정상적인 치료를 받을 수 없다고 판단, 결국 서울에 있는 혈우재단에서 치료받도록 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퇴원 후 서울로 올라오기까지 약 2주간 치료를 받지 못한 김씨는 재출혈이 계속되는 등 증상이 계속적으로 악화돼, 처음에 제대로 치료를 받았으면 쉽게 끝났을 것을 이제는 정형외과 수술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까지 치닫고 말았다.
심평원 “삭감 예고한 사실 없다”
이에 분개한 김씨는 19일 "청구도 하기전에 삭감예고를 당해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퇴원해야 했다"며 불편한 몸을 이끌고 보호자들과 직접 심평원을 항의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심평원측은 환자와 병원측이 주장하는 ‘삭감 예고’ 발언에 대해 “그같은 발언을 한 사실이 없다”며 이를 극구 부인했다.
이 환자의 심사를 담당한 심평원 관계자는 “당시 환자 김모씨가 입원한지도 몰랐으며 그 전에 진료를 받은 1월달 청구분에 대해 병원측이 응고인자수치 검사결과를 불성실하게 보내와 이에 대해 향후 제대로 된 자료요청을 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다만 저가로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을 뿐인데, 병원측이 이를 사전 삭감에 대한 협박처럼 오해한 것 같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직접 이 담당자와 통화를 했다는 병원의 심사과 직원은 그가 분명하게 “마지막 경고다. 응고인자 수치가 20BU/ml도 되지 않는데 이는 일반인에게도 나올 수 있는 수치이니까 투여량을 줄이든가 (그린모노 등) 대체제제를 사용해라. 안 그러면 삭감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씨의 주치의 역시 “교과서에 따르면 10BU/ml을 넘으면 훼이바를 쓰도록 돼 있는데, 당시 이 환자 수치는 15BU/ml정도로 그 나마 250BU/ml까지 올라가던 것을 훼이바 투여로 낮춰놓은 상태였다”며 “관련 논문까지 첨부하면서 응고인자수치에 대한 검사결과를 모두 보냈는데 자료를 불성실하게 보냈느니, 20BU/ml이 안 되니 훼이바를 쓰지 말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고 전해들었다”며 반발했다.
“삭감 두려워 응급환자만 치료하겠다”
더 큰 문제는 심평원의 삭감위협으로 인해 항체혈우병 환자에 대한 정상적인 진료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이 곳 대학병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에는 서울 지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고가약의 항체 혈우병 치료제를 다루던 한 대학병원이 혈우병 환우회측에 사실상 “응급환자가 아니면 진료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한 어이없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공문에서 병원측은 “진료비 심사가 강화되면서 혈우병환자의 진료비가 고액 삭감되고 있어 병원 운영에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부득이 응급진료를 요하는 혈우병 환자에 대한 치료만 가능하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나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응급상황이란 출혈로 인해 환자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평소에 별다른 상처가 없이도 관절과 근육내부 출혈로 관절이 굳어지고 보행이 어려워지는 혈우병 환자들로서는 사실상 장애 상태로 가는 것을 알고도 기다려야 하는 처지인 셈이다.
혈우병환우회인 한국코헴회 관계자는 “김 모씨의 사례와 관련해 심평원 책임자를 만나본 결과 이들이 혈우병 제제에 대한 약품의 특징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면서 “이같은 의학적 근거가 없는 무리한 행정지도로 환자들과 의료기관의 피해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며 분개했다.
반면에 심평원측은 훼이바를 쓰지 못하도록 한 바 없으며, 항상 전문적이고 의학적인 타당성에 근거해 심사를 하고 있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견지하고 있다.
의학적인 적정성에 대한 논란은 물론 전문가들의 몫이겠지만,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의료기관이 환자를 기피할 수밖에 없는 불법적 상황으로 몰아가는 현재의 심사방식에 대해서도 '심사와 조정'이 필요하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