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 의식주(주 편) '점 삼 평'

배고은
발행날짜: 2014-05-13 10:54:11
  • 경희대 의전원 3학년 배고은 씨

공간, 아무것도 없는 빈 곳.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소유욕의 존재가 역설적임과 함께 해학적이듯, 공간은 단어조차 매력적인 무(無)존재이다. 그 곳은 채운다, 꾸민다, 존재 한다 등의 여러 행동에 따라 신체가 아닌 제2의 '나'를 존재하게 하거나, '나'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기본 조건이어서 일지도 모른다. 공간에도 유행이 있는데, 사생활 중심에서 대형공간으로의, 유니버설(universal)한, 친환경적인 등 아무것도 없음의 기능과 성질이 바뀌기도 한다. 없다는 것에 성질이 존재하는 모순의 사고가 허용되는 '공간'은 굉장히 매력적이고 유의미하다.

나는 공간을 사모한다. 아키텍쳐(architecture)에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건축가도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고, 선호하는 구조나 미쟝셴(mise en scense)도 뚜렷하다. 한동안은 노출콘크리트 구조에 푹 빠져 시멘트 향이 나는 지하 주차장을 좋아했고, 대학교 때 가고 싶은 교환 학교도 건물을 보고 결정했다. 건축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지내보다 보니 건축을 업으로 삼기보다는 나중에 내 집 마련할 적에 직접 기획에 참여하는 쪽으로 공간에 대한 예를 갖추기로 하고 지금은 잠시 본업에 뛰어들어 있는 중이다.

공간의 조형은 물론 공간 자체에 빠져있지만 사실, 대학 기숙사를 사용할 무렵부터 나만의 공간은 내게 먼 이야기였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방 한 칸은 마련할 줄 알았더니, 덥석 의전원에 붙어버려서 서울에서 언니동생과 전셋집에 살게 되었다. 덕분에 정말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서로가 있어서 이건 뭐 사생활은 고사하고 벽 하나도 내 맘대로 꾸밀 수 없어 화가 날대로 난 상태이다.

그렇게 욕구불만이 쌓여 터지기 간당간당할 즈음 내 갈망은 주기적으로 해소가 되었는데, 바로 의전원 시험기간 때였다. 나는 매 시험기간만 되면 이민이라도 가는 것 마냥 트렁크 가방에 옷가지를 챙겨 넣고 학교 근처 고시원으로 옮기곤 했다. 통학 2시간이 부담스럽거니와,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혹시 감기 같은 게 걸려서 시험기간을 내 저조한 컨디션으로 지내면 안 되기 때문에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조그만 고시원 생활을 감수하는 것이다.

사실은, 각설하고 내 공간을 일시적으로라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더 의미가 있겠다. 내 공간이라니! 꼬질꼬질한 싱글 침대 하나에, 어제 신문에서는 종말을 고한 정육면체 볼록 TV와 냉동고가 따로 없어 조절 잘 하지 않으면 온통 얼어버리는 냉장고가 전부인 그 곳. 어쩌면 나는 모르고 싶은 작은 생명체와 함께 쓰고 있는 공간이겠지만, 대외적으로 30여일 남짓한 기간 동안은 공기까지 내 것이기에 기꺼이 70년 대 단칸방을 떠올릴 수 있는 이곳을 택한 것이다. 덕분에 시험기간이 나에겐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한 정신과 논문에 따르면, '매슬로의 욕구 단계' 중 최상위인 자아실현의 욕구단계에 공간이 포함되어있다고 한다. 생리적인 욕구는 물론이거니와 상위 계층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에게 공식적인 개인 공간이 주어지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무엇보다 '존중의 욕구'에서, 내 자신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나를 물리적 및 심리적으로 보호해야할 영역, 즉 공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가끔 의학 공부를 하고 있을 때면 내가 누구인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친구들은 이미 직장에 다니면서 멋있게 살고 있는데, 아직 학업밖에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의심이 고개를 든다. 그때마다 술과 같은 향락을 통해 두려움을 회피하려 하지만, 결국에는 조용히 방에 틀어박혀 나를 뒤돌아보며 스스로를 존중하는 일련의 의식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고, 또 욕구를 해소했던 것이다.

아마 별일이 없다면, 나는 곧 졸업을 하고 인턴이, 레지던트가 될 것이다. 그 때는 훨씬 바빠서 내 존재가, 내 가치가 허무하게 느껴질 날들도 더 많을 것이다. 그만큼 바쁜 와중에도 딱 5분 짬을 내어 조용히 나를 존중해야 하는 의식이, 그리고 공간이 필요하다 믿는다. 어렸을 적, 한동안 푹 빠져있던 아지트를 다시 만들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말 나온 김에 이번 시험이 끝나고 다음 실습기간 동안, 병원 구석구석을 탐방을 할 계획이다. 내 키가 160cm니까 딱 내 한 몸 누울 수 있도록 가로 50cm * 세로 180cm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점 삼 평(0.3)의 공간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일단은 공부를 해야겠다, 별 탈 없이 졸업은 하고 봐야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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