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국민에게 의료선택 제한 알려라"

허대석 교수
발행날짜: 2012-06-25 11:25:52
  • 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 "포괄수가 간과한 것 많다"







의료서비스를 규격화해 건강보험 재정을 관리하겠다는 '관리의료(managed care)'의 대표적인 정책이 포괄수가제이다. 새로운 제도 도입과 관련해 수가, 의료의 질 등에 대한 논의는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만 환자-의사 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한 검토는 미미하다.

첫째, 의료의 특성인 '불확실성'으로 야기되는 문제이다.

치질이나 백내장의 경우 진단이 불확실하거나 예상 외의 수술합병증이 발생하는 경우는 적다.

반면, 충수돌기염(맹장염)이나 출산에는 불확실한 부분이 상대적으로 많다.

맹장염 의심 환자의 일부에서 오진을 피할 수 없고, 수술 합병증이 발생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고, 출산에는 치명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의료분쟁도 자주 야기된다.

정부 방침에 따라 포괄수가 대상 질환을 확대하면 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한 예로 신포괄수가 시범사업에 포함된 폐암을 검토해보면, 일반 X-ray에서 폐암이 의심되는 100명의 환자들이 CT 및 PET 촬영을 하고 조직검사로 암으로 확진되는 경우는 40명에 불과하다(국내 연구결과).

포괄수가제는 최종진단을 기준으로 결정되므로 폐암으로 확진된 40% 환자는 '호흡기계 신생물' 수가로 보상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경증 질환으로 판명되는 60명은 '호흡기계 질환을 위한 진단적 시술'로 비용청구는 가능하겠지만 과잉진료를 했다고 검사비 중 상당부분을 의료기관이 부담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정책 관련 실무자는 폐암이 아닌 환자에 대해서는 '의사가 환자를 설득해서 CT나 PET검사를 하지 않으면 문제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폐암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어느 환자가 폐암으로 확진될지를 사전에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한편, 진료비 삭감 우려로 일반 X-ray 상 애매한 소견을 보이는 환자에게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가 수개월이 지나 더 악화된 상태에서 폐암으로 확진되면 환자는 첫 진료를 맡았던 의사를 원망할 것이고, 때로는 오진을 했다고 법적 문제까지 제기할 것이다.

포괄수가제 강제 실시에 앞서 정부는 수가에 포함되는 의료기술의 범위와 이에 수반되는 책임문제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둘째로 고려해야할 점은 '가치'의 문제이다.

정부가 정한 규격화된 의료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하고, 비용부담이 있을지라도 신약이나 첨단의료기술로 진료받기를 원하는 환자나 보호자의 요구에 대해 의료진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윤리적인가?

한 예로, 암 조기검진을 위해 건강보험공단에서 추천하는 검사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수백만원의 비용을 본인이 부담하고 보다 정밀한 건강검진을 매년 받기를 원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사람마다 생명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고가의 건강검진을 개인 부담으로 받는 것까지 금지할 방법은 없다.

정부가 포괄수가제를 533개 질환군까지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규격화된 틀에서 의료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설명해야 한다.

이와 함께 이에 만족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추가적인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 유무와 그 방법에 대해 구체적인 원칙을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환자-의사간의 '신뢰' 문제이다.

지금도 여러 의료기관을 다니면서 반복된 검사와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가 많다.

과잉진료를 하는 의사들 때문에 포괄수가제를 실시하겠다고 정부가 전제한다면, 포괄수가제가 실시되면 의료기관이 원가절감을 위해 과소진료를 하는 것은 아닌지 국민들은 또 다른 불신을 품게 될 것이다.

때로는 복잡한 검사를 하지 않고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신체 진찰만으로도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고, 특별한 약물처방 없이 안심해도 된다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환자들이 호전되기도 하는 것이 의료의 특수성이다.

히포크라테스선서에서 의료행위는 'art'라고 표현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의술'로 번역되었는데, 의료기술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의료는 공산품과 달리 개인차로 인한 불확실성을 피할 수 없어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또 포괄수가제로 고가의 신약, 첨단의료기술에 대한 국민의 의료선택권이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정부는 국민들에게 설명할 의무가 있다.

정부가 이런 책임을 회피한다면, 환자-의사간에 많은 갈등이 발생해 사회는 '불신비용'을 크게 부담해야 할 것으로 우려된다.

포괄수가제를 선진국처럼 도입하기를 원한다면, 환자-의사관계를 심각한 수준으로 훼손하고 있는 우리 의료제도의 모순을 선진국 수준으로 개선하는 노력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관련기사

오피니언 기사

댓글

댓글운영규칙
댓글을 입력해 주세요.
더보기
약관을 동의해주세요.
닫기
댓글운영규칙
댓글은 로그인 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으며 전체 아이디가 노출되지 않습니다.
ex) medi****** 아이디 앞 네자리 표기 이외 * 처리
댓글 삭제기준 다음의 경우 사전 통보없이 삭제하고 아이디 이용정지 또는 영구 가입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1. 저작권・인격권 등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
2. 상용프로그램의 등록과 게재, 배포를 안내하는 게시물
3. 타인 또는 제3자의 저작권 및 기타 권리를 침해한 내용을 담은 게시물
4. 욕설 및 비방, 음란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