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를 주마간산하다(2)
오스트리아를 주마간산하다(2)
사실 발칸여행을 떠나기 전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시작하는 상품들을 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 특히 빈의 경우는 슬로베니아로 가는 길이 가장 짧고 오스트리아제국과 오스만제국의 관계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만지작거렸던 상품이었다.
결국 베네치아를 구경하고 밀라노에서 비행기를 타는 경로를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빈으로 돌아와 크루아상을 곁들여 비엔나커피를 마시는 일정에서 여유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를 지나면서 빈 이야기를 빠트릴 수가 없겠다. 흔히 크루아상(croissant)이 프랑스빵으로 알려진 것은 1839년 말 오스트리아의 포병 장교였던 아우구스트 창(August Zang)이 파리에 개업한 빈풍의 빵집(Boulangerie Viennoise)에서 만들면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설에 따르면 크루아상은 헝가리에서 만들어진 빵으로 1683년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전해졌고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가지고 갔다고 전한다. 하지만 13세기에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미 킵펠(Kipferl)이라는 초승달 모양의 빵을 먹고 있었다.
크루아상의 유래에 관한 속설 가운데 이슬람과의 전투와 관련된 것도 있다. 732년 프랑크왕국이 우마이야의 공세를 격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과 1683년 오스트리아가 오스만제국의 침략을 격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이는 크루아상을 금지하기 위한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만든 것이라는 설명이다.(1)
오스만제국이 빈을 공격할 때 한밤중에 터널을 뚫는 소리를 들은 제빵사의 신고로 터널을 파던 오스만군을 격퇴할 수 있었고, 왕실에서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오스만의 상징인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들게 했다는 이야기는 마치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당시 오스만군의 땅굴전술은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의 장편소설 <안개 낀 대륙의 아틀라스>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오스만군에는 땅굴 파는 전문가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고, 상대진영에서도 이 전술에 대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스만군은 땅굴을 팔 때 발생하는 소음을 감추기 위하여 지상군이 포탄을 발사하였다는 것이다.(2) 역시 속설을 사실인양 믿어서는 안 되겠다.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험준한 고개를 오르기엔 힘이 부쳤는지 도로는 곳곳에서 산허리를 뚫고 지나간다. 곳에 따라서는 산봉우리에 하얀 눈이 앉아있다, 어디쯤엔 산꼭대기의 상록수는 상고대를 만들고 있다.
산등성이를 지키는 나무들 가운데 성미 급한 녀석들은 벌써 노랗고 붉게 물들어 있어 모자이크를 만들고 있다, 누군가 발칸을 종교와 인종의 모자이크라고 비유한 발칸을 보러가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오스트리아알프스에는 가을과 함께 겨울이 이미 와 있었다. 아내는 프라하에서 여행을 시작한대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는데 기대치 않은 절경을 즐길 수 있어 참 다행이라고 했다.
잘츠부르크 부근을 지나 슬로베니아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는 동안 가을로 물들어가는 오스트리아의 아름다운 산하를 보면서 많이 부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세기 인류가 저지른 가장 야만적인 짓들이 바로 이토록 아름다운 땅 오스트리아에서 잉태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생각이 달리 할 수밖에 없다.
이종헌 기자가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에서 설명한 것을 조금 인용한다. “알프스의 그림 같은 경치와 중세유럽의 고즈넉한 낭만이 가득한 땅.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흐르는 곳. 그림 같은 인스부르크와 잘츠부르크가 있고 모차르트, 요한 스트라우스가 태어난 곳.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 숨이 멎을 것 같은 빼어난 경관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 이런 동화 같은 땅, 낭만적인 땅이 인류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전쟁인 제1․2차 세계대전을 모두 잉태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3)” 제
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가가 일으킨 것이고, 제2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히틀러가 일으켰고, 오스트리아도 동참했으며, 심지어는 또 다른 학살자 스탈린이 오스트리아에서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학살에 오스트리아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동참했는가 하는가에 관하여 에릭 캔들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치가 통치하는 모든 도시들 가운데 빈은 크리스탈나흐트에 가장 저열했다. 유대인들은 모욕과 잔인한 폭행을 당했고, 사업장에서 쫓겨나고 당분간 자택에서 퇴거당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업장과 집은 탐욕스러운 이웃에게 숟가락까지 약탈당했다(4).”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수정의 밤)는 1938년 11월 9일에서 10일로 넘어가는 밤에 나치 독일이 유대인과 유대인 재산에 폭력을 휘두른 사건이 발생한 것을 두고 말하는데, ‘깨진 유리의 밤’이라고도 한다. 11월 7일 파리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학생 헤르헬 그린슈판이 독일인 외교관 에른스트 폼 라트를 저격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
나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히틀러와 의논을 거쳐 ‘자발적인 시위’처럼 보이게 꾸민 격렬한 보복을 감행할 것을 ‘돌격대원’들에게 촉구했다. 뮌헨으로부터 받은 지시에 따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유대인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져 91명이 죽고 수백 명이 중상을 입었다. 약 7,500개의 유대인 상점이 약탈당했으며 유대교 예배당 177채가 불에 타 파괴되었다. 경찰은 개입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5).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사냥꾼으로 활동한 지몬 비젠탈(Simon Wiesenthal)이 “빈에 비하면 베를린의 크리스탈나흐트는 즐거운 크리스마스 축제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반유대적 행동은 상상을 초월했던 모양이다.
린츠를 출발해서 3시간 무렵까지 하늘을 두텁게 덮었던 구름이 조금 걷히면서 파란 하늘이 슬며시 얼굴을 내민다.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수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려나 보다. 그런데 길지 않은 터널을 막 빠져나가자 파란 하늘에 구름만 몇 점 둥실 떠간다. 오 마이 갓. 발칸에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비 그늘 효과’가 벌써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위키백과에 따르면 “비 그늘은 산맥이 습한 바닷바람을 가로막고 있어 비가 내리지 않는 지역을 가리키는 단어다. 바람이 산비탈을 타고 위로 올라가면서 해안의 평지와 산경사면에는 비가 내린다. 따라서 산을 넘어온 바람은 건조하므로 산너머 지역에는 비가 적게 내리는 비그늘이 생긴다.(6)”
발칸반도는 비그늘효과로 유럽의 통상적인 대륙성기후와는 달리 매우 건조하다. 몬테네그로의 콜라신은 강수량 104인치, 마케도니아의 스코페는 겨우 18인치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 달마치아해안에서 그리스 서부로 이어지는 좁은 해안지역은 풍부한 강수량을 자랑한다.
드디어 오스트리아에서 슬로베니아로 넘어가는 카라반켄 터널(Karawanks Tunnel)에 도착했다. 길이 7864m인 터널을 10분 정도 걸려 지나면 슬로베니아다.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 사이를 가르는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카라반켄산에 뚫은 이 터널은 1970년대에 계획을 수립할 때는 2개의 차선으로 된 터널을 두 개 뚫는 것으로 계획하였지만, 차량통행이 예상보다 많지 않아 한 개의 터널만 개통하였기 때문에 때로는 차가 밀리기도 한다(7).
참고자료
(1) Wikipedia. Croissant.
(2)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 지음. 안개 낀 대륙의 아틀라스 91-109쪽, 문학동네, 2007년.
(3) 이종헌 지음.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 288쪽, 소울메이트, 2012년
(4) 에릭 캔델 지음. 기억을 찾아서, 알에이치코리아, 2014년
(5) 다음 백과사전. 크리스탈나흐트.
(6) 위키백과. 비그늘.
(7) Wikipedia. Karawanks Tunnel.
사실 발칸여행을 떠나기 전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시작하는 상품들을 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 특히 빈의 경우는 슬로베니아로 가는 길이 가장 짧고 오스트리아제국과 오스만제국의 관계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만지작거렸던 상품이었다.
결국 베네치아를 구경하고 밀라노에서 비행기를 타는 경로를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빈으로 돌아와 크루아상을 곁들여 비엔나커피를 마시는 일정에서 여유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를 지나면서 빈 이야기를 빠트릴 수가 없겠다. 흔히 크루아상(croissant)이 프랑스빵으로 알려진 것은 1839년 말 오스트리아의 포병 장교였던 아우구스트 창(August Zang)이 파리에 개업한 빈풍의 빵집(Boulangerie Viennoise)에서 만들면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설에 따르면 크루아상은 헝가리에서 만들어진 빵으로 1683년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전해졌고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가지고 갔다고 전한다. 하지만 13세기에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미 킵펠(Kipferl)이라는 초승달 모양의 빵을 먹고 있었다.
크루아상의 유래에 관한 속설 가운데 이슬람과의 전투와 관련된 것도 있다. 732년 프랑크왕국이 우마이야의 공세를 격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과 1683년 오스트리아가 오스만제국의 침략을 격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이는 크루아상을 금지하기 위한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만든 것이라는 설명이다.(1)
오스만제국이 빈을 공격할 때 한밤중에 터널을 뚫는 소리를 들은 제빵사의 신고로 터널을 파던 오스만군을 격퇴할 수 있었고, 왕실에서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오스만의 상징인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들게 했다는 이야기는 마치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당시 오스만군의 땅굴전술은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의 장편소설 <안개 낀 대륙의 아틀라스>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오스만군에는 땅굴 파는 전문가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고, 상대진영에서도 이 전술에 대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스만군은 땅굴을 팔 때 발생하는 소음을 감추기 위하여 지상군이 포탄을 발사하였다는 것이다.(2) 역시 속설을 사실인양 믿어서는 안 되겠다.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험준한 고개를 오르기엔 힘이 부쳤는지 도로는 곳곳에서 산허리를 뚫고 지나간다. 곳에 따라서는 산봉우리에 하얀 눈이 앉아있다, 어디쯤엔 산꼭대기의 상록수는 상고대를 만들고 있다.
산등성이를 지키는 나무들 가운데 성미 급한 녀석들은 벌써 노랗고 붉게 물들어 있어 모자이크를 만들고 있다, 누군가 발칸을 종교와 인종의 모자이크라고 비유한 발칸을 보러가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오스트리아알프스에는 가을과 함께 겨울이 이미 와 있었다. 아내는 프라하에서 여행을 시작한대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는데 기대치 않은 절경을 즐길 수 있어 참 다행이라고 했다.
잘츠부르크 부근을 지나 슬로베니아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는 동안 가을로 물들어가는 오스트리아의 아름다운 산하를 보면서 많이 부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세기 인류가 저지른 가장 야만적인 짓들이 바로 이토록 아름다운 땅 오스트리아에서 잉태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생각이 달리 할 수밖에 없다.
이종헌 기자가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에서 설명한 것을 조금 인용한다. “알프스의 그림 같은 경치와 중세유럽의 고즈넉한 낭만이 가득한 땅.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흐르는 곳. 그림 같은 인스부르크와 잘츠부르크가 있고 모차르트, 요한 스트라우스가 태어난 곳.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 숨이 멎을 것 같은 빼어난 경관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 이런 동화 같은 땅, 낭만적인 땅이 인류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전쟁인 제1․2차 세계대전을 모두 잉태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3)” 제
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가가 일으킨 것이고, 제2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히틀러가 일으켰고, 오스트리아도 동참했으며, 심지어는 또 다른 학살자 스탈린이 오스트리아에서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학살에 오스트리아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동참했는가 하는가에 관하여 에릭 캔들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치가 통치하는 모든 도시들 가운데 빈은 크리스탈나흐트에 가장 저열했다. 유대인들은 모욕과 잔인한 폭행을 당했고, 사업장에서 쫓겨나고 당분간 자택에서 퇴거당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업장과 집은 탐욕스러운 이웃에게 숟가락까지 약탈당했다(4).”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수정의 밤)는 1938년 11월 9일에서 10일로 넘어가는 밤에 나치 독일이 유대인과 유대인 재산에 폭력을 휘두른 사건이 발생한 것을 두고 말하는데, ‘깨진 유리의 밤’이라고도 한다. 11월 7일 파리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학생 헤르헬 그린슈판이 독일인 외교관 에른스트 폼 라트를 저격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
나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히틀러와 의논을 거쳐 ‘자발적인 시위’처럼 보이게 꾸민 격렬한 보복을 감행할 것을 ‘돌격대원’들에게 촉구했다. 뮌헨으로부터 받은 지시에 따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유대인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져 91명이 죽고 수백 명이 중상을 입었다. 약 7,500개의 유대인 상점이 약탈당했으며 유대교 예배당 177채가 불에 타 파괴되었다. 경찰은 개입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5).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사냥꾼으로 활동한 지몬 비젠탈(Simon Wiesenthal)이 “빈에 비하면 베를린의 크리스탈나흐트는 즐거운 크리스마스 축제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반유대적 행동은 상상을 초월했던 모양이다.
린츠를 출발해서 3시간 무렵까지 하늘을 두텁게 덮었던 구름이 조금 걷히면서 파란 하늘이 슬며시 얼굴을 내민다.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수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려나 보다. 그런데 길지 않은 터널을 막 빠져나가자 파란 하늘에 구름만 몇 점 둥실 떠간다. 오 마이 갓. 발칸에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비 그늘 효과’가 벌써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위키백과에 따르면 “비 그늘은 산맥이 습한 바닷바람을 가로막고 있어 비가 내리지 않는 지역을 가리키는 단어다. 바람이 산비탈을 타고 위로 올라가면서 해안의 평지와 산경사면에는 비가 내린다. 따라서 산을 넘어온 바람은 건조하므로 산너머 지역에는 비가 적게 내리는 비그늘이 생긴다.(6)”
발칸반도는 비그늘효과로 유럽의 통상적인 대륙성기후와는 달리 매우 건조하다. 몬테네그로의 콜라신은 강수량 104인치, 마케도니아의 스코페는 겨우 18인치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 달마치아해안에서 그리스 서부로 이어지는 좁은 해안지역은 풍부한 강수량을 자랑한다.
드디어 오스트리아에서 슬로베니아로 넘어가는 카라반켄 터널(Karawanks Tunnel)에 도착했다. 길이 7864m인 터널을 10분 정도 걸려 지나면 슬로베니아다.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 사이를 가르는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카라반켄산에 뚫은 이 터널은 1970년대에 계획을 수립할 때는 2개의 차선으로 된 터널을 두 개 뚫는 것으로 계획하였지만, 차량통행이 예상보다 많지 않아 한 개의 터널만 개통하였기 때문에 때로는 차가 밀리기도 한다(7).
참고자료
(1) Wikipedia. Croissant.
(2)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 지음. 안개 낀 대륙의 아틀라스 91-109쪽, 문학동네, 2007년.
(3) 이종헌 지음.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 288쪽, 소울메이트, 2012년
(4) 에릭 캔델 지음. 기억을 찾아서, 알에이치코리아, 2014년
(5) 다음 백과사전. 크리스탈나흐트.
(6) 위키백과. 비그늘.
(7) Wikipedia. Karawanks Tunn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