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진료, 역지사지의 지혜·전화위복 계기

홍성수
발행날짜: 2014-12-05 05:58:04
  • 홍성수 의료윤리연구회 전 회장

얼마 전 유명 연예인 사망 사건에 이어 음주 상태에서 응급실에 내원한 소아 환자에게 멸균 수술용 장갑도 착용하지 않고 봉합수술을 한 전공의 사건으로 사회와 언론의 곱지 않은 시선에 노출이 되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정부의 행정조치와 정치권의 입법 추진이 이어진다고 한다. 사안 자체만 놓고 볼 때 유구무언이며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안타깝지만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의사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자. 만약 나 자신 혹은 내 가족 특히, 내 어린 자녀나 조카가 응급실을 찾았는데, 전후 사정이나 이유를 불문하고 술 냄새가 나는 의료진이 치료를 하겠다고 했을 때 그러자고 승낙을 할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내가 꺼리는 일이라면 남에게 해서는 안 되고, 내가 받고 싶은 만큼의 대접을 남에게 해 주어야 한다’는 규범은 동서고금의 황금률, 역지사지의 지혜이다.

당직실에서 응급 호출 전화를 받았을 때, 그리고 당직실에서 응급실로 이동하면서 단 한 번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래서 안타까운 일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사자는 물론, 범 의료계 차원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을 하고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근원적, 구조적, 제도적 원인을 찾아 개선할 방도까지 마련해야 할 것이다.

한편 다수의 관련 기사들을 읽어보면, (근무계획표에 의해 공식적으로)당직도 아니었다는 전공의가 식사 중이었다는 상급 당직자를 대신한 일, 본인이 음주 상태임에도 환자를 보겠다고 나선 일, 상급자들이 음주 사실을 알았을 텐데도 환자 진료를 하도록 위임하거나 지시하거나 방관한 일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부분들이다. 나쁜 일은 별 것 아닌 듯한 몇 가지 판단착오와 무사안일이 겹쳐져서 일어난다지 않는가.

해당 병원에서는 연말 분위기를 감안하여 모든 의료진의 금주조치를 포함, 매우 신속하게 매우 광범위하게 그리고 매우 강력하게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사안의 사회적 파장이 얼마나 무거운지 반증하는 셈이다. 하지만 아쉬운 대목은 동시에 응급실 운용전반이나 전공의 수련 현황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근본 원인에 대한 조사와 재발 방지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급한 불만 끄고 병원 평판만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병원 관리자 의중의 반영일 것이다.

정부가 보건소를 통해 사태를 파악하여 행정처분을 하겠다는 것은 절차 상 그럴 수 있고 과도하거나 부당하다면 법적 다툼을 하면 된다. 실소를 금하기 어려운 일은 새정치민주연합 이 모 의원의 ‘음주 진료행위에 대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는 의료법 개정안’이다. 제일 먼저 떠오른 장면은 과거 국정감사장에서 공무원들을 향해 고성으로 횡설수설하는, 모자이크와 음성변조 처리된 만취한 국회의원의 모습이다. 과연 그때 어느 양심적인 국회의원 한 사람이라도 동료 국회의원의 품위 손상과 직무 부적합을 문제 삼아 처벌 입법을 추진했던 적이 있었던가? 의사이기에 일반 국민 보다 더 엄중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면, 국회의원을 포함한 모든 공직자들은 어떤 잣대로 판단해야 할 것인가? 한 건 주의나 대중영합이 아니라 입법의 취지에 대해 진지하게 한 번 더 생각해 보길 권하고 싶다.

내가 알고 내가 겪어 본 의사 100명 중 96명은 의사로서의 소명이나 책무에 대해 존경할 만 한 직업정신을 갖추고 있다고 확신하고, 2명은 상황의 피해자이며, 마지막 2명 정도가 의사가 아니었으면 싶게 법적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라 생각한다. 다만 주어진 제도와 여건이 그와 같은 선의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 하는 아쉬움과 아픔이 있다. 또한 특정 상황에서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하느냐에 대한 보편적 가치와 규범과 사례에 대한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교육이나 자기성찰의 기회가 너무나 부족한 체로 진료 현장에 내동댕이쳐져 있음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이를 뒤집어 본다면, 이처럼 안타깝고 어처구니 없는 열악한 제도와 여건과 교육 속에서 각 분야별로 이만큼 의료가 지탱되고 있음이 경이로운 기적이다.

요즘 연달아 터져 나오는 의료계의 사건, 사고는 우리나라 의료 현실이 곪을 대로 곪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말기증상일지도 모른다. 이번 사건을 포함하여 그 근원을 잘 살펴 몇 사람의 희생양으로 비켜가는 미봉책이 아니라, 학생 선발이나 의과대학 교육 및 수련 과정부터 의료 전반에 걸친 미래지향적 대안 마련의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간절하게 희망한다. 희망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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