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주형의 '병원경영의 시선'[3]
플렉스너가 아인슈타인을 대하는 방식(협상전략)
플렉스너 보고서를 쓴 그 플렉스너(Abraham Flexner)의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AS, Institute for Advanced Study)의 핵심 구성원을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가치평가체계는 병원경영의 협상전략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 마음을 움직인 협상조건
플렉스너가 IAS 초대 소장으로 부임한 것은 플렉스너 보고서 20년 뒤인 1930년입니다.
플렉스너발 수학·물리학 분야 '천재 모시기' 리스트는 문외한인 필자가 봐도 분명 '드림팀'입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하여 모스이론의 수학자 모스, 지금도 활용되는 컴퓨터 CPU 내장형 프로그램의 폰 노이만, 바일, 베블런, 괴델, 그리고 알렉산더에 이릅니다.
플렉스너가 구상한 유럽을 능가할 세계 최고 기초과학연구소 설립 멤버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플렉스너는 각자 한자리씩 하던 분들을 어떻게 드림팀으로 실현했을까요.
'비범함의 항해(Pursuit of Genius; Flexner, Einstein, and the Early Faculty at 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에 소개된 드림팀과의 협상과정은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합니다.
미국 거주 학자와의 협상이슈는 단연 연금과 급여입니다. 이를테면, 베블런의 연봉은 10,000불로 공개된 상황이었고,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기존 연봉에서 50% 인상된 15,000불에 IAS 이적을 합의합니다.
다수의 다른 협상을 통해 플렉스너는 아인슈타인의 시장가격을 20,000불 이상으로 책정합니다.
반면 아이슈타인은 명확하지만 당시로는 다소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합니다. 세 번째 만남에서 플렉스너에게 던진 쪽지 내용입니다.
1. 급여 : 유럽 현 근무지와 동일한 3,000불
2. 연구비서 : 현 연구비서인 메이어(Walther Mayer)와 함께 이적하고 IAS 연구원으로 임명
3. 근무기간 : 1년에 6.5개월(10월∼다음 해 4월 중순)만 봉직, 이외 기간은 현재 계약된 영국 옥스퍼드대, 미국 칼텍(Caltech)에 프로젝트 근무
이에 플렉스너는 아인슈타인 제안을 훨씬 넘어서는 조건으로 그를 영입합니다.
1. 급여 : 미국 현 물가를 고려해 10,000불(실제로는 1933년 이적 당일 베블런의 연봉과 같은 15,000불로 상향조정함)
2. 연구비서 : 수용(연봉 4,000불, 직책은 추후 논의)
3. 근무기간 : 수용
플렉스너 의사결정의 기반은 '합리적 가치평가'와 '정직'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플렉스너는 이미 협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시대 상황은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아인슈타인조차 구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파시즘과 반유대주의(anti-semitism)가 유행했던 1930년 초,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유럽학자들에게 미국 이적은 기회이자 희망이었습니다. 프린스턴 IAS 개원 예정이던 1933년, 히틀러가 집권했고 독일에 있던 아인슈타인의 가옥과 모든 재산은 압류당한 상태였습니다.
봉직기간은 어떻습니까. 다른 학자들이 매년 1년의 대부분을 채웠습니다. 반면 아인슈타인은 6.5개월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손발을 맞춰온 연구비서와의 묶음이적을 바랐습니다.
이 때문인지 아인슈타인의 연봉 3,000불 제시는 기대보다 낮아 보입니다. 3,000불은 유럽에서 그가 받던 연봉입니다. 당시 미국 대학 평균이 7,000불이고, 10,000불이면 높은 수준으로 여겨지던 때입니다.
필자의 상상에 의하면, 당시 아인슈타인의 협상력은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건이 까다롭고 경제 관념이 명확했습니다.
그가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뒤 당시 근무처인 연방특허청보다 연봉이 낮다며 취리히대 교수직을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1909년 일입니다. 1911년에는 프라하의 찰스 페르디난드대 교수직으로 옮기며 희망 연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불과 1년 뒤에는 모교인 스위스 연방공대로 돌아왔습니다. 1914년 독일 훔볼트대 교수 겸 카이저 빌헬름 물리연구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등 당신의 가치를 연구환경과 급여로 제대로 평가받기 희망한 흔적이 적지 않습니다.
플렉스너와 합의할 당시 아인슈타인이 미국 대학의 연봉 수준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범함의 항해'에 의하면, 미국 교수직 연봉을 정직하게 공개한 것은 오히려 3,000불 쪽지를 본 플렉스너였습니다. 어차피 알게 될 조건에 대해 플렉스너는 정직한 협상전략으로 일관했습니다. 정당한 대우에는 합리적인 가치에 대한 평가가 기반이 되었습니다.
숫자만 보면 20,000불도 지급한다던 플렉스너의 초기 조건에서는 조금 벗어났습니다. 그렇다면 플렉스너의 협상은 실패한 협상이고, 어부지리로 현지 급여를 챙긴 아인슈타인의 협상은 성공한 협상일까요?
플렉스너가 사실 돈은 조금 더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고'를 얻었습니다. 최고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최고'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협상은 일희일비의 거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안정성을 덤으로 얻었습니다. 근무기간입니다. 이후 예일대, 하버드대 등의 나은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고, 195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플렉스너가 IAS 소장직을 내려놓은 것은 1939년입니다. 재직기간 9년의 변화라면 독자께서 상상하는 그대로입니다. 수학이라는 기초과학에서 세계 최고 교육기관이라는 타이틀은 독일 괴팅겐(Göttingen)대에서 프린스턴 IAS으로 넘어왔습니다.
인재를 대하는 병원의 품격과 협상전략
올해 진행한 3건의 협상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비범함의 항해'를 읽으며, 플렉스너와 같은 가치 기반의 평가와 정직을 기대했습니다.
국내 모대학병원이 개발한 수술기자재를 미국 국립보건원(NIH)으로 기술이전(technology transfer)하는 협상 테이블이었습니다. 기술의 경제적, 사회적 가치를 설명하는 필자의 진정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수의 협의를 진행하는 동안, 흔들림 없이 합리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국내 A대형병원의 협상은 협상교과서 케이스에 나오는 '상대 약점 파고들기'의 전형을 보여주었습니다. a병원장의 목표는 최고 서비스에 낮은 가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3회의 협의에서 가치평가의 기준이 매번 바뀌는 과정을 지켜보며, 가치를 바라보는 잣대에 개선의 여지가 존재함을 느꼈습니다.
협상 후 A병원장은 원하는 것을 얻었다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회성 거래였습니다. 정직과 가치기반의 평가, 배려, 장기적 신뢰는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명의의 여유는 없었습니다.
국내 B, C중견병원 폐업 여부를 결정한 병원 이사진간의 협상 시작은 인간관계의 끝이 이런 것인가를 느낄 정도의 암울한 테이블이었습니다. 20년간 앞, 뒤 진료실을 써오던 세월의 진득함은 무엇이었는지, 세월의 무색함을 느끼게 한 프로젝트였습니다.
협상이 끝난 날, 표면적(금전적)으로 병원을 지키려는 자(B원장)와 떠나는 자(C원장)에게 모두 성공한 협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직으로 일관하고 병원의 가치유지에 집중하려는 필자 제안을 그대로 수용한 b원장이야말로 미래의 진정한 승자입니다. 협상은 현재의 상대와 하는 것이지만, 이와 동시에 미래의 나와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뒤집을 만한 협상을 완성한 플렉스너. 천재를 품에 안은 플렉스너의 희열은 짜릿했을 것입니다. 그는 미국 대학 연봉이라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즐기지 않고, 유럽 정세라는 협상의 우위를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가치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합리적 사고의 결과물입니다. 경제적, 비경제적 성과는 그 다음입니다.
병원 신축 혹은 분원 설립을 위해 인재를 찾아 고민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번 휴가를 '비범함의 항해(Pursuit of Genius; Flexner, Einstein, and the Early Faculty at 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탐독에 할애할 것을 권합니다.
▶ 고주형 대표는 국내외 병원과 다병원체계(Health System)의 성장전략과 지속가능방안 자문을 업으로 삼고 있다. 코넬대학교(미국 뉴욕), 대학원에서 보건의료정책·의료경영학 석사(M.H.A.)를 취득했으며, 美공인회계사이다.
삼일회계법인과 미국 FTI Consulting Inc.의 FTI Healthcare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헬스케어 경영컨설팅회사 캡스톤브릿지의 대표 컨설턴트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의대 본과생에게(What they didn't teach you in med school, 2015, 고주형)'가 있다.
플렉스너 보고서를 쓴 그 플렉스너(Abraham Flexner)의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AS, Institute for Advanced Study)의 핵심 구성원을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가치평가체계는 병원경영의 협상전략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 마음을 움직인 협상조건
플렉스너가 IAS 초대 소장으로 부임한 것은 플렉스너 보고서 20년 뒤인 1930년입니다.
플렉스너발 수학·물리학 분야 '천재 모시기' 리스트는 문외한인 필자가 봐도 분명 '드림팀'입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하여 모스이론의 수학자 모스, 지금도 활용되는 컴퓨터 CPU 내장형 프로그램의 폰 노이만, 바일, 베블런, 괴델, 그리고 알렉산더에 이릅니다.
플렉스너가 구상한 유럽을 능가할 세계 최고 기초과학연구소 설립 멤버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플렉스너는 각자 한자리씩 하던 분들을 어떻게 드림팀으로 실현했을까요.
'비범함의 항해(Pursuit of Genius; Flexner, Einstein, and the Early Faculty at 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에 소개된 드림팀과의 협상과정은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합니다.
미국 거주 학자와의 협상이슈는 단연 연금과 급여입니다. 이를테면, 베블런의 연봉은 10,000불로 공개된 상황이었고,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기존 연봉에서 50% 인상된 15,000불에 IAS 이적을 합의합니다.
다수의 다른 협상을 통해 플렉스너는 아인슈타인의 시장가격을 20,000불 이상으로 책정합니다.
반면 아이슈타인은 명확하지만 당시로는 다소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합니다. 세 번째 만남에서 플렉스너에게 던진 쪽지 내용입니다.
1. 급여 : 유럽 현 근무지와 동일한 3,000불
2. 연구비서 : 현 연구비서인 메이어(Walther Mayer)와 함께 이적하고 IAS 연구원으로 임명
3. 근무기간 : 1년에 6.5개월(10월∼다음 해 4월 중순)만 봉직, 이외 기간은 현재 계약된 영국 옥스퍼드대, 미국 칼텍(Caltech)에 프로젝트 근무
이에 플렉스너는 아인슈타인 제안을 훨씬 넘어서는 조건으로 그를 영입합니다.
1. 급여 : 미국 현 물가를 고려해 10,000불(실제로는 1933년 이적 당일 베블런의 연봉과 같은 15,000불로 상향조정함)
2. 연구비서 : 수용(연봉 4,000불, 직책은 추후 논의)
3. 근무기간 : 수용
플렉스너 의사결정의 기반은 '합리적 가치평가'와 '정직'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플렉스너는 이미 협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시대 상황은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아인슈타인조차 구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파시즘과 반유대주의(anti-semitism)가 유행했던 1930년 초,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유럽학자들에게 미국 이적은 기회이자 희망이었습니다. 프린스턴 IAS 개원 예정이던 1933년, 히틀러가 집권했고 독일에 있던 아인슈타인의 가옥과 모든 재산은 압류당한 상태였습니다.
봉직기간은 어떻습니까. 다른 학자들이 매년 1년의 대부분을 채웠습니다. 반면 아인슈타인은 6.5개월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손발을 맞춰온 연구비서와의 묶음이적을 바랐습니다.
이 때문인지 아인슈타인의 연봉 3,000불 제시는 기대보다 낮아 보입니다. 3,000불은 유럽에서 그가 받던 연봉입니다. 당시 미국 대학 평균이 7,000불이고, 10,000불이면 높은 수준으로 여겨지던 때입니다.
필자의 상상에 의하면, 당시 아인슈타인의 협상력은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건이 까다롭고 경제 관념이 명확했습니다.
그가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뒤 당시 근무처인 연방특허청보다 연봉이 낮다며 취리히대 교수직을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1909년 일입니다. 1911년에는 프라하의 찰스 페르디난드대 교수직으로 옮기며 희망 연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불과 1년 뒤에는 모교인 스위스 연방공대로 돌아왔습니다. 1914년 독일 훔볼트대 교수 겸 카이저 빌헬름 물리연구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등 당신의 가치를 연구환경과 급여로 제대로 평가받기 희망한 흔적이 적지 않습니다.
플렉스너와 합의할 당시 아인슈타인이 미국 대학의 연봉 수준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범함의 항해'에 의하면, 미국 교수직 연봉을 정직하게 공개한 것은 오히려 3,000불 쪽지를 본 플렉스너였습니다. 어차피 알게 될 조건에 대해 플렉스너는 정직한 협상전략으로 일관했습니다. 정당한 대우에는 합리적인 가치에 대한 평가가 기반이 되었습니다.
숫자만 보면 20,000불도 지급한다던 플렉스너의 초기 조건에서는 조금 벗어났습니다. 그렇다면 플렉스너의 협상은 실패한 협상이고, 어부지리로 현지 급여를 챙긴 아인슈타인의 협상은 성공한 협상일까요?
플렉스너가 사실 돈은 조금 더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고'를 얻었습니다. 최고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최고'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협상은 일희일비의 거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안정성을 덤으로 얻었습니다. 근무기간입니다. 이후 예일대, 하버드대 등의 나은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고, 195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플렉스너가 IAS 소장직을 내려놓은 것은 1939년입니다. 재직기간 9년의 변화라면 독자께서 상상하는 그대로입니다. 수학이라는 기초과학에서 세계 최고 교육기관이라는 타이틀은 독일 괴팅겐(Göttingen)대에서 프린스턴 IAS으로 넘어왔습니다.
인재를 대하는 병원의 품격과 협상전략
올해 진행한 3건의 협상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비범함의 항해'를 읽으며, 플렉스너와 같은 가치 기반의 평가와 정직을 기대했습니다.
국내 모대학병원이 개발한 수술기자재를 미국 국립보건원(NIH)으로 기술이전(technology transfer)하는 협상 테이블이었습니다. 기술의 경제적, 사회적 가치를 설명하는 필자의 진정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수의 협의를 진행하는 동안, 흔들림 없이 합리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국내 A대형병원의 협상은 협상교과서 케이스에 나오는 '상대 약점 파고들기'의 전형을 보여주었습니다. a병원장의 목표는 최고 서비스에 낮은 가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3회의 협의에서 가치평가의 기준이 매번 바뀌는 과정을 지켜보며, 가치를 바라보는 잣대에 개선의 여지가 존재함을 느꼈습니다.
협상 후 A병원장은 원하는 것을 얻었다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회성 거래였습니다. 정직과 가치기반의 평가, 배려, 장기적 신뢰는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명의의 여유는 없었습니다.
국내 B, C중견병원 폐업 여부를 결정한 병원 이사진간의 협상 시작은 인간관계의 끝이 이런 것인가를 느낄 정도의 암울한 테이블이었습니다. 20년간 앞, 뒤 진료실을 써오던 세월의 진득함은 무엇이었는지, 세월의 무색함을 느끼게 한 프로젝트였습니다.
협상이 끝난 날, 표면적(금전적)으로 병원을 지키려는 자(B원장)와 떠나는 자(C원장)에게 모두 성공한 협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직으로 일관하고 병원의 가치유지에 집중하려는 필자 제안을 그대로 수용한 b원장이야말로 미래의 진정한 승자입니다. 협상은 현재의 상대와 하는 것이지만, 이와 동시에 미래의 나와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뒤집을 만한 협상을 완성한 플렉스너. 천재를 품에 안은 플렉스너의 희열은 짜릿했을 것입니다. 그는 미국 대학 연봉이라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즐기지 않고, 유럽 정세라는 협상의 우위를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가치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합리적 사고의 결과물입니다. 경제적, 비경제적 성과는 그 다음입니다.
병원 신축 혹은 분원 설립을 위해 인재를 찾아 고민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번 휴가를 '비범함의 항해(Pursuit of Genius; Flexner, Einstein, and the Early Faculty at 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탐독에 할애할 것을 권합니다.
▶ 고주형 대표는 국내외 병원과 다병원체계(Health System)의 성장전략과 지속가능방안 자문을 업으로 삼고 있다. 코넬대학교(미국 뉴욕), 대학원에서 보건의료정책·의료경영학 석사(M.H.A.)를 취득했으며, 美공인회계사이다.
삼일회계법인과 미국 FTI Consulting Inc.의 FTI Healthcare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헬스케어 경영컨설팅회사 캡스톤브릿지의 대표 컨설턴트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의대 본과생에게(What they didn't teach you in med school, 2015, 고주형)'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