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에게 한국은 지옥…다 내려놓고 떠나고 싶다"

발행날짜: 2012-05-31 12:06:45
  • 사무장병원 늪에 빠져 행정처분만 6번 "복지부는 보복부"

"한국의 의료제도라면 신물이 난다. 소송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 귀화가 안된다면 정치적 망명까지 고려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오성일 원장(50·계양 서울실버요양병원장)의 눈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1년 전 사무장병원의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정부와 끝까지 싸우겠다던 의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성일 원장
그는 지난 2006년 사무장병원에 몸을 담았다가 자진신고하고 의사협회와 복지부에 SOS를 요청했다.

하지만 건강보험공단의 진료비 환수와 병원 부채 등 약 38억원에 가까운 빚만 짊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실수를 후배 의사들이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사협회 산하 사무장병원 척결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사피모(사무장병원 피해 의사회원들의 모임)를 결성해 대책 마련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지난 29일, 진료를 마치고 나온 오 원장의 얼굴엔 초췌함만이 가득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의료 독재국가' '의사에겐 북한보다 못한 나라' '의사에겐 지옥'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자신을 '군부독재 시절 정부의 탄압을 받는 양심수 혹은 정치범'과 같은 신세라고 했다.

또 복지부, 검찰, 경찰 심지어 헌법재판소까지 모두 의사 죽이기에 동참하고 있는 '한통속'이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얼마 전부터 많이 지쳐 있었다.

그는 마지막 희망으로 캄보디아, 미얀마 등에서 해외 의료봉사를 하며 남은 여생을 마치고 싶어 했다.

개발도상국에서 국위선양을 하며 한국에서 짓밟힌 의사의 자존심을 되찾고 싶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에게는 용납되지 않았다. 여권기간 연장을 위해 방문한 구청에서 그의 신분에 문제가 있다며 경찰에 신원조회를 요청했고, 결국 장기간 출국금지 상태라는 것을 확인했다.

관할 구청 직원은 일주일 해외여행은 가능하지만 그 이상 장기체류는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오 원장의 마지막 희망조차 꺾인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오 원장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일까.

알고 보면 오 원장은 의사로서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인재다.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까지 마쳤으며 서울대병원에서 산부인과 수련을 받았다.

이후 모 여성병원에서 3년간 봉직 경험을 쌓은 후 산부인과를 개원, 7년간 큰 문제없이 잘 지냈다.

변화가 있다면 분만건수가 감소해 예전보다 병원 경영이 어려워졌다는 점 정도다. 잠시 임신중절수술에도 눈을 돌려봤지만 종교적 신념 때문에 그만 뒀다.

그는 양심에 꺼린 진료를 하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의사였다.

하지만 무심코 발을 내딛은 사무장병원장으로 근무했다는 이유로 수십억원의 빚더미 신세로 전락했다. 사무장병원이라는 늪은 생각보다 더 깊었다.

사무장병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시 사무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오히려 무고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재기를 노려봤지만 다른 요양병원 개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건물주와 법적분쟁이 발생했다.

오성일 원장
악재는 겹쳐서 온다고 했던가.

그는 불과 1~2년 사이에 의사면허정지 4건, 의사면허취소 1건, 업무정지 1건 등 각종 행정처분을 받았다. 현재 그는 행정소송 4건 이외에도 형사소송 2건도 진행중이다.

한번은 갑자기 그만 두겠다는 의사를 설득하는 중에 보건소에서 의료인 수 변경 신고를 늦게 했다며 업무정지 1개월 처분을 내렸고, 또 한 번은 보건소 직원의 실수로 허위청구를 한 의사로 오해받아 면허취소가 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심지어 보건소에서 의사 면허자격정지 통지서를 이전에 근무했던 병원으로 보내는 실수를 해 자격정지 사실을 모르고 진료한 것을 두고 의사면허취소 처분을 받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계속되는 행정처분으로 피해의식이 생긴 탓일까. 그는 "복지부의 보복성 조치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한번은 보건소 직원이 단순 착오청구를 모두 허위청구로 판단했고, 그렇게 몇 차례 거듭되자 나는 상습 사기범이 돼 있었다"면서 "우리나라 정부는 왜 이렇게 의사죽이기에 혈안이 돼 있는지 모르겠다"고 씁쓸해 했다.

그는 이어 "1년 1만 건에 가까운 진료건수 중에 문제가 된 착오청구가 49건에 불과한데 이를 허위청구라고 하면 너무 가혹한 게 아니냐"고 항변했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놨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그냥 해외로 나가 의료봉사하면서 살고 싶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심도 없다. 이 지긋지긋한 한국의 의료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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