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①의료제도 변화 기폭제…의사 '의권' 자각
|창간7주년기획| 의약분업 10년, 그 의미와 평가'의약분업', 건강보험 통합 과정과 함께 한국의료사에서 이 만큼 드라마틱하고, 격렬했던 사건은 찾아보기 힘들다.
2000년 8월 시행된 의약분업이 올해로 10년이 됐다. 5차에 걸친 의료계의 파업 등 우여곡절 속에 시작된 의약분업의 여파는 아직도 한국의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전히 의약분업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으며, 의정간에 생긴 감정의 골은 한국의료의 발전을 위한 소통을 막고 있다. <메디칼타임즈>는 10년이 된 의약분업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이를 통해 한국의료가 더 나은 발전을 위한 출발점에 설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1) 의약분업은 한국의료 패러다임 전환
(2) 의약분업 문제점과 정당한 평가
(3) 한국의료, 다시 출발점에 서다
특히 건강보험 통합의 경우 초기에 농민, 이후 노조, 시민단체가 중심에 있었다면 의약분업은 의료공급자인 의사가 폐업투쟁에 나서면서 중심에 섰다.
의쟁투의 등장, 5차례에 걸친 의료계의 파업 및 폐업 투쟁, 247표차의 극적인 의약정 합의안 수용, 대통령의 사과까지 모두 1999년 12월부터 2000년 11월까지 1년여에 걸쳐 일어난 일들이다.
2000년의 그 격렬함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의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의약분업은 대한민국 의료제도뿐 아니라 의료공급자인 의사, 국민의 인식까지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의약분업, 한국의료의 틀을 만들다
의약분업은 의사와 약사의 역할을 분리해 의약품 오남용을 막겠다는 것이 당초 취지였다. 약사들의 전문의약품 취급을 막고 약국의료보험이라는 기형적 제도를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의약분업 도입은 한국의료의 틀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성공여부를 떠나서 의약품 유통 및 품질, 건강보험 수가체계 및 재정, 환자 및 소비자 알 권리, 병의원 경영투명화, 제약회사 구조조정 등 보건의료의 전반적인 현안 모두가 의약분업 도입 과정에 제기됐고 또한 의약정 합의에 반영됐다.
폐업투쟁을 하던 의사 역시 의약 분리만이 아닌 의료전달체계 확립, 수가 정상화 등 보건의료 제도전반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의약분업 당시 도입된 실거래가상환제는 10년간 의약품 정책의 핵심이었고, 의사들의 수가정상화 목소리는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의약품 낱알 식별제도, 처방전 2매 발행, 생동성 실험 등 숱한 정책도 의약분업의 산물이다.
임의조제 등이 논란이 지속되긴 하지만 의약분업이 무한경쟁에 빠져 있던 의사와 약사의 역할을 분리시켜 각자의 역할을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토대를 마련한 측면도 부인할 수는 없다.
건국대 김원식 교수는 "의약분업은 20여년 운영해온 국민건강보험보험에 대한 체질 개선을 위한 화학적 실험공정을 도입함으로써 국민보건의료 시스템을 개선하려는 실험이었다"고 평가했다.
보건의료단체연합 홍춘택 위원도 '의료분업 10년 평가와 과제'라는 글에서 "의약분업은 좁은 의미에서는 의사와 약사의 역할을 분리하는 것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수가 인상과 급여확대를 포함해 의약품의 생산부터 최종 사용에 이르는 과정을 합리화, 근대화하는 과정이었다"고 강조했다.
의약분업, 의사들 '의권'에 눈을 뜨다
의약분업은 한국 의사들도 바꾸었다. 수십년간 진료실내에서 정부의 정책에 순응하면서 살아온 의사들은 의약분업을 계기로 '의권'이라는 개념을 자각하면서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의약분업의 졸속시행만을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지속되어온 정부 주도의 보건의료정책에 대한 반기였으며, 이 같은 요구는 의약분업을 계기로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왔다.
실제로 의약분업 당시 의사들의 요구는 단순한 약사들의 임의조제 근절이나 경제적 이익을 넘어섰다. 의쟁투는 진료수가 정상화, 의료전달체계 확립, 의약품 분류체계 재분류 등을 요구했고, 전공의들은 폐업투쟁을 하면서 부실의대 통폐합, 의대 정원 축소 등을 내걸고 싸웠다.
서울대교수협회의는 당시 성명에서 "의약분업을 둘러싸고 제기된 문제는 단순히 의사와 약사의 이해관계의 충돌이라기 보다는 수십년간 정부 주도로 결정, 집행되어온 왜곡된 의료제도의 결과"라면서 "의사의 진료권과 환자의 선택권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파업에 참가했던 한 개원의는 "의사들이 왜곡된 의료제도에 대한 불만이 의약분업을 통해 진료실 밖에서 터져나왔다"면서 "수십년간 누적된 문제점들에 의사들이 공감했기 때문에 파업이라는 어려운 싸움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파업으로 인한 언론과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의약분업의 쓰라린 경험은 이후 의사들의 정치세력화 요구로 이어졌다. "의사가 사회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의사 정치 세력화가 필요하다"는 구호는 모두 의약분업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이러한 '의권'에 대한 자각은 의사협회의 직선제를 관철시켰으며, 이후 정부의 DRG 도입, 의료법 개정 등에 대한 의사들의 격렬한 저항의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의사들의 '의권'에 대한 자각이 의사들이 사회에 눈을 뜨는데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의권과 국민의 건강권을 동일시하면서 국민의 참여를 배제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비판도 제기되는 것이 사실이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의사들이 의권투쟁을 하면서 국민이나 시민단체가 참여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면서 "의권이 정권과 부딪치면서 의사들의 보수화의 길을 걷게 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환자의 '의료주권' 문제가 대두되다
또 의약분업은 환자의 의료주권 또는 의료 질 문제가 대두된 시발점이었다.
의약분업 이전 환자들은 약국와 병의원에서 진료를 받고 의약품을 처방·조제를 받았지만, 어떤 의약품을 처방받았는지 알 수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또한 항생제나 주사제 처방에 대해 자각하지 못했으며, 약사의 전문의약품 처방과 조제와 이로 인한 부작용도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의약분업 과정에서 다양한 차원에서 환자의 알 권리 문제가 제기됐다. 의약정 합의안에 포함된 처방전 2매 발행, 의약품 정보제공, 의약품 낱알 식별표시 등의 개념도 환자의 알 권리와 관련된 것이었다.
특히 환자의 의료주권 확대는 의약분업 이후 심평원을 통해 본격화됐다. 의약품 특히 항생제 처방 오남용 논란은 이후 심평원의 항생제, 주사제처방률 공개 등의 적정성 평가의 토대가 됐다.
복지부 방혜자 사무관은 "의약분업이 도입이 된 것이 직능에 대한 것도 중요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국민의 알권리를 우선시했다"면서 "이전에는 의사들의 처방에 대한 공개가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이를 통해 환자의 의료주권이 실제로 신장됐는지 여부는 평가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의료계에서는 이러한 정보 공개가 오히려 국민과 의료인간의 신뢰를 깨뜨리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의약분업, 의사들끼리의 경쟁이 시작되다
의약분업으로 의원과 약국이 경쟁하던 체제가 마무리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의료기관간 경쟁의 서막이 피어올랐다. 이 같은 경쟁은 신설 의대 졸업생의 배출 등도 연계돼 있지만, 의약분업 이후 본격화됐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의원의 경우 2000년 1654곳에서 2001년 2만1342곳, 2002년 2만2760곳으로 각각 1600여곳, 1400여곳이 급속히 늘어난 개원러시는 일차의료기관의 경쟁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진료과목별, 종별로 무한경쟁 체제에 내몰린 의료계는 상하위 병의원간 격차가 발생했고, 상급종합병원간의 병원 규모 키우기 경쟁 등 많은 변화가 동반됐다.
이를 통해 대형병원이 일차의료영역 진료까지 확대하면서 일차의료기관은 업무와 역할이 축소됐으며, 의료전달체계 붕괴가 현실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반면 전문약 임의조제가 불법화된 약국의 경우 분업이후 소위 잘나가는 병의원 인근에 자리잡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다. '비방'이 아닌 처방전을 확보하는 것이 약국의 성공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서 좋은 입지에 대한 무한경쟁이 나타난 것이다.
약국은 2000년 1만9530곳에서 2001년 1만8354곳으로 1100여곳이 줄었는데, 이는 처방전 확보에 용이하지 않은 약국들이 줄줄이 폐업하면서 약국시장이 재편된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