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페인으로 간다
근대 투우의 발상지 론다(1)
코르도바의 유대인 거리를 돌아 나와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쌀밥에 샐러드, 소고기 야채볶음, 칠리소스를 친 새우볶음, 게살 스프. 양배추볶음 등. 모처럼 먹는 익숙한 메뉴라서 조금 급히 먹었던가보다. 론다로 가는 길에 아내가 다소 불편해하는 바람에 은근 걱정했다. 여행은 아직도 중반인데 몸이 불편하면 여행분윅기를 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점심식사 후 론다로 향하는 버스에서 가이드의 제안으로 시에스타 시간을 가졌다. 마치 스페인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다.
말라가산맥, 해발 723미터에 있는 론다는 인구 4만의 작은 마을이다. 론다에 가까워지면서 사방이 완만해 보이는 구릉지대에 올리브나무를 심은 밭이 펼쳐진다. 줄을 잘 맞춰 심은 올리브나무는 모두 기계로 관리하기 때문에 밭에서 농부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대부분 스페인 농부는 대단위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모두 부자라고 한다. 스페인 농부로부터 청혼을 받은 여성은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조형진 가이드는 강력하게 추천했다. 살다 마음이 안 맞아도 가톨릭국가라서 이혼이 어렵고 설사 이혼을 하더라도 재산이 모두 부인 몫이 된단다.
<스페인 소도시 여행>에서 박정은작가는 "나는 꿈의 도시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마침내 찾은 곳이 바로 론다다"라고 했다는 릴케의 말을 인용하면서 론다를 소개한다. 투우를 좋아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 역시 론다를 찬양했다. "론다는 스페인으로 신혼여행을 가거나 혹은 누구와 함께 도망칠 때 꼭 갈 만한 곳이다. (…) 아름다운 짧은 산책길, 좋은 술, 바다 음식, 멋진 호텔이 있다. (…) 산이 둘려 막은 고원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고원은 두 도시를 분리하는 계곡으로 깎여서 강 속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 고원 아래쪽에는 나귀 떼가 먼지를 일으키며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터미널 부근 주차장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갔다. 봉쇄수도원과 스페인 최초의 근대투우장을 지나 누에보 다리까지 내려갔다. 이곳에서 일단 자유롭게 구경을 하기로 했다. 누에보다리를 건너 전망대로 향하는 일행과 떨어져 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편에 있는 파라도르 호텔을 끼고 도는 헤밍웨이 산책로에 들어섰다. 알람브라궁전에서 얻은 학습효과 때문이다.
겨우 호텔을 끼고 도는 짧은 산책로이지만 세 번쯤은 놀라게 된다. 먼저 협곡 건너편 구시가지가 손에 잡힐 듯해서 협곡이 얼마나 깊겠나 싶었지만, 막상 산책로 들어서 철제 난간 너머로 몸을 내밀어 협곡의 바닥을 확인하는 순간 오금이 저리는 느낌이 든다. 깊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절벽에서 내밀어 지은 테라스에 올라서면, 협곡의 깊이를 다시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서쪽으로 펼쳐지는 널따란 분지.... 그리고 그 끝에 늘어서 분지를 감싸고 있는 산.산.산.....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이 분지에 넘칠 듯 쏟아진다. 서산에 해가 질 때까지 지켜보고 싶지만, 가이드와 약속한 시간 때문에 다시 산책길로 돌아갔다.
산책로는 투우장 입구로 연결된다. 입구에는 막 앞발을 구르는 모습의 검은색 투우소의 동상이 서있다. 금방이라고 투우장으로 뛰어들어 투우사와 겨룰 기세이다. 스페인어로 코리다 데 토로스(Corrida de Toros)라고 하는 투우는 지중해 지역에서 목축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신에게 황소를 바치는 의식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고대 크레타 섬, 테살리아, 로마 제국에서도 흔히 행해졌지만 14세기에 들어서야 투우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고 한다. 18세기 무렵, 직업 투우사가 등장하면서 왕과 귀족들이 말 위에서 창과 칼로 소를 죽이던 투우가 대중을 위한 경기가 되었고, 론다 출신의 유명한 투우사 프란시스코 로메로에 의하여 체계화되었다. 프란시스코 로메로는 1726년 물레타라고 하는 붉은 망토를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땅에서 소와 대결을 시작했다.
직업적 투우사를 말하는 토레로(torero)에는 주역이라 할 마타도르(matador : 투우사), 조역인 반데리예로(banderillero) 그리고 보조역인 피카도르(picador) 등이 있다. 역할이 다른 만큼 복장도 차이가 있다. 마타도르는 짧은 상의와 조끼, 무릎까지 오고 몸에 꼭 끼며 금·은·비단으로 장식된 바지, 장식이 달린 공단으로 만든 망토(입장행진 때만 입음), 레이스로 만든 셔츠웨이스트를 입고 산호색 스타킹에 굽이 없이 평평한 검정색 덧신을 신으며 검정색 셰닐 실 뭉치로 만든 모자 몬테라를 쓴다.
반데리예로도 마타도르와 비슷한 복장을 하지만 이들의 의상에는 금장식이 없다. 피카도르는 챙이 넓은 베이지색 모자를 쓰고 베이지색 상의에 크림색의 무거운 샤무아 가죽으로 만든 몸에 꼭 끼는 바지를 입으며 샤무아 가죽으로 안전하게 만든 앵글 부츠를 신는다.
투우 시합은 소 한 마리 마다 3막으로 구성되는데, 1막은 피카도르가, 2막은 반데리예로가, 3막은 마타도르가 주로 맡아 진행한다고 한다. 먼저 말을 탄 피카도르가 입장하면 소에 접근해서 창을 꼽는데, 피카도르가 탄 말이 소에 받혀서 죽기도 한다. 이어서 발데리예로가 반데리야 혹은 페온이라고 하는 장식이 달린 작살을 소의 어깨에 꽂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타도르가 물레타로 소를 유인하면서 윗갈비뼈 사이에 칼을 찔러넣으면 칼이 척추를 지나 대동맥을 자른다.
소와 맞선 마타도르는 발은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서 돌격해오는 황소를 향해 망토를 바깥쪽으로 천천히 휘두르는 베로니카(veronica)라고 하는 기본동작을 취한다. 마타도르는 이때 황소를 자신의 몸에 가까이 붙이면서 우아한 몸동작을 취해야 한다. 마타도르가 소와 겨루는 방식에는 황소와 마타도르가 정지한 자세에서 서로 공격하는 노련한 알 볼라피에(al volapie)를 비롯해 마타도르가 정지한 자세에서 돌진해오는 소를 공격하는 레시비엔도(recibiendo)가 있다.
페르디난드왕과 이사벨여왕이 론다를 점령해서 무슬림을 추방한 날을 기념해서 5월 20일에 투우를 시작한다고 한다. 하지만 여행 일정이 맞지 않은 탓인지 투우장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하고 투우장 밖에 서 있는 프란시스코 로메로와 소의 동상을 보는데 그치고 말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투우에 관한 에세이집 <오후의 죽음>에서 “처음으로 투우 구경을 하러 갔을 때, 나는 몸서리를 치게 되리라고 또 아마도 구역질이 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라고 했는데, 혹시 투우를 볼 기회가 있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궁금해진다.
헤밍웨이는 투우의 매력에 빠져 멕시코와 스페인 등지로 투우를 보러 다녔고. 결국은 투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을 써내기에 이르렀다. 헤밍웨이는 <오후의 죽음>에서 역대 투우사들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투우에 관한 모든 것을 두루 섭렵하고 있다.
헤밍웨이처럼 투우의 매력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행한 일이겠지만, 투우는 대표적인 동물학대행위로 지목되고 있어 폐지해야 한다는 동물애호단체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가고 있다. 스페인의 카탈루냐지방에서는 공식적으로 투우를 금지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런 움직임이 나오게 된 배경을 헤밍웨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카탈루냐지방은 풍요롭기 때문에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소박하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딱딱한 상식이나 감정이 전혀 들어갈 틈이 없다.
반면 카스틸랴 지방은 대체로 거친 환경때문에 죽음이 불가피한 현실이란 점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죽음에 대하여 지적인 관심을 가지고 투우장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투우는 스포츠가 아니라 죽음을 다루는 예술이라고 보았다.
자신을 동물과 동일시하는 사람들, 곧 거의 직업적으로 개나 그 밖의 짐승을 애호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쉽사리 동물과 동일시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인간에 대하여 더 심한 잔인성을 나타낼 수 있다고 본 헤밍웨이의 생각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코르도바의 유대인 거리를 돌아 나와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쌀밥에 샐러드, 소고기 야채볶음, 칠리소스를 친 새우볶음, 게살 스프. 양배추볶음 등. 모처럼 먹는 익숙한 메뉴라서 조금 급히 먹었던가보다. 론다로 가는 길에 아내가 다소 불편해하는 바람에 은근 걱정했다. 여행은 아직도 중반인데 몸이 불편하면 여행분윅기를 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점심식사 후 론다로 향하는 버스에서 가이드의 제안으로 시에스타 시간을 가졌다. 마치 스페인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다.
말라가산맥, 해발 723미터에 있는 론다는 인구 4만의 작은 마을이다. 론다에 가까워지면서 사방이 완만해 보이는 구릉지대에 올리브나무를 심은 밭이 펼쳐진다. 줄을 잘 맞춰 심은 올리브나무는 모두 기계로 관리하기 때문에 밭에서 농부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대부분 스페인 농부는 대단위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모두 부자라고 한다. 스페인 농부로부터 청혼을 받은 여성은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조형진 가이드는 강력하게 추천했다. 살다 마음이 안 맞아도 가톨릭국가라서 이혼이 어렵고 설사 이혼을 하더라도 재산이 모두 부인 몫이 된단다.
<스페인 소도시 여행>에서 박정은작가는 "나는 꿈의 도시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마침내 찾은 곳이 바로 론다다"라고 했다는 릴케의 말을 인용하면서 론다를 소개한다. 투우를 좋아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 역시 론다를 찬양했다. "론다는 스페인으로 신혼여행을 가거나 혹은 누구와 함께 도망칠 때 꼭 갈 만한 곳이다. (…) 아름다운 짧은 산책길, 좋은 술, 바다 음식, 멋진 호텔이 있다. (…) 산이 둘려 막은 고원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고원은 두 도시를 분리하는 계곡으로 깎여서 강 속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 고원 아래쪽에는 나귀 떼가 먼지를 일으키며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터미널 부근 주차장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갔다. 봉쇄수도원과 스페인 최초의 근대투우장을 지나 누에보 다리까지 내려갔다. 이곳에서 일단 자유롭게 구경을 하기로 했다. 누에보다리를 건너 전망대로 향하는 일행과 떨어져 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편에 있는 파라도르 호텔을 끼고 도는 헤밍웨이 산책로에 들어섰다. 알람브라궁전에서 얻은 학습효과 때문이다.
겨우 호텔을 끼고 도는 짧은 산책로이지만 세 번쯤은 놀라게 된다. 먼저 협곡 건너편 구시가지가 손에 잡힐 듯해서 협곡이 얼마나 깊겠나 싶었지만, 막상 산책로 들어서 철제 난간 너머로 몸을 내밀어 협곡의 바닥을 확인하는 순간 오금이 저리는 느낌이 든다. 깊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절벽에서 내밀어 지은 테라스에 올라서면, 협곡의 깊이를 다시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서쪽으로 펼쳐지는 널따란 분지.... 그리고 그 끝에 늘어서 분지를 감싸고 있는 산.산.산.....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이 분지에 넘칠 듯 쏟아진다. 서산에 해가 질 때까지 지켜보고 싶지만, 가이드와 약속한 시간 때문에 다시 산책길로 돌아갔다.
산책로는 투우장 입구로 연결된다. 입구에는 막 앞발을 구르는 모습의 검은색 투우소의 동상이 서있다. 금방이라고 투우장으로 뛰어들어 투우사와 겨룰 기세이다. 스페인어로 코리다 데 토로스(Corrida de Toros)라고 하는 투우는 지중해 지역에서 목축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신에게 황소를 바치는 의식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고대 크레타 섬, 테살리아, 로마 제국에서도 흔히 행해졌지만 14세기에 들어서야 투우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고 한다. 18세기 무렵, 직업 투우사가 등장하면서 왕과 귀족들이 말 위에서 창과 칼로 소를 죽이던 투우가 대중을 위한 경기가 되었고, 론다 출신의 유명한 투우사 프란시스코 로메로에 의하여 체계화되었다. 프란시스코 로메로는 1726년 물레타라고 하는 붉은 망토를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땅에서 소와 대결을 시작했다.
직업적 투우사를 말하는 토레로(torero)에는 주역이라 할 마타도르(matador : 투우사), 조역인 반데리예로(banderillero) 그리고 보조역인 피카도르(picador) 등이 있다. 역할이 다른 만큼 복장도 차이가 있다. 마타도르는 짧은 상의와 조끼, 무릎까지 오고 몸에 꼭 끼며 금·은·비단으로 장식된 바지, 장식이 달린 공단으로 만든 망토(입장행진 때만 입음), 레이스로 만든 셔츠웨이스트를 입고 산호색 스타킹에 굽이 없이 평평한 검정색 덧신을 신으며 검정색 셰닐 실 뭉치로 만든 모자 몬테라를 쓴다.
반데리예로도 마타도르와 비슷한 복장을 하지만 이들의 의상에는 금장식이 없다. 피카도르는 챙이 넓은 베이지색 모자를 쓰고 베이지색 상의에 크림색의 무거운 샤무아 가죽으로 만든 몸에 꼭 끼는 바지를 입으며 샤무아 가죽으로 안전하게 만든 앵글 부츠를 신는다.
투우 시합은 소 한 마리 마다 3막으로 구성되는데, 1막은 피카도르가, 2막은 반데리예로가, 3막은 마타도르가 주로 맡아 진행한다고 한다. 먼저 말을 탄 피카도르가 입장하면 소에 접근해서 창을 꼽는데, 피카도르가 탄 말이 소에 받혀서 죽기도 한다. 이어서 발데리예로가 반데리야 혹은 페온이라고 하는 장식이 달린 작살을 소의 어깨에 꽂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타도르가 물레타로 소를 유인하면서 윗갈비뼈 사이에 칼을 찔러넣으면 칼이 척추를 지나 대동맥을 자른다.
소와 맞선 마타도르는 발은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서 돌격해오는 황소를 향해 망토를 바깥쪽으로 천천히 휘두르는 베로니카(veronica)라고 하는 기본동작을 취한다. 마타도르는 이때 황소를 자신의 몸에 가까이 붙이면서 우아한 몸동작을 취해야 한다. 마타도르가 소와 겨루는 방식에는 황소와 마타도르가 정지한 자세에서 서로 공격하는 노련한 알 볼라피에(al volapie)를 비롯해 마타도르가 정지한 자세에서 돌진해오는 소를 공격하는 레시비엔도(recibiendo)가 있다.
페르디난드왕과 이사벨여왕이 론다를 점령해서 무슬림을 추방한 날을 기념해서 5월 20일에 투우를 시작한다고 한다. 하지만 여행 일정이 맞지 않은 탓인지 투우장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하고 투우장 밖에 서 있는 프란시스코 로메로와 소의 동상을 보는데 그치고 말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투우에 관한 에세이집 <오후의 죽음>에서 “처음으로 투우 구경을 하러 갔을 때, 나는 몸서리를 치게 되리라고 또 아마도 구역질이 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라고 했는데, 혹시 투우를 볼 기회가 있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궁금해진다.
헤밍웨이는 투우의 매력에 빠져 멕시코와 스페인 등지로 투우를 보러 다녔고. 결국은 투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을 써내기에 이르렀다. 헤밍웨이는 <오후의 죽음>에서 역대 투우사들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투우에 관한 모든 것을 두루 섭렵하고 있다.
헤밍웨이처럼 투우의 매력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행한 일이겠지만, 투우는 대표적인 동물학대행위로 지목되고 있어 폐지해야 한다는 동물애호단체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가고 있다. 스페인의 카탈루냐지방에서는 공식적으로 투우를 금지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런 움직임이 나오게 된 배경을 헤밍웨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카탈루냐지방은 풍요롭기 때문에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소박하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딱딱한 상식이나 감정이 전혀 들어갈 틈이 없다.
반면 카스틸랴 지방은 대체로 거친 환경때문에 죽음이 불가피한 현실이란 점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죽음에 대하여 지적인 관심을 가지고 투우장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투우는 스포츠가 아니라 죽음을 다루는 예술이라고 보았다.
자신을 동물과 동일시하는 사람들, 곧 거의 직업적으로 개나 그 밖의 짐승을 애호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쉽사리 동물과 동일시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인간에 대하여 더 심한 잔인성을 나타낼 수 있다고 본 헤밍웨이의 생각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