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협력병원 김정룡 원장 "사랑에 국경은 없습니다"
"막 판문점을 넘어왔습니다. 잠깐 숨 좀 돌리고 내일은 대구로 봉사 갑니다."
구로에서 만난 김정룡 원장은 방금 판문점을 넘어왔다고 웃어보였다. 개성협력병원장을 맡고 있는 김 원장, 남북을 일주일 간격으로 오가는 몇 안되는 사람이다.
국제의료봉사단체인 그린닥터스가 개성에서 무료 진료를 시작한 것은 2005년도. 북한 주재 의사를 찾지 못해 진료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차에 김정룡 원장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나를 찾는 곳에 남겠다" 개성 상주 이유는
당시 그린닥터스의 의료진이래야 10여명 남짓. 일주일이나 한달 간격으로 돌아가면서 진료를 '땜빵'했지만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한계에 도달했다. 정기적인 진료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무엇보다 상주하는 의사가 필요했던 것.
김 원장도 개성에 머물며 진료를 봐달라는 말에 처음엔 고민도 많았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야 하는 삶이 쉽지는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2005년은 가족들과 함께 인도에서 생활하던 때인데 그린닥터스에서 개성병원에서 봉사를 해달라고 요청하더군요. 1년을 숙고하다가 수락했어요."
누군가에게 소용이 되는 삶을 살게 된다면 그것으로도 보람있고 가치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개성에서의 경험이 언젠간 값진 의미로 다가오는 날이 올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개성 진료 봉사는 올해로 6년 째. 남북한 공단 근로자 5만여명의 건강을 돌보느라 일상은 늘 바쁘다. 9시부터 진료를 시작해 하루 평균 남측 20~30명의 환자를 진료한다. 북측 환자도 간간히 찾아온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개성에서 진료를 보고 토요일 오후나 돼서야 판문점을 넘는다. 휴식에 주어진 시간은 일요일까지 이틀. 그 시간도 녹록하지는 않다. 대구에 위치한 외국인 무료 진료소에서 봉사를 하거나 강연에 나서기 때문이다.
협력병원에서 진료를 하고 받는 돈이래야 사실상 '교통비' 수준.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냐는 질문에 "무소유 수준으로 딱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사는데다가 개성에 있으면 별로 돈 쓸일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 위해 인생 걸겠다" 역마살 인생의 시작은
일주일 간격으로 북한과 남한을 오가는 삶. 현재 그의 인생은 사실 '과거' 역마살 인생의 연장선 상이다.
1999년 두 아들, 아내와 함께 훌쩍 인도 콜카타(Kolkata)로 가버렸다. 캘커타대학교가 김 원장을 연구자로 초청한 것. 이를 계기로 아예 인도에 새 둥지를 틀기로 결심을 했다.
"의대 시절부터 사람을 위해 인생을 투자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인도행을 기회라 생각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말라리아와 풍토병을 연구하며 60살까지 인도에서 봉사하자는 생각을 했다. 의료 선교를 통해 과거 한국이 세계에 빚진 지원의 손길을 갚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린닥터스의 부름이 있기까지 7년간 인도 생활을 나름 즐겼다. 그렇게 봉사는 그의 소명이자 '성격'이 된 것.
생계 문제로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봉사 활동에서 보람을 느끼는데다가 어려운 시기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는 그. 김 원장은 정작 도움만 받고 사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웃어보였다.
언제까지 봉사 인생이 이어질까.
"사람들이 종종 봉사 활동이 힘들지 않냐고 묻습니다. 전 오히려 봉사활동을 즐기는데도요."
예순살까지 봉사에 매진하겠다는 생각은 아직도 견고하다. 즐기는 자의 여유다.
구로에서 만난 김정룡 원장은 방금 판문점을 넘어왔다고 웃어보였다. 개성협력병원장을 맡고 있는 김 원장, 남북을 일주일 간격으로 오가는 몇 안되는 사람이다.
국제의료봉사단체인 그린닥터스가 개성에서 무료 진료를 시작한 것은 2005년도. 북한 주재 의사를 찾지 못해 진료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차에 김정룡 원장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나를 찾는 곳에 남겠다" 개성 상주 이유는
당시 그린닥터스의 의료진이래야 10여명 남짓. 일주일이나 한달 간격으로 돌아가면서 진료를 '땜빵'했지만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한계에 도달했다. 정기적인 진료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무엇보다 상주하는 의사가 필요했던 것.
김 원장도 개성에 머물며 진료를 봐달라는 말에 처음엔 고민도 많았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야 하는 삶이 쉽지는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2005년은 가족들과 함께 인도에서 생활하던 때인데 그린닥터스에서 개성병원에서 봉사를 해달라고 요청하더군요. 1년을 숙고하다가 수락했어요."
누군가에게 소용이 되는 삶을 살게 된다면 그것으로도 보람있고 가치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개성에서의 경험이 언젠간 값진 의미로 다가오는 날이 올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개성 진료 봉사는 올해로 6년 째. 남북한 공단 근로자 5만여명의 건강을 돌보느라 일상은 늘 바쁘다. 9시부터 진료를 시작해 하루 평균 남측 20~30명의 환자를 진료한다. 북측 환자도 간간히 찾아온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개성에서 진료를 보고 토요일 오후나 돼서야 판문점을 넘는다. 휴식에 주어진 시간은 일요일까지 이틀. 그 시간도 녹록하지는 않다. 대구에 위치한 외국인 무료 진료소에서 봉사를 하거나 강연에 나서기 때문이다.
협력병원에서 진료를 하고 받는 돈이래야 사실상 '교통비' 수준.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냐는 질문에 "무소유 수준으로 딱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사는데다가 개성에 있으면 별로 돈 쓸일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 위해 인생 걸겠다" 역마살 인생의 시작은
일주일 간격으로 북한과 남한을 오가는 삶. 현재 그의 인생은 사실 '과거' 역마살 인생의 연장선 상이다.
1999년 두 아들, 아내와 함께 훌쩍 인도 콜카타(Kolkata)로 가버렸다. 캘커타대학교가 김 원장을 연구자로 초청한 것. 이를 계기로 아예 인도에 새 둥지를 틀기로 결심을 했다.
"의대 시절부터 사람을 위해 인생을 투자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인도행을 기회라 생각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말라리아와 풍토병을 연구하며 60살까지 인도에서 봉사하자는 생각을 했다. 의료 선교를 통해 과거 한국이 세계에 빚진 지원의 손길을 갚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린닥터스의 부름이 있기까지 7년간 인도 생활을 나름 즐겼다. 그렇게 봉사는 그의 소명이자 '성격'이 된 것.
생계 문제로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봉사 활동에서 보람을 느끼는데다가 어려운 시기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는 그. 김 원장은 정작 도움만 받고 사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웃어보였다.
언제까지 봉사 인생이 이어질까.
"사람들이 종종 봉사 활동이 힘들지 않냐고 묻습니다. 전 오히려 봉사활동을 즐기는데도요."
예순살까지 봉사에 매진하겠다는 생각은 아직도 견고하다. 즐기는 자의 여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