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의사의 좌충우돌 생존기…박성우의 '인턴노트'[12]
주치의 내과 인턴
호흡기내과 인턴이 다른 분과의 내과 인턴과 다른 특징이 하나 있다. 교수님들에겐 인턴의 역할이 채혈만 하고 잡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의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교육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 호흡기내과 인턴에게는 주치의 역할도 주어진다.
총 3명의 인턴이 호흡기내과에 배정되었는데 2명은 중환자가 많은 병동 두 곳을 각자 맡았다. 나머지 한 명은 암센터로 입원하는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보는 주치의 역할이 주어졌다.
메인과 엑스트라로 부르는 두 병동에는 일이 많은 편이라 주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상대적으로 암 진단을 위한 암센터 단기 병동은 일이 많지 않아 인턴이 주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짬이 생긴다.
나는 본래 엑스트라 병동이었던 123병동을 맡고 있었지만 3월 첫 달부터 담당교수님의 지도 아래 처음으로 '내 환자'를 맡아보았다. 인턴을 시작하자마자 3월부터 주치의를 맡은 것이다. 규모가 큰 종합병원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환자 차트에 담당의로 내 이름 석 자가 올라가고, 이제 막 입원한 환자들을 대면하고 진료하는 시작점에서 정말로 의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센터의 단기병동으로 입원하는 환자들은 입원 프로토콜(protocol)대로 검사를 진행하고 일찍 퇴원하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그 프로토콜대로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암 중에서도 악명 높은 폐암 여부를 진단받기 위해 오는 환자들인 만큼 평소 잘 웃고 다니는 나의 태도가 혹여 환자들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까 고민스러웠다.
의대 시절, 모의 환자를 진료하는 'CPX 임상수행' 과정에서 환자에게 무거운 이야기를 꺼낼 때 눈웃음을 짓고 있어 의아했다는 피드백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실제 환자에게도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조심하게 되었다.
주로 뇌와 뼈로 전이가 잘되는 폐암의 경우, 폐 CT 촬영, 뇌 MRI 촬영 및 골주사 사진(Bone scan), PET 검사까지 처방하는 대로 수행되었다. 이와 동시에 영상의학과에 조직 검사에 대한 의뢰를 하고 검사 결과가 나올 때마다 환자의 질병이 더욱 명확해지는 일련의 과정을 지휘하는 의사로서의 경험은 신기하기만 했다. 물론 인턴이 끝나고 전공의가 되면 주치의 역할을 하게 되지만 그때는 그 일이 주가 되어 정해진 일과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이제 갓 의사를 시작한 인턴 일과 업무에서 조금 벗어난 주치의 수련을 해본다는 것은 다른 인턴들과 차별화되는 듯해 뿌듯했다. 다른 몇몇 과에서도 주치의 역할을 했던 인턴들 역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이제는 진정한 의사라는 느낌과 그렇게 지시를 내리고 환자를 케어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성취감은 인턴 수련 과정에서 특별한 경험이다.
또한 담당의였던 만큼 내가 하는 이야기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질문을 하는 환자들의 표정과 몸가짐을 마주했다. 나중에 전공의가 되고 수 없이 많은 환자를 대할 때는 더 둔감하게 느꼈겠지만.
얼마 전 TV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초기 위암과 대장유암종을 진단받았다는 출연자를 보았다. 시술받고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짧은 순간에도 '암'이라는 단어가 초기일지라도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는지 느껴졌다. 내가 주치의를 맡은 환자들에게도 '폐암'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힘겨울지 생각해보게 된다.
주치의 인턴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원한 아주머니 환자분이 있었다. 폐암 확진 이후 보호자였던 아저씨와 먼저 얘기하고 퇴원 직전까지 아주머니에게는 결과를 말하지 않기로 했다. 검사 결과가 빨리 나올 법한데도 잘 알려주지 않고 검사만 진행하니 아침 회진을 갈 때마다 반가움과 동시에 긴장과 두려움이 섞인 아주머니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폐암이었지만 다행히 다른 곳에 전이가 없는 초기다. 결과가 좋지 않다는 운과 띄우고는 폐암이고 수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아주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도 꿋꿋이 잘 받아들이고 퇴원하는 순간까지 초짜 인턴 주치의를 존중해주었다. 그동안 검사했던 결과들에 대해 말씀드리던 중 아주머니가 "종합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선생님처럼 좋은 분 만나서 검사하는 동안 마음이 편안했다고, 칭찬카드라도 써야겠다"고 말했다.
병의 경중을 떠나 그것을 자기 일로 받아들이는 것은 환자에게는 큰 일인데 그 순간에도 선생님 얼굴을 보고 결과가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아주머니가 퇴원하면서 정말로 칭찬카드를 써주었는지는 모른다. 선배 의사들이 환자와 좋은 라뽀가 쌓였을 때 안 좋은 결과라 해도 잘 따라주는 환자들의 모습에서 의사로서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낀다는 말이 생각났다.
이제 호흡기내과 인턴도 일주일 밖에 안 남았다. 담당의에 내 이름으로 입원했던 환자들, 그리고 앞으로 일주일 동안 내가 맡게 될 환자들을 위해서라도 조금 더 많이 느끼고 배우면서 나아가야겠다. 후에 몸과 마음이 지쳐 환자를 돌보는 마음까지 지쳐버리면 그 때 오늘의 초심에 대해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하버드 의대의 피바디 박사가 했던 말을 떠올려본다.
"환자 치료의 비법은 환자를 돌보는 마음에 있다."
<13편에서 계속>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호흡기내과 인턴이 다른 분과의 내과 인턴과 다른 특징이 하나 있다. 교수님들에겐 인턴의 역할이 채혈만 하고 잡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의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교육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 호흡기내과 인턴에게는 주치의 역할도 주어진다.
총 3명의 인턴이 호흡기내과에 배정되었는데 2명은 중환자가 많은 병동 두 곳을 각자 맡았다. 나머지 한 명은 암센터로 입원하는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보는 주치의 역할이 주어졌다.
메인과 엑스트라로 부르는 두 병동에는 일이 많은 편이라 주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상대적으로 암 진단을 위한 암센터 단기 병동은 일이 많지 않아 인턴이 주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짬이 생긴다.
나는 본래 엑스트라 병동이었던 123병동을 맡고 있었지만 3월 첫 달부터 담당교수님의 지도 아래 처음으로 '내 환자'를 맡아보았다. 인턴을 시작하자마자 3월부터 주치의를 맡은 것이다. 규모가 큰 종합병원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환자 차트에 담당의로 내 이름 석 자가 올라가고, 이제 막 입원한 환자들을 대면하고 진료하는 시작점에서 정말로 의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센터의 단기병동으로 입원하는 환자들은 입원 프로토콜(protocol)대로 검사를 진행하고 일찍 퇴원하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그 프로토콜대로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암 중에서도 악명 높은 폐암 여부를 진단받기 위해 오는 환자들인 만큼 평소 잘 웃고 다니는 나의 태도가 혹여 환자들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까 고민스러웠다.
의대 시절, 모의 환자를 진료하는 'CPX 임상수행' 과정에서 환자에게 무거운 이야기를 꺼낼 때 눈웃음을 짓고 있어 의아했다는 피드백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실제 환자에게도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조심하게 되었다.
주로 뇌와 뼈로 전이가 잘되는 폐암의 경우, 폐 CT 촬영, 뇌 MRI 촬영 및 골주사 사진(Bone scan), PET 검사까지 처방하는 대로 수행되었다. 이와 동시에 영상의학과에 조직 검사에 대한 의뢰를 하고 검사 결과가 나올 때마다 환자의 질병이 더욱 명확해지는 일련의 과정을 지휘하는 의사로서의 경험은 신기하기만 했다. 물론 인턴이 끝나고 전공의가 되면 주치의 역할을 하게 되지만 그때는 그 일이 주가 되어 정해진 일과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이제 갓 의사를 시작한 인턴 일과 업무에서 조금 벗어난 주치의 수련을 해본다는 것은 다른 인턴들과 차별화되는 듯해 뿌듯했다. 다른 몇몇 과에서도 주치의 역할을 했던 인턴들 역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이제는 진정한 의사라는 느낌과 그렇게 지시를 내리고 환자를 케어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성취감은 인턴 수련 과정에서 특별한 경험이다.
또한 담당의였던 만큼 내가 하는 이야기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질문을 하는 환자들의 표정과 몸가짐을 마주했다. 나중에 전공의가 되고 수 없이 많은 환자를 대할 때는 더 둔감하게 느꼈겠지만.
얼마 전 TV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초기 위암과 대장유암종을 진단받았다는 출연자를 보았다. 시술받고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짧은 순간에도 '암'이라는 단어가 초기일지라도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는지 느껴졌다. 내가 주치의를 맡은 환자들에게도 '폐암'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힘겨울지 생각해보게 된다.
주치의 인턴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원한 아주머니 환자분이 있었다. 폐암 확진 이후 보호자였던 아저씨와 먼저 얘기하고 퇴원 직전까지 아주머니에게는 결과를 말하지 않기로 했다. 검사 결과가 빨리 나올 법한데도 잘 알려주지 않고 검사만 진행하니 아침 회진을 갈 때마다 반가움과 동시에 긴장과 두려움이 섞인 아주머니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폐암이었지만 다행히 다른 곳에 전이가 없는 초기다. 결과가 좋지 않다는 운과 띄우고는 폐암이고 수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아주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도 꿋꿋이 잘 받아들이고 퇴원하는 순간까지 초짜 인턴 주치의를 존중해주었다. 그동안 검사했던 결과들에 대해 말씀드리던 중 아주머니가 "종합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선생님처럼 좋은 분 만나서 검사하는 동안 마음이 편안했다고, 칭찬카드라도 써야겠다"고 말했다.
병의 경중을 떠나 그것을 자기 일로 받아들이는 것은 환자에게는 큰 일인데 그 순간에도 선생님 얼굴을 보고 결과가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아주머니가 퇴원하면서 정말로 칭찬카드를 써주었는지는 모른다. 선배 의사들이 환자와 좋은 라뽀가 쌓였을 때 안 좋은 결과라 해도 잘 따라주는 환자들의 모습에서 의사로서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낀다는 말이 생각났다.
이제 호흡기내과 인턴도 일주일 밖에 안 남았다. 담당의에 내 이름으로 입원했던 환자들, 그리고 앞으로 일주일 동안 내가 맡게 될 환자들을 위해서라도 조금 더 많이 느끼고 배우면서 나아가야겠다. 후에 몸과 마음이 지쳐 환자를 돌보는 마음까지 지쳐버리면 그 때 오늘의 초심에 대해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하버드 의대의 피바디 박사가 했던 말을 떠올려본다.
"환자 치료의 비법은 환자를 돌보는 마음에 있다."
<13편에서 계속>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