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산업2팀 최선 기자

[메디칼타임즈=최선 기자] 관리급여 만큼 직설적인 제도가 있을까. 민간사업자의 의료서비스를 '관리'하겠다는 의중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난 정책은 좀처럼 보기 드물다.
관리급여는 정부가 비급여 남용을 막겠다며 꺼내든 카드다. 도수치료처럼 과잉 이용 우려가 있는 비급여를 건강보험 체계 안으로 편입해 가격과 이용 횟수를 관리하겠다는 것이 핵심. 문제는 취지를 이해한다고 쳐도 그 명분도, 정책 수단도 납득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복지부는 실손보험 손해율을 근거로 들었다. 일부 가입자의 과도한 도수치료 이용으로 보험사 부담이 커지고, 결국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져 선량한 가입자까지 피해를 본다는 것. 보험사의 손해가 결국 사회적 비용인 만큼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과연 그럴까.
실손보험은 애초에 위험을 분석하고 이를 가격에 반영한 금융상품이다. 손해율이 높아지면 보험사는 보험료를 조정하고, 자기부담금을 높이거나 보장 범위를 바꾸고, 새로운 상품을 출시하며 시장에서 균형을 찾는다. 실제 실손보험도 1세대에서 4세대까지 손해율 변화에 맞춰 구조를 지속적으로 바꿔왔다. 치료 제한을 위해 보험사들이 약관과 다른 무리한 소송을 자구책으로 내세운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린다.
원칙적으로 보험사의 손익은 보험사가 책임져야 할 영역이다. 손해율이 높아졌다고 민간보험의 손실을 공적 규제의 명분 삼아 의료서비스를 직접 관리하겠다고 나선 것은 정책의 주체와 대상이 뒤바뀐 것처럼 보인다. 금융당국이 보험료 조정이나 상품 개편을 유도했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보건당국이 상품이 아닌 의료서비스의 공급과 가격, 이용량을 직접 통제하겠다는 발상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수치료 남용과 보험사기, 과잉진료를 방치하자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의사의 의학적인 판단과 소비자의 수요를 위축시키고 의료기관의 자율성과 경쟁을 제한하면서 얻는 사회적 편익이 더 크다는 건 무엇으로 입증할 것인가. 그런 엄정한 검증없이 민간보험의 손해를 사회적 손실로 규정, 시장에 개입하겠다는 논리는 의료기관을 '관치'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나오기 힘들다.
보건당국의 선의를 믿기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그들이 만든 구조적 원인에는 유독 관대한 모습을 오랫동안 봐 왔기 때문이다.
건강보험 수가는 원가에 못 미친다. 보험 진료만으로 적자 상태에 빠진 의료기관 사례는 차고 넘친다. 충분치 않은 급여 보상 속에서 의료기관이 비급여로 경영을 보완하려는 유인이 생긴 것은 정부 정책이 만든 결과이기도 하다. 때려 잡겠다는 과잉과 남발을 빚어낸 건 결국 행정이라는 점에서 정부의 책임이 적지 않다는 뜻.
치료 남용이 문제라면 보험사기와 과잉진료를 단속하면 된다. 손해율이 문제라면 보험사가 상품을 개편하면 된다. 저수가로 인한 의료기관의 비급여 의존 및 행위량 부풀리기가 문제라면 수가체계를 손보면 된다. 그런데도 정부는 구조적 왜곡은 그대로 둔 채 관리급여라는 손쉬운 처방을 내놓았다. 원인은 놔둔 채 결과만 규제하는 건 오진이다.
의료정책은 어느새 두더지 잡기 게임을 닮아간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원인을 고치기보다 눈앞에 드러난 현상부터 때려버린다. 비급여가 늘면 비급여를 규제하고, 검사 이용이 늘면 검사 기준을 강화한다. 왜 그런 행태가 반복되는지, 어떤 제도가 그런 유인을 만들었는지는 좀처럼 돌아보지 않는다.
문케어를 통해 CT·MRI 급여를 대폭 확대하며 의료 접근성을 높이겠다고 했던 그 정부가 재정 부담이 커지자 최근 CT·MRI를 '과보상'이라며 새 타깃으로 설정했다. K-제약·바이오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선정, 마중물을 붓겠다던 그 정부가 슬그머니 제네릭의 약가 산정률을 53.55%에서 45%로 낮추는 개편안을 내놓기도 했다. 문제가 생기자 자아비판 대신 망치를 휘두른 셈.
원인을 그대로 둔 채 결과만 통제하는 정책은 또 다른 왜곡을 낳는다. 관리급여 시행을 앞두고 벌써 도수치료 축소로 물리치료사의 대량 실직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도수치료 접근성이 떨어지고 국민 불만이 커질 때, 더 이상 물리치료사를 구하기 어려워지는 시기가 올 때 정부는 어떤 규제로 새로운 두더지를 내려칠 것인가. 눈 가리고 휘두르는 망치질에 누더기 정책이 되지 않길 빌어볼 수밖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