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의 이유요? 고통에 익숙해진 아이들을 보세요"

발행날짜: 2014-09-30 05:50:00
  • '러브위더스' 필리핀 의료봉사 48시간 동행기…"고생의 끝은 보람"

마닐라 공항에 내리자 습하고 탁한 공기가 엄습해 온다. 매캐한 매연 냄새가 폐부를 찌르고 나서야 진짜 필리핀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난다.

26~27일 필리핀 마닐라 파라냐크에서 열린 비영리민간단체 'Love with Us' 주최의 의료 봉사를 동행했다. 처음 봉사활동 동행 취재를 제안 받았을 때는 "그까짓 거"라는 생각에 쉽게 동의를 했지만 생각보다 필리핀의 문턱을 넘기는 쉽지 않았다.

문제는 필리핀 보건성이 이번 봉사활동에 OK 싸인을 내렸지만 약을 담당하는 필리핀 식약청(BFAD)은 한국에서 가져온 약물은 사용할 수 없다고 못을 박으면서부터 발생했다.

출국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 봉사단원들은 매년 봉사활동 승인을 받고 출발했지만 이번엔 무슨 이유에선지 필리핀 식약청이 약품의 반입을 금지하고 나섰다.

빈손으로 갈 수는 없을 터. 공항에 모인 단원들이 십시일반으로 약품을 짐가방에 나눠 실었다. 마닐라 공항에서 반입이 금지된다면 현지에서 직접 약품을 구매해 조달하는 수밖에 없다.

필리핀 공항에 내린 단원들이 가슴을 조리며 순차적으로 검색대를 통과했다. 가방 검색과 약품 압수에 대비해 "This is household medicine for volunteer activity team"(봉사활동을 위해 챙긴 짐입니다)라는 문구도 서로 외워두고 있었다.

하늘이 도왔을까. 전원 무사통과. 30명의 단원들이 공항을 빠져나와 서로 짐을 한데 모아보자 약품, 의료 장비, 기념품을 포함해 50여 박스는 족히 넘는 분량이 나왔다.

대절한 버스에 옮겨 싣고 숙소인 크림슨 호텔로 향했다. 여기서 하루를 묶고 내일부터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파라냐크에서 펼친다.

한류 스타가 왔나? 벼락같은 환호성

26일 간단히 조식을 마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숙소 근처에는 고층 건물과 화려해 보이는 쇼핑타운이 들어서 있어 과연 이곳에 의료 봉사가 필요할까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버스가 향한 곳은 숙소에서 20여분 떨어진 파라냐크의 한 수녀원 부속건물. 불과 10여분을 달리자마자 건물의 키가 낮아지더니 그야말로 판자촌이 눈 앞에 펼쳐진다.

몇 년째 보수를 못해 페인트가 다 말라비틀어져 떨어져 버린 지붕, 비만 내려도 바로 새어 버릴 것 같은 그런 판자촌의 미로같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 봉사활동지에 도착했다.

버스가 부속 건물 앞에서 빵! 빵! 경적 소리를 울리자 약속이나 한 듯 철창 문이 두 팔을 벌리듯 활짝 열린다. 딱 버스가 겨우 비집고 들어올만큼만 여유가 생겼다. 몇 번의 전진과 후진을 반복한 끝에 버스의 꼬리부터 마당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이 가장 반긴다. 연신 버스 창가에 대고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지른다. 마치 친한 친구를 아주 오랜만에 만났다는 듯이.

버스에서 내려 둘러보니 그저 사무실 용도로밖에는 쓸 수 없는 방 3개가 딸린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피부가 하얀 단원들이 30명. 그들을 향해 피부가 검은 주민들이 신기한 듯 눈알을 굴린다. 단원들이 먼저 악수를 청한다. 그들의 손이 참 따뜻하다.

오전 9시밖에 안됐는데도 햇살이 뜨거워지고 습기를 머금은 공기마저 탁해진다. 하나 둘씩 동네 개구장이들이 수녀원의 철창 문 사이로 머리를 비집는다. 갓 스무살을 넘겼을까. 아직 앳돼 보이는 미혼모가 두 팔에 아이를 들쳐업고 5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왔단다. 이른 시각인데도 벌써 150명이 훌쩍 넘어섰다.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하면서 앞선 줄을 차지하기 위한 자리 쟁탈전도 치열해진다. 사무실을 개조해 만든 3개의 공간. 내과·소아과·치과·마취통증과·외과·조제실이라 적힌 스티커를 각각의 문 앞에 붙이자 사람들이 진료실을 찾느라 분주해 진다.

수녀님이 마이크를 들고 줄을 서라는 말을 수차례 하고나서야 대열이 차분해진다. 이틀간 의료봉사가 펼쳐진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동네 아이스크림 장수까지 합류했다.

2010년부터 해외 봉사활동에 나섰던 마상혁 과장이 지난 해에는 아예 'Love with Us'라는 민간봉사단체를 만들어 이곳을 찾았다. 올해도 'Love with Us'라는 문구가 새겨진 조끼를 맞춰입고 오니 주민들의 환호성이 마치 한류 스타가 입국한 것을 방불케 한다.

서둘러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간이 침대를 끌고나와 각 방마다 펼쳐놓자 그럭저럭 진료실 모양새가 난다. 수녀님들은 밖에서 간단한 문진 종이를 나눠주고 있다. 의료진들은 진료용 기구를 세팅하느라 분주하다.

알콜솜, 주사기, 앰플이 진료실 한켠에 자리를 잡자 드디어 진료실의 문이 열린다. 40대 중반. 깡마른 남성 환자가 들어온다. 첫 환자다.

마사낏(maysakit)만 알면 만사 OK!

응급의학과 박정숙 의사가 혈압계와 혈당 측정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자리를 잡았다. 그 옆으로 언제나 쾌활하게 웃는 노민현 마취통증과 과장도 통증 환자를 보기 위한 채비를 마쳤다.

첫 진료부터 애를 먹었다. 영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워낙 지역이 낙후된 곳이다 보니 타갈로그어만 할 줄 아는 주민들이 상당수. 통역을 맡은 소셜워커 엠마가 없었으면 큰 일 날뻔 했다.

"What's Your Problem?" 어색하게 첫 진료가 시작됐다. 환자가 멀뚱멀뚱 의사의 눈을 쳐다본다. 잠깐의 침묵. 못 알아들은 눈치다. 엠마가 나설 차례다. 타갈로그어로 증상을 물었다. 코와 입을 연신 가리키며 기침하는 시늉을 한다. 간단하게 커프 커프(cough)를 외치자 그제서야 겨우 증상을 알아차렸다.

두번 째 환자. 깡마른 데다가 양 볼이 움푹 패인 여성. 역시나 커프 커프를 연신 외친다. 말을 할 때 보니 윗니, 아랫니 중 대여섯 개는 자리를 잃었다. 간단한 진찰 후 의료진이 처방전을 주며 조제실로 가라고 하자 동굴같은 입을 아랑곳없이 웃음 꽃을 활짝 피운다.

구름이 심상찮다. 기온은 벌써 27도를 넘어섰다. 공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다 못해 맵다. 족히 20~30년이 된 오토바이와 지프리(짚차를 개조해 만든 대중교통 수단)가 도로에서 시커먼 매연을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찾은 환자들은 대게 감기 증상을 호소하지만 대게는 매연으로 인한 호흡기 질환자가 많다. 천식을 앓아도 기침을 가라앉히는 약조차 사먹을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근처의 파라나크 닥터스 병원이 있지만 주민들에겐 언감생심. 간단한 치료에 1000~2000페소를 지불할 여력이 이들에겐, 아직 없다.

아직 진료에 익숙해지지 않은 까닭인지 통역을 위해 엠마! 엠마!를 외치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린다. 그 호출 소리를 따라 내과와 마취통증과, 외과를 오갔다. 치과 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이가 빠진 사람들이 서로 입을 벌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작년에도 이곳을 찾은 김종길 원장. 그의 앞에 벌써 한 아이가 누워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진료용 헤드라이트에서 나온 불빛이 아이의 입 안을 샅샅이 훑자 마침내 김 원장의 팔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이의 주먹에도 힘이 들어간다. 신음 하나 없다. 마치 고통에는 익숙해졌다는 듯이.

발치와 보존치료에서 고민을 했다던 그는 한시름 놓은 것처럼 편안하게 발치를 한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어차피 병원에 못 가 수년간 통증에 시달릴 바에야 발치를 해서라도 고통만이라도 잊게 해주자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툭. 아이가 빠진 어금니를 슬쩍 보더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달려나간다.

오후가 되자 심상치 않던 먹구름이 굵은 빗방울을 쏟아낸다. 비가 닿지 않는 처마 밑. 바디페인팅을 하는 단원들이 아이들에게 둘러쌓여 있다. 바디페인팅을 해주는 심평원 윤정희 차장의 코와 입에도 검은 물감이 들었다.

다시 마취통증과를 찾았다. 다행히 노민현 과장은 이제 진료의 노하우를 벌써 깨친 것 같다.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의 웃통을 까더니 엄지로 척추 마디를 눌러 내려가며 "마사낏? 마사낏?"(maysakit : 아프다) 외마디 말로 아픈 부위를 찾고 있다. 환자가 마사낏이라고 외친 부위에 정확히 손가락이 멈춘다. 주사기 바늘이 나올 차례다.

성공적인 첫 날. 350명의 환자가 이곳을 찾았다.

"봉사란 주는 것이 아닌 받는 것"

둘째 날. 버스를 탈 때마다 느꼈던 매캐한 냄새의 근원을 알게 됐다. 지나가는 오토바이, 지프리가 시꺼먼 매연을 그야말로 쏟아낸다. 버스 안의 에어컨 필터도 이런 매연을 걸러낼 수는 없다. 어제 본 환자들의 상당수가 까닭 모를 기침과 기관지 염증에 시달리고 있는 이유였다.

부속건물에 도달하자마자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엠마의 말로는 어제 진료가 입소문을 탔다고 한다.

소청과는 마상혁 과장이 맡았다. 아이를 들쳐업고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10대 중후반의 미혼모도 심심찮게 보인다. 이경으로 아이의 귀를 살피던 마 과장이 말을 건넨다. 감염 증상이 아니라 제대로 영양 공급을 받지 못해 아픈 것 같다고.

어차피 의료봉사가 단기간에 그치면 만성질환자와 같은 환자를 치료하는 데 한계가 있지 않냐는 질문을 던지자 현답이 돌아온다. "봉사는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라는. 돌아갈 쯤이면 매년 봉사활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자비를 들여 다시 이곳을 찾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귀띔했다.

올해는 유독 필리핀 식약청의 약품 반입 금지로 애를 먹었다. 이날 마 과장은 근처 병의원을 돌며 다음 봉사활동 때는 장비를 빌려달라고 호소를 했다.

그는 "단지 체계적으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시스템만 필리핀 정부가 만들어 주길 바란다"면서 "실제로 많은 의료봉사 단체들이 허가 문제 때문에 여행을 빙자해 알음알음 봉사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고 덧붙였다.

벌써 얼굴을 익혔다고 밖에 나갈 때마다 아이들이 매달린다. 두 세명이 한꺼번에 목과 팔, 다리에 매달리니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업어달라는 아이, 사진을 찍자는 아이,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는 아이까지.

오락이라곤 맨 땅 바닥에서 고작 제비돌기를 하는 게 전부인 아이들에게 질병은 너무 큰 짐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이들에게 죄가 있다면 단지 가난하다는 것일 뿐.

아이들의 두발은 두 명의 미용사들이 맡았다. 몇몇은 머릿니 때문에 샴푸 치료 후에야 겨우 미용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건네자 서로가 영화 주인공들이나 취할 법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찍기 삼매경에 빠진다. 카메라가 이들에겐 최고의 오락 도구다.

오후 4시가 넘어서면서 차츰 주민들의 행렬도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진료 시간이 막바지에 접어든다. 오늘도 400여명이 진료소를 찾아갔다. 그런데도 단원들의 얼굴에 힘든 기색이 없다.

마무리 인사를 마치고 버스를 올라야 하는 시간인데도 주민들과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장난을 치느라 누구 먼저 버스에 오르는 단원이 없다. 아이들도 서툰 영어로 언제 다시 오냐는 질문을 더듬더듬 이어간다.

단원 중 누군가 "봉사를 하면 주는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을 받고 온다"는 말을 했다. 봉사를 통해 자기 치유와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는 말. 내년에도 이들은 이곳을 다시 찾을 것이다. 타인을 치유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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