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관 본인 확인제도 속도 내는 정부…의료계 "책임 전가"

발행날짜: 2023-08-03 05:35:00
  • 진료 거부로 인한 환자 민원 우려…추가 설비 비용 부담도
    "수진자 조회는 공단 의무…수가 마련하고 시범 운영해야"

정부가 의료기관에서 환자 본인확인을 의무화하는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 시행에 속도를 내면서 의료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금도 진료 거부로 민원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환자 본인부담 의무까지 지울 경우 사실상 이중 규제에 가깝다는 것이 의료계의 지적이다.

2일 의료계에 따르면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내년 5월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 시행을 앞두고 본격적인 밑 작업에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가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 시행에 속도를 내면서 의료계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 개정안은 의료기관으로 하여금 내원 환자의 건강보험증과 신분증을 확인해 본인 여부를 확인하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이를 위반할 시 1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나 징수금이 부과되는 등 행정처벌 대상이 된다.

명의대여 및 도용으로 인한 건강보험재정 누수를 막겠다는 취지. 공단은 이를 위해 본인확인 절차를 위한 QR코드 시스템 구축하고, 병·의원 10개소를 대상으로 '모바일 건강보험증 앱을 통한 본인확인 서비스'를 시범 운영하는 중이다.

이와 함께 내년 5월부터 의료기관 본인확인이 강화된다고 공표하는 한편, 의료계 안내 및 본인확인 예외사유에 대한 의견수렴에 나섰다.

의료계는 반발하고 있다. 수진자 관리는 정부 의무임에도 관련 업무를 의료기관에 떠넘기면서 과태료까지 물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지적이다.

일선 현장은 본인확인으로 벌어질 환자와의 갈등을 우려하고 있다. 아파서 내원한 환자에게 본인확인부터 요구하기 쉽지 않고, 신분증 미지참을 이유로 돌려보낸다면 진료 거부로 민원이 제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 충남 내포신도시 한 소아청소년과 의원이 보호자를 대동하지 않은 미성년 환자를 돌려보냈다가 진료 거부로 민원을 받은 일은 이미 의료계에서 큰 이슈가 된 바 있다.

A내과 원장은 "미성년자가 혼자 와서 되돌려보냈다고 민원을 받는 세상인데 신분증을 지참하지 않았으니 돌아가라는 얘기를 환자들이 납득할지 의문"이라며 "환자들이 반발할 것이 뻔한데 이를 감당하는 것은 오롯이 의료기관의 몫이다. 스마트폰이나 신분증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노년층 환자도 많은데 이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도 막막하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다른 사람의 명의를 도용한 것은 환자인데 왜 의료기관이 처벌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산부인과의 경우 보호자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문제로 병·의원에 내원하는 미성년자도 있는데 이들은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도 묻고 싶다"고 강조했다.

대한개원의협의회도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에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적어도 시행 이후 시범 운영 기간을 두면서 제도의 부작용을 개선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제도의 경제적 효과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환자 본인확인으로 얼마만큼의 건강보험 재정 누수를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한 예상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 적어도 이 비용이 전국 의료기관이 관련 설비·인력을 설치·유지하는 비용보단 많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대한개원의협의회 김동석 회장은 "규제일변도인 정부 정책이 올바른 방향성인지 의심이 든다. 아무리 치안을 강화한다고 해도 범죄는 생기기 마련"이라며 "본인확인을 강화해도 어떻게든 허점을 찾는 이들이 나올 수 있는데 현장에 규제만 더해져 오히려 부작용이 심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게 된다면 실익 없이 전국적으로 관련 설비를 설치하느냐고 엄청난 비용만 낭비하게 된다"며 "아직 고시가 어떻게 나올지 정해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시범 기간을 두고 국민 반응과 불편을 파악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환자 본인확인을 위해선 추가적인 설비나 인력이 필요한 만큼, 이를 설치·유지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서울특별시의사회 이태연 보험부회장은 "수진자 관리는 공단의 가장 큰 의무인데 이를 일방적으로 의료기관에 떠넘기고 책임까지 지우는 꼴"이라며 "QR코드로 확인하면 편하다고 해도, 관련 장비를 설치하고 유지하는 데 비용이 드는데 이를 어찌할 것인지 의문이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이는 정부가 본인들이 할 일을 하지 않고 일선 현장에 전가하는 행위로 시행해야겠다면 수가라도 보장해야 한다"며 "재정 누수를 막겠다면 국민 계도부터 하는 것이 순서"라고 강조했다.

환자 본인확인이 어려운 응급실 현장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본인확인 의무 자체는 응급실이 아닌 의료기관에 부여될 가능성이 크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 이형민 회장은 "응급환자는 본인확인에 어려움이 있어 지금도 경찰이나 소방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잦다"며 "응급환자 본인확인은 병원 전 단계에서 해결돼야 하고 정부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개정안이 시행된다고 해도 응급실 내부에서 직접 신원 확인을 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아직 응급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확실하지 않아 부담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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