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뜻을 이어 의료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
고 한격부 의협 명예회장님에 대한 김재정 의협회장 弔辭
弔 辭
오늘, 우리는 우리나라 의료발전을 위해 헌신 해 오신 의료계의 巨木 捨石 韓格富회장님과 영원한 作別을 고해야 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어려운 醫療現實을 누구보다 더 많이 걱정해주시고, 격려해주시던 회장님을 영영 뵐 수 없게 되다니 저희는 그저 茫然自失할 수밖에 없는 심경입니다.
저희에게는 너무나 큰 산이요, 바다와 같은 너그러움을 안겨주신 회장님이라 눈물이 앞을 가리고 마음이 답답할 뿐입니다.
돌이켜 보면, 회장님은 1941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제12회)를 졸업하신 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조교수를 역임하시고, 부산대학교 초대 의예과부장으로 부산의대의 창설에 이바지하셨습니다. 1959년 메디칼센터(현 국립의료원)가 개원할 때 흉부외과 과장으로 봉직하게 되셨으니 당시 대학에도 없는 흉부외과를 창설 운영하면서 우리나라 흉부외과학의 試金石을 쌓으셨습니다. 이후 회장님은 서대문 독립문 로터리에 외과의원을 개설하시고 外科名醫로 장안을 풍미했던 일들을 저희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雅號에 얽힌 사연, ‘捨石(사석)’은 ‘돌처럼 던져진 삶’이라며, 서대문구의사회장을 시작으로 서울시의사회장(1962~1964년)을 거쳐 제20대(1970~1972년) 및 제23대(1976~1979년) 대한의학협회장을 역임하시면서 의료계 발전을 위해 스스로 몸을 던지셨습니다.
회장님은 1962년 3월 소위 醫師動員令 발동 당시 법정투쟁까지 벌이면서 醫權을 수호하셨고, 제20대, 제23대 대한의학협회장으로 봉직하면서 의협회관 건축 완공과 함께 71년 10월 13일부터 15일까지 사흘간 제7차 아시아대양주의학협회연맹(CMAAO) 학술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의협의 위상을 한층 드높이는데 기여하셨습니다.
1970년 당시, 기금이 부족하여 의협회관공사가 난항을 겪을 때 거금 500만원(현 5억원 상당)을 희사하여 공사를 완공하였습니다. 그 당시 회장님은 한밤중에도 공사장을 직접 방문 점검하여 공사장 감독은 물론 인부들까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은 관심을 가지셨다는 일화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 것 같습니다. 현재 동부이촌동에 있는 의협회관 7층 회의실(전 의협신문사)로 사용하고 있는 ‘사석홀’은 회장님을 기념하여 명명한 것으로 회장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사석홀은 매주 상임이사회를 비롯하여 시도의사회장 회의 등 주요 현안을 논의하는 회의가 수시로 열리고 있어, 그야말로 회장님의 소중한 뜻이 담긴 의권의 산실입니다.
그밖에도 회장님은 의협회무 수행당시 의료기관 금전등록기 설치파동, 의료보험제도 및 의료보험수가 제정 작업 등 험난했던 의료계의 난제를 풀어나가는데 타고난 근면성과 강직한 신념으로 60년대와 70년대 韓國醫療의 激動期를 과감하게 돌파하셨습니다.
회장님은 1983년 醫療奉職을 벗으신 후 서울시립노인요양원에서 20여 년간 노인봉사에 전력하시면서 餘生을 노인의료봉사에 이바지하시는, 한국의 슈바이처像으로 저희들의 龜鑑이 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회장님은 의협명예회장으로 의협 공식행사를 위시하여 자주 의협에 들르셔서 저희들을 격려해주시고 조언과 충언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회장님!
이제, 저희들은 회장님의 거룩한 뜻을 이어 난파선처럼 헤쳐진 우리나라 의료의 바로세우기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회장님의 遺志를 받들어 어렵고 힘겨운 일이 닥칠 때마다 勇氣百倍하여 반드시 이 땅의 의료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매진하겠습니다.
저 높은 곳에서 편히 계시어, 8만 의협회원의 守護神이 되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2005년 9월 7일
大韓醫師協會 協會長 金 在 正 號哭
弔 辭
오늘, 우리는 우리나라 의료발전을 위해 헌신 해 오신 의료계의 巨木 捨石 韓格富회장님과 영원한 作別을 고해야 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어려운 醫療現實을 누구보다 더 많이 걱정해주시고, 격려해주시던 회장님을 영영 뵐 수 없게 되다니 저희는 그저 茫然自失할 수밖에 없는 심경입니다.
저희에게는 너무나 큰 산이요, 바다와 같은 너그러움을 안겨주신 회장님이라 눈물이 앞을 가리고 마음이 답답할 뿐입니다.
돌이켜 보면, 회장님은 1941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제12회)를 졸업하신 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조교수를 역임하시고, 부산대학교 초대 의예과부장으로 부산의대의 창설에 이바지하셨습니다. 1959년 메디칼센터(현 국립의료원)가 개원할 때 흉부외과 과장으로 봉직하게 되셨으니 당시 대학에도 없는 흉부외과를 창설 운영하면서 우리나라 흉부외과학의 試金石을 쌓으셨습니다. 이후 회장님은 서대문 독립문 로터리에 외과의원을 개설하시고 外科名醫로 장안을 풍미했던 일들을 저희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雅號에 얽힌 사연, ‘捨石(사석)’은 ‘돌처럼 던져진 삶’이라며, 서대문구의사회장을 시작으로 서울시의사회장(1962~1964년)을 거쳐 제20대(1970~1972년) 및 제23대(1976~1979년) 대한의학협회장을 역임하시면서 의료계 발전을 위해 스스로 몸을 던지셨습니다.
회장님은 1962년 3월 소위 醫師動員令 발동 당시 법정투쟁까지 벌이면서 醫權을 수호하셨고, 제20대, 제23대 대한의학협회장으로 봉직하면서 의협회관 건축 완공과 함께 71년 10월 13일부터 15일까지 사흘간 제7차 아시아대양주의학협회연맹(CMAAO) 학술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의협의 위상을 한층 드높이는데 기여하셨습니다.
1970년 당시, 기금이 부족하여 의협회관공사가 난항을 겪을 때 거금 500만원(현 5억원 상당)을 희사하여 공사를 완공하였습니다. 그 당시 회장님은 한밤중에도 공사장을 직접 방문 점검하여 공사장 감독은 물론 인부들까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은 관심을 가지셨다는 일화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 것 같습니다. 현재 동부이촌동에 있는 의협회관 7층 회의실(전 의협신문사)로 사용하고 있는 ‘사석홀’은 회장님을 기념하여 명명한 것으로 회장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사석홀은 매주 상임이사회를 비롯하여 시도의사회장 회의 등 주요 현안을 논의하는 회의가 수시로 열리고 있어, 그야말로 회장님의 소중한 뜻이 담긴 의권의 산실입니다.
그밖에도 회장님은 의협회무 수행당시 의료기관 금전등록기 설치파동, 의료보험제도 및 의료보험수가 제정 작업 등 험난했던 의료계의 난제를 풀어나가는데 타고난 근면성과 강직한 신념으로 60년대와 70년대 韓國醫療의 激動期를 과감하게 돌파하셨습니다.
회장님은 1983년 醫療奉職을 벗으신 후 서울시립노인요양원에서 20여 년간 노인봉사에 전력하시면서 餘生을 노인의료봉사에 이바지하시는, 한국의 슈바이처像으로 저희들의 龜鑑이 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회장님은 의협명예회장으로 의협 공식행사를 위시하여 자주 의협에 들르셔서 저희들을 격려해주시고 조언과 충언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회장님!
이제, 저희들은 회장님의 거룩한 뜻을 이어 난파선처럼 헤쳐진 우리나라 의료의 바로세우기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회장님의 遺志를 받들어 어렵고 힘겨운 일이 닥칠 때마다 勇氣百倍하여 반드시 이 땅의 의료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매진하겠습니다.
저 높은 곳에서 편히 계시어, 8만 의협회원의 守護神이 되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2005년 9월 7일
大韓醫師協會 協會長 金 在 正 號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