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페인으로 간다
컬럼버스와 플라멩코의 도시 세비야(1)
몬세라트에서 발렌시아를 거쳐 그라나다로 갈 때, 하루를 꼬박 버스로 이동했던 것에 비하면, 따리파에서 세비야까지는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인 셈이다. 가이드가 ’자 출발합니다.’라고 한 것 같은데 버스는 어느새 세비야 시내로 들어선다. 과달키비르 강을 따라가던 버스가 황금의 탑에서 선다. 회색빛으로 우중충한 모습을 보면 전성기에는 황금빛으로 빛났다는 탑의 모습이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다.
황금의 탑은 1220년 이곳을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교도들이 건설하였는데, 탑 위를 황금색의 타일로 장식했기 때문에 황금의 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황금의 탑은 과달키비르 강을 항해하는 배를 검문하기 위하여 세웠다. 강 건너 편에 세운 8각형의 은의 탑 사이에 쇠줄을 치고 통행하는 배를 검문했다는 것이다. 은의 탑은 1755년 대지진에 무너지고 없어 그때의 모습을 재현할 수는 없나보다. 황금의 탑에서 길을 건너면 스페인의 대항해시대를 연 콜럼버스가 영면하고 있는 세비야 대성당이 있다.
▲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경로<출처:위키피디아>(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 이곳에서 세계일주 여행을 출발했다고 해서, 현재는 해양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포르투 출신의 마젤란은 포르투갈 총독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의 함대에 들어가 1509년 벌어진 디우 대전투에 참여했다. 포르투갈은 이 전투의 승리로 인도양 지역의 패권을 아랍인들로부터 빼앗을 수 있었다. 동방에서 돌아온 마젤란은 1517년 10월 세비야에 도착하였고, 1518년에는 포르투갈 국적을 버리고,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1세와 원양탐험에 관한 협정을 맺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519년 9월, 265명이 탄 5척의 배를 이끌고 스페인의 세비야를 출발했다. 마젤란은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다가 항로를 서남쪽으로 돌려 남아메리카의 브라질 해안에 도착했고, 해안을 따라 대서양을 남하하여 태평양으로 들어섰다. 마젤란은 남미대륙의 끝에 있는 해협을 힘겹게 통과하여 태평양에 들어설 수 있었다. 얼마나 힘든 항로였던지 마젤란은 평화로운 모습의 바다에 감명을 받아 태평양(The Pacific Ocean)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또한 후세의 사람들은 그 험난한 해협에 마젤란의 이름을 붙여 그를 기념하고 있다.
태평양으로 들어선 마젤란은 남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폴리네시아제도, 괌을 경유하여 현재의 필리핀에 도착했다. 나중에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2세(Phillip II)의 이름을 따서 붙인 나라 이름이다.
필리핀의 세부에 도착한 마젤란은 원주민 여추장 아미안을 설득해서 개종시키고, 아기예수상을 전했는데, 그의 운명은 여기까지였던 모양이다. 1521년 4월 27일 마젤란 일행이 상륙한 막탄섬의 라푸라푸 추장은 싸움을 걸어왔고, 이 전투에서 마젤란이 죽자 함대는 섬에서 퇴각하고 말았다.
마젤란이 죽은 다음에는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Juan Sebastian Elcano)가 함대를 이끌었다. 함대는 인도네시아와 호주 사이를 빠져나와 인도양 남쪽을 항해하여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세비야로 돌아갔다. 마젤란은 5척의 배를 이끌고 세비야를 떠났지만, 항해하는 동안 반란이 일어났고, 폭풍을 만났으며, 원주민과 전투도 치르는 고난이 이어졌기 때문에 엘카노가 세비야로 돌아왔을 때는 1척의 배에 겨우 18명이 타고 있었을 뿐이었다. 1522년 9월의 일이다. 배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도는데 3년이 걸린 셈이다.
우리는 흔히 세계 일주에 처음 성공한 사람을 마젤란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첫 번째 항해에 나선 마젤란이 필리핀에서 죽었기 때문에 세계 일주를 완성하지는 못한 셈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18명을 추슬러서 무사히 세비야로 돌아온 엘카노야 말로 세계 일주를 처음 완성한 사람이라는 명예를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마젤란이 선단을 이끌고 세비야를 떠난 것은 세계일주가 목표가 아니라 향신료를 찾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엘카노는 마젤란이 죽은 다음에 남은 배에 향신료를 가득 싣고 스페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하니, 마젤란이 처음 돛을 올렸을 때의 목표를 제대로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대서양을 건너 인도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은 마젤란이 알메이다 함대에서 활동하면서 말라카제도 너머로 아메리카대륙에 닿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대서양을 서쪽방향으로 가도 인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컬럼버스의 생각에서 비롯된 셈이다.
지금은 스페인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 세비야는 1492년 이사벨여왕과 페르난도왕이 레콘키스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다음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세비야로 돌아오자, 신대륙으로 가는 배의 출항과 무역의 독점권을 차지한 세비야에서 기회를 엿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결과 16세기 말경 세비야는 스페인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다. 박정은 작가는 '스페인 소도시 여행'에서 콜럼버스의 출항에 얽힌 이야기를 재미있게 적고 있다.
컬럼버스 이후 불어 닥친 신대륙 열풍의 과실은 세비야가 독차지 했지만, 컬럼버스의 꿈은 세비야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팔로스 데 라 프론테라에서 영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 있는 라비다 산타 마리아 수도원에서 항해계획을 세웠고, 이사벨여왕을 만나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대서양으로 나가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인도에 다다를 수 있고, 스페인은 큰 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한 것도 이 수도원이라고 한다. 인류 역사에 엄청난 변곡점이 된 콜럼버스의 항해가 사실을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신기하다.
팔로스 데 라 프론테라(Palos de la Frontera)에 가면 찾아오는 이는 별로 없지만, 수도원 뒤편 강가에 컬럼버스가 타고 간 대형 갈리온선 산타마리아(Santa Maria)호, 소형 범선 핀타(Pinta)호, 그리고 산타클라라(Santa Clara)호가 복원되어 있고, 당시의 항해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인 콜럼버스는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가는 항로가 아니라 대서양을 건너 서쪽으로 가도 인도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이미 보편화된 지구구형설(地球求刑說)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문제는 항해에 들어갈 막대한 자금이었다. 콜럼버스는 1485년과 1488년 두 차례에 걸쳐 포루투갈의 왕 후앙2세를 만나 후원을 부탁하지만 거절을 당했다. 아마도 아프리카해안을 돌아 동방으로 가는 항로를 확보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는 투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콜럼버스는 1486년에는 에스파냐의 이사벨여왕을 만나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지만, 대서양항로에 대한 낙관적 추정과 1.기사와 제독 작위, 2.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총독의 지위, 3.얻은 총 수익의 10분의 1일, 등 콜럼버스의 요구가 지나치다는 이유로 역시 거절을 당했다. 레콘키스타에 매진하고 있던 이사벨여왕으로서는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수월치 않았을 것이다.
▲ 콜럼버스의 항해경로<출처:위키디피아>(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하지만 1492년 1월 레콘키스타를 완수한 이사벨여왕으로서도 이웃나라 포르투갈이 해외에서 승승장구하도록 더 이상 내버려둘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협상을 유지해온 콜럼버스와 손을 잡는 대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1492년 8월 3일 90명의 선원을 이끌고 팔로스 데 라 프론테라를 출항한 콜럼버스는 2달여의 항해 끝에 10월 12일 아침 현재의 바하마 제도(Bahamas)에 도착했고, 처음 발을 딛은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의 섬; 원주민들은 과나하니(Guanahani)라고 불렀다고 한다)라고 칭하였다.
콜럼버스는 1492년부터 1503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신대륙을 왕래했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콜럼버스는 신대륙의 원주민에게 가톨릭을 전파하고 또한 금을 채굴하고자 했지만,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하자 원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유럽으로 싣고 와 노예로 삼았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항해는 북미대륙과 남미대륙의 발견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며, 그 배경에는 앞서 그라나다의 알람브라궁전에서 소개한 워싱턴 어빙이 '콜럼버스, 1828'과 '콜럼버스의 일행등, 1831'을 통해서 지나치게 미화한 때문이라고 한다.
몬세라트에서 발렌시아를 거쳐 그라나다로 갈 때, 하루를 꼬박 버스로 이동했던 것에 비하면, 따리파에서 세비야까지는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인 셈이다. 가이드가 ’자 출발합니다.’라고 한 것 같은데 버스는 어느새 세비야 시내로 들어선다. 과달키비르 강을 따라가던 버스가 황금의 탑에서 선다. 회색빛으로 우중충한 모습을 보면 전성기에는 황금빛으로 빛났다는 탑의 모습이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다.
황금의 탑은 1220년 이곳을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교도들이 건설하였는데, 탑 위를 황금색의 타일로 장식했기 때문에 황금의 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황금의 탑은 과달키비르 강을 항해하는 배를 검문하기 위하여 세웠다. 강 건너 편에 세운 8각형의 은의 탑 사이에 쇠줄을 치고 통행하는 배를 검문했다는 것이다. 은의 탑은 1755년 대지진에 무너지고 없어 그때의 모습을 재현할 수는 없나보다. 황금의 탑에서 길을 건너면 스페인의 대항해시대를 연 콜럼버스가 영면하고 있는 세비야 대성당이 있다.
▲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경로<출처:위키피디아>(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 이곳에서 세계일주 여행을 출발했다고 해서, 현재는 해양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포르투 출신의 마젤란은 포르투갈 총독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의 함대에 들어가 1509년 벌어진 디우 대전투에 참여했다. 포르투갈은 이 전투의 승리로 인도양 지역의 패권을 아랍인들로부터 빼앗을 수 있었다. 동방에서 돌아온 마젤란은 1517년 10월 세비야에 도착하였고, 1518년에는 포르투갈 국적을 버리고,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1세와 원양탐험에 관한 협정을 맺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519년 9월, 265명이 탄 5척의 배를 이끌고 스페인의 세비야를 출발했다. 마젤란은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다가 항로를 서남쪽으로 돌려 남아메리카의 브라질 해안에 도착했고, 해안을 따라 대서양을 남하하여 태평양으로 들어섰다. 마젤란은 남미대륙의 끝에 있는 해협을 힘겹게 통과하여 태평양에 들어설 수 있었다. 얼마나 힘든 항로였던지 마젤란은 평화로운 모습의 바다에 감명을 받아 태평양(The Pacific Ocean)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또한 후세의 사람들은 그 험난한 해협에 마젤란의 이름을 붙여 그를 기념하고 있다.
태평양으로 들어선 마젤란은 남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폴리네시아제도, 괌을 경유하여 현재의 필리핀에 도착했다. 나중에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2세(Phillip II)의 이름을 따서 붙인 나라 이름이다.
필리핀의 세부에 도착한 마젤란은 원주민 여추장 아미안을 설득해서 개종시키고, 아기예수상을 전했는데, 그의 운명은 여기까지였던 모양이다. 1521년 4월 27일 마젤란 일행이 상륙한 막탄섬의 라푸라푸 추장은 싸움을 걸어왔고, 이 전투에서 마젤란이 죽자 함대는 섬에서 퇴각하고 말았다.
마젤란이 죽은 다음에는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Juan Sebastian Elcano)가 함대를 이끌었다. 함대는 인도네시아와 호주 사이를 빠져나와 인도양 남쪽을 항해하여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세비야로 돌아갔다. 마젤란은 5척의 배를 이끌고 세비야를 떠났지만, 항해하는 동안 반란이 일어났고, 폭풍을 만났으며, 원주민과 전투도 치르는 고난이 이어졌기 때문에 엘카노가 세비야로 돌아왔을 때는 1척의 배에 겨우 18명이 타고 있었을 뿐이었다. 1522년 9월의 일이다. 배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도는데 3년이 걸린 셈이다.
우리는 흔히 세계 일주에 처음 성공한 사람을 마젤란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첫 번째 항해에 나선 마젤란이 필리핀에서 죽었기 때문에 세계 일주를 완성하지는 못한 셈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18명을 추슬러서 무사히 세비야로 돌아온 엘카노야 말로 세계 일주를 처음 완성한 사람이라는 명예를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마젤란이 선단을 이끌고 세비야를 떠난 것은 세계일주가 목표가 아니라 향신료를 찾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엘카노는 마젤란이 죽은 다음에 남은 배에 향신료를 가득 싣고 스페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하니, 마젤란이 처음 돛을 올렸을 때의 목표를 제대로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대서양을 건너 인도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은 마젤란이 알메이다 함대에서 활동하면서 말라카제도 너머로 아메리카대륙에 닿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대서양을 서쪽방향으로 가도 인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컬럼버스의 생각에서 비롯된 셈이다.
지금은 스페인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 세비야는 1492년 이사벨여왕과 페르난도왕이 레콘키스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다음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세비야로 돌아오자, 신대륙으로 가는 배의 출항과 무역의 독점권을 차지한 세비야에서 기회를 엿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결과 16세기 말경 세비야는 스페인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다. 박정은 작가는 '스페인 소도시 여행'에서 콜럼버스의 출항에 얽힌 이야기를 재미있게 적고 있다.
컬럼버스 이후 불어 닥친 신대륙 열풍의 과실은 세비야가 독차지 했지만, 컬럼버스의 꿈은 세비야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팔로스 데 라 프론테라에서 영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 있는 라비다 산타 마리아 수도원에서 항해계획을 세웠고, 이사벨여왕을 만나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대서양으로 나가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인도에 다다를 수 있고, 스페인은 큰 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한 것도 이 수도원이라고 한다. 인류 역사에 엄청난 변곡점이 된 콜럼버스의 항해가 사실을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신기하다.
팔로스 데 라 프론테라(Palos de la Frontera)에 가면 찾아오는 이는 별로 없지만, 수도원 뒤편 강가에 컬럼버스가 타고 간 대형 갈리온선 산타마리아(Santa Maria)호, 소형 범선 핀타(Pinta)호, 그리고 산타클라라(Santa Clara)호가 복원되어 있고, 당시의 항해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인 콜럼버스는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가는 항로가 아니라 대서양을 건너 서쪽으로 가도 인도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이미 보편화된 지구구형설(地球求刑說)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문제는 항해에 들어갈 막대한 자금이었다. 콜럼버스는 1485년과 1488년 두 차례에 걸쳐 포루투갈의 왕 후앙2세를 만나 후원을 부탁하지만 거절을 당했다. 아마도 아프리카해안을 돌아 동방으로 가는 항로를 확보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는 투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콜럼버스는 1486년에는 에스파냐의 이사벨여왕을 만나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지만, 대서양항로에 대한 낙관적 추정과 1.기사와 제독 작위, 2.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총독의 지위, 3.얻은 총 수익의 10분의 1일, 등 콜럼버스의 요구가 지나치다는 이유로 역시 거절을 당했다. 레콘키스타에 매진하고 있던 이사벨여왕으로서는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수월치 않았을 것이다.
▲ 콜럼버스의 항해경로<출처:위키디피아>(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하지만 1492년 1월 레콘키스타를 완수한 이사벨여왕으로서도 이웃나라 포르투갈이 해외에서 승승장구하도록 더 이상 내버려둘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협상을 유지해온 콜럼버스와 손을 잡는 대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1492년 8월 3일 90명의 선원을 이끌고 팔로스 데 라 프론테라를 출항한 콜럼버스는 2달여의 항해 끝에 10월 12일 아침 현재의 바하마 제도(Bahamas)에 도착했고, 처음 발을 딛은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의 섬; 원주민들은 과나하니(Guanahani)라고 불렀다고 한다)라고 칭하였다.
콜럼버스는 1492년부터 1503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신대륙을 왕래했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콜럼버스는 신대륙의 원주민에게 가톨릭을 전파하고 또한 금을 채굴하고자 했지만,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하자 원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유럽으로 싣고 와 노예로 삼았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항해는 북미대륙과 남미대륙의 발견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며, 그 배경에는 앞서 그라나다의 알람브라궁전에서 소개한 워싱턴 어빙이 '콜럼버스, 1828'과 '콜럼버스의 일행등, 1831'을 통해서 지나치게 미화한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