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Ⅱ

양기화
발행날짜: 2015-10-19 05:07:09
  •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7]

터키공화국의 수도, 앙카라(1)

사프란볼루의 아라스타 바자르 구경을 마친 우리는 바로 앙카라로 향했다. 간혹 이스탄불을 터키의 수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오스만제국 시절에는 이스탄불이 수도였지만, 터키민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앙카라로 수도를 옮겼다. 앙카라(Ankara)는 2014년 기준으로 515만명이 살고 있는 터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앙카라대학을 비롯하여 중동공과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가 모여 있는 교육도시이며, 정부청사와 외국 공관들이 위치하는 정치도시이기도 하다.

아나톨리아고원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교통의 요지인 까닭에 역사적으로 수많은 세력들이 호시탐탐 노리던 곳이다. 기원전 1700년까지는 히타이트제국에 속했고, 기원전 1000년 무렵에는 프리기아인들이 정착했는데 앙카라 부근 포랏르에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움이 위치했다. 프리기아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바꾸는 능력을 가진 미다스왕이 다스렸다는 왕국이다. 프리기아 이후에는 페르시아의 영토가 되었고, 기원전 330년부터는 알렉산더대왕의 지배를 받았다.

알렉산더대왕 사후에는 안티노고스1세가 이 지역을 다스렸고, 기원전 232년 경에는 켈트족의 일파인 텍토사게스인들이 잠시 정착했다가 기원전 189년에는 로마제국이 차지하였다. 동로마제국이 이스탄불에 수도를 정한 다음에는 페르시아사람과 아랍사람들의 침공이 잦았다. 1073년 셀주크 튀르크가 점령 이후에도 여러 세력들이 각축하는 장소였고, 1356년 오스만제국의 오르한1세가 앙카라 지역을 점령한 이후는 티무르제국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던 1402년을 제외하고는 오스만제국과 그 뒤를 이은 터키공화국의 영토이다(1).

사프란볼루에서 여유있게 출발하였지만 앙카라에 이르는 도로 곳곳에서 벌어진 공사 때문에 지체하는 바람에 9시가 조금 넘어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빌켄트대학교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빌켄트대학교는 터키 최초의 비영리 사립대학으로 터키 최고의 대학이다.

여행사를 통하여 해외여행을 할 때 인솔자나 가이드가 식사메뉴까지도 세심하게 신경을 쓰기 마련인데, 이날 저녁에는 점심과 같은 메뉴가 나왔다. 차이라고는 디저트로 나온 과일이 수박대신 허니듀, 사과 그리고 머루포도 등이었는데 사과는 시었고, 제멋대로 떨어지는 머루포도도 단맛이 덜했다. 가이드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일행 중 몇 사람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숙소로 올라가버렸다.

빌켄트호텔에서 내다본 정경.
숙소는 깔끔하고 대학캠퍼스인지 숲이 우거지고 한적한 편이다. 새벽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멀리 외로워 보이는 등불이 마치 별빛 같다. 하늘에 총총한 별들 가운데 샛별이 제일 눈길을 끈다. 터키 국기를 장식하고 있어서 더욱 그러한가 보다. 갈 길이 먼 탓에 새벽 같이 일어나 둘째 날의 일정을 시작한다. 이날은 앙카라 시내에 있는 아타튀르트의 영묘와 한국공원을 지나치면서 일별하고 카파도키아까지 내달려야 한다.

아타튀르크 영묘.
추모당(memorial tomb)이라는 뜻을 가진 아니트카비르(Anıtkabir)는 터키공화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영묘로 9년여의 공사 끝에 1953년 9월 1일 개관하였다. 당시 앙카라의 중앙에 있던 라사테페(Rasattepe, 전망언덕)에 조성하여 앙카라 모든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터키공화국의 두 번째 대통령 이스메트 이뇌누의 묘도 아타튀르크의 영묘 반대편에 조성되어 있다.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국 편에 섰다가 패전의 멍에를 쓰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818년 10월 30일 연합군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합의한 무드로스 정전협정에 따라 오스만제국은 해체되고 말았다. 소아시아와 트라케 동부를 제외한 오스만제국의 영토는 연합국에게 할양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연합군은 정전협정과 달리 이스탄불에 진입하여 오스만제국의 정부를 장악하였다. 따라서 오스만제국의 정부와 술탄은 스스로 정책을 결정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는 법질서도 유지할 수 없었다. 나라가 붕괴할 위기의 상황에서 무스타파 케말을 비롯한 오스만군 지도자들은 대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힘을 모았다.

심지어는 소아시아 본토 역시 이탈리아 혹은 그리스에게 할양될 상황에서 1919년 5월 16일 이스탄불을 탈출하여 흑해 연안의 삼순항에 도착한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 국민들에게 저항운동을 일깨우기 시작하였다.

이런 움직임이 결실을 맺어 1920년 1월 28일 오스만의회는 케말이 제안한 건국 선언을 승인했다. "1918년 10월 30일 무드로스 협정을 체결한 시점에 아랍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의 미래는 국민 투표에 의해 결정한다. 같은 시점에 외세에 점령당하지 않았고 투르크 무슬림이 대다수를 차지하던 지역은 투르크인 국가의 영토로 한다.(3)"라는 내용이 첫 번째 조항으로 담겼다.

1920년 4월 23일 300여명으로 구성된 대민족의회(Grand National Assembly, GNA)가 개원되면서 무스타파 케말이 의장을 맡은 이후 GNA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무렵 동부지역에서 일어난 아르메니아인들의 폭동을 진압했고, 남서부에서는 프랑스군과의 충돌이 있었으며, 1921년 초에는 부르사와 우삭에서 에스키쉐히르와 아피온으로 진군해온 그리스군을 격퇴했다.

터키와 연합군은 1923년 7월 24일 오랜 협상 끝에 스위스의 로잔에서 터키공화국의 독립에 대한 합의에 이르렀다. 그 사이 1922년 11월 1일 오스만제국의 마지막 술탄 압뒬메시드가 술탄제도의 폐지에 동의하였기 때문에 오스만제국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고 터키공화국이 수립된 것이다.

1923년 10월 29일 GNA가 터키공화국 수립을 선언하고 무스타파 케말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터키사람들은 터키 공화국을 건설한 무스타파 케말에게 투르크인의 아버지를 뜻하는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지어주었다. 아타튀르크는 민주주의와 세속주의에 입각한 개혁을 단행함으로서 조국 터키를 근대화시키려고 힘썼다.

1924년 칼리프제도와 이슬람법을 폐지하였으며, 1926년에는 여성들에게도 기본권이 주어졌고, 1928년에는 이슬람이 공식국교라는 조항을 헌법에서 삭제했다. 대외적으로도 모든 이웃국가들과 우호조약을 체결해 선린관계를 확립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국제사회에서 터키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노력을 기울이던 아타튀르크는 1938년 11월 10일 5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이즈미르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서 만난 아타튀르크 조상(彫像).
우리 가이드 말로는 터키 사람들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는 3가지 중요한 것들이 있는데, 그 첫 번째는 국기이고, 두 번째는 아타튀르크, 그리고 세 번째는 축구라고 한다. 아타튀르크의 초상은 터키에서 통용되는 모든 지폐에 그려져 있고, 가는 곳마다 눈에 띄는 초상은 일단 그의 것으로 보아도 될 정도로 국민적 추앙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를 뛰어 넘는 인재가 지금까지도 등장하지 못했던 것이 오히려 터키를 위하여 불행한 일이 아닐까 하는 역설적인 생각을 해보았다. 커다란 나무의 그늘이 너무 크면 그 아래 작은 나무들이 크게 자랄 수 없는 것이 자연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리이다.

그리고 가이드에 따르면, 5.16혁명으로 권력을 쥔 박정희 대통령은 군출신으로 집권에 성공한 사례로는 아타튀르크가 유일하다고 판단하고 그를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 새마을운동 등이 바로 터키의 국가근대화모형에서 착안해낸 것이라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일까?

10월 10일 오전 10시 터키 수도 앙카라의 기차역에서 자살폭탄테러가 발생하여 백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듣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IS가 주도한 것이라고 한다. 중동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문제 세력인데 묘수가 없는 모양이다.

터키를 여행하는 동안 매일 외교부에서 테러발생 가능성이 있으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가는 것을 피하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으면서 가슴을 조리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에는 별 문제가 없을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공연한 객기가 되고 말았다.

사실 앙카라에서는 아타튀르크묘소와 한국공원을, 그것도 이른 새벽에 찍듯이 지나쳤기 때문에 이번 사고만 두고 본다면 큰 위험은 아니라고 위안을 삼을 수도 있겠지만, 주로 사람들이 밀집한 장소를 노리는 테러의 특성을 본다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스탄불의 탁심광장 같은 곳에서 벌어졌다면 전혀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었다.

참고자료

(1) 위키백과. 앙카라.
(2) Wipedia. Anıtkabir.
(3) 쉴레이만 세이디 지음. 터키민족 2천년사 213쪽, 애플미디어,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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