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성산부인과 박혜성 원장의 '따뜻한 의사로 살아남는 법'(22)
해성산부인과 박혜성 원장의 '따뜻한 의사로 살아남는 법'(22)
개원 후 매일 생각한 화두는 '5년 후, 10년 후에는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였다. 보통 그런 고민은 대기업 총수나 대통령만 하는 고민인 줄 알았다. 막상 개원을 해 보니 나도 해야 하는 고민이었다.
진료를 하면서 항상 미래를 대비하는데 5~10%의 시간과 돈을 썼다. 학회를 가고, 잘나간다는 병의원을 직접 찾아갔다. 학회를 가는 이유는 지금의 트렌드를 읽고, 그것을 나의 병원에 어떻게 적용 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함이다. 시간이 날 때면 잘 나가는 병의원을 벤치마킹 하러 다녔다.
이것이 20년간 조그만 시골에서 직원 40~50명을 이끈 노하우다.
어떤 의사든 열심히 한다.
만약에 머리 좋은 순서대로 개업에 성공하거나, 열심히 하는 순서대로 성공한다면 아마도 서울의대를 졸업한 사람이 가장 많이 성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은행 지점장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서울의대를 졸업한 의사들이 개원에서 가장 많이 실패를 하기 때문에 은행에서 돈을 잘 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개원해서 성공하는 의사가 가장 많은 대학은 조선의대와 연세의대라고 한다.
학교마다 가르치는 것이 달라서 그럴까? 아니면 선배들이 따로 후배들에게 성공 노하우를 가르치는 학교가 있어서일까? 이유가 뭘까? 개원해서 성공하는 능력과 머리 좋은 것과 노력하는 것은 왜 상관관계가 없을까?
개원은 비즈니스다. 학문과 다르다. 즉 학문을 하는 머리와 비즈니스를 하는 머리나 습관은 다르다는 얘기다. 개원하는 것과 대학에 남는 것, 봉직의사로 살아가는 것은 의대와 법대 만큼이나 큰 차이가 나는 상황이다. 개원에서 성공하는 것은 총과 칼이 없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과 같다.
나는 가족 중에 의사도 없고, 주위에 사업해서 성공한 사람도 없다. 아무도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맨땅에 헤딩해서 여기까지 왔다. 만약 주위에 나를 코칭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훨씬 일찍 눈을 떠서, 훨씬 젊은 시절에 비즈니스의 이치를 깨달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몸으로 배우고, 돈을 까먹으면서 깨달았다. 그리고 50이 넘은 나이에야 깨달은 것이 많다.
나는 얼리어답터(Early adopter)다. 모든 것을 빨리 받아들인다. 펠로우십(Fellowship)제도가 만들어지고 2년째 되던 해에 서울의대 산부인과 내분비 파트에서 전임의를 했고, 우리나라에 지방흡입술이 도입되던 초창기에 루마니아까지 가서 지방흡입술을 배웠다. 대한미용성형학회에서 성형을 가르쳐 줄 때 강의를 들었고, 산부인과를 하면서 불임센터를 만들었다. 요실금 수술을 초창기에 배웠고, 건강검진센터도 도입하고, 피부비만통증을 개설했다.
산부인과에 분만이 줄어드는 것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하면서 나중에는 분만하는 산부인과로 살아남지 못할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대비를 해야 했다. 내가 개원을 한 도시는 인구가 10만명이 넘지 않고, 어느 정도 돈이 생기고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의정부나 서울로 가족이 모두 이사를 가 버렸다. 그래서 단골도 금방 사라졌다.
또 작은 병의원이 새로 생기면 호기심 때문인지, 새로운 병원으로 환자들이 한동안 몰린다. 그리고 그 병의원에 단점이 보이면 환자들이 다시 왔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우리 병원 직원은 40~50명인데 분만 한 가지로는 밥을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분만 말고 다른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당직이 아닌 주말은 모두 학회에 있어야 했다. 경기가 안 좋을 때는 뜬 눈으로 밤을 새운 것 같다. 불면의 밤과 우울증의 나날을 많이 겪었다.
새로운 제도가 생기면 의사들의 시시비비가 갈린다.
어떤 보험회사에서 조사를 해보니 많은 여성이 요실금이 있는데 요실금 수술은 별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전국에서 하는 요실금 수술이 암 수술보다 훨씬 적었다. 그래서 보험회사는 요실금을 포함한 여성질환을 보장하는 보험상품을 만들었다. 그러자 요실금 수술이 급증했다. 보험회사는 그렇게도 많은 여성이 요실금이 있어도 참고 있으면서 말을 못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보험상품이 생기면서 그 후에 수술의 수요가 많아지고 그 요구에 의해서 의사들이 새로운 수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IBM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왓슨은 최근 방사선 판독의 정확률 99%를 자랑한다고 한다. 이런 왓슨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방사선과 의사를 포함한 많은 과의 의사는 필요 없게 될 지도 모르고, 또 많은 의사가 있지만 국가면적이 적은 우리나라에서 원격진료를 하게 되면 내과 의사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의사는 필요 없게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 의사가 없어지는 시대가 올 거라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은 정말로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 100년 동안 모았어야 할 정보가 지금은 한 달도 안 걸려서 모아지고, 제도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새로 바뀌는 제도나 시스템을 모르면 내가 왜 도태되고 있는지도 모르고 도태될 것이며, 다른 사람이 왜 부자가 되는지도 모르는 채 자신만 가난해 질 것이다. 당연히 의사도 예외가 아니다.
가끔 의료실사를 당한 후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의사들을 보면서 그 분들은 보험 청구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거나, 아니면 중요성을 몰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급여와 비급여, 인정비급여와 임의비급여의 개념을 모르면 왜 자신이 실사를 당하는지도 모른 채 실사를 당하고, 실사를 당했을 때 어떤 대응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세상을 원망하면서 우울증으로 자살을 선택하게 될 수도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1~2개월 정도 지켜보다가 보험청구를 잘못하면 미리 통보를 해줘야 하는데, 몇 년 동안 지켜보다가 한꺼번에 실사를 해서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벌금을 내리는 것은 잘못이지만 의사들, 아니 모든 경영인은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세상이 돌아가는 것과 제도가 바뀌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 해야 한다.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도 지났지만 제도의 변화나 트렌드를 읽는 눈이나 해안이 없으면 밥을 굶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의사라고 예외는 아닌 것 같다. 트렌드를 읽고, 트렌드에 편승해야 한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슬픈 현실이지만 항상 깨어있어야 가능하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만으로는 절대 살아남을 수가 없다.
개원 후 매일 생각한 화두는 '5년 후, 10년 후에는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였다. 보통 그런 고민은 대기업 총수나 대통령만 하는 고민인 줄 알았다. 막상 개원을 해 보니 나도 해야 하는 고민이었다.
진료를 하면서 항상 미래를 대비하는데 5~10%의 시간과 돈을 썼다. 학회를 가고, 잘나간다는 병의원을 직접 찾아갔다. 학회를 가는 이유는 지금의 트렌드를 읽고, 그것을 나의 병원에 어떻게 적용 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함이다. 시간이 날 때면 잘 나가는 병의원을 벤치마킹 하러 다녔다.
이것이 20년간 조그만 시골에서 직원 40~50명을 이끈 노하우다.
어떤 의사든 열심히 한다.
만약에 머리 좋은 순서대로 개업에 성공하거나, 열심히 하는 순서대로 성공한다면 아마도 서울의대를 졸업한 사람이 가장 많이 성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은행 지점장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서울의대를 졸업한 의사들이 개원에서 가장 많이 실패를 하기 때문에 은행에서 돈을 잘 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개원해서 성공하는 의사가 가장 많은 대학은 조선의대와 연세의대라고 한다.
학교마다 가르치는 것이 달라서 그럴까? 아니면 선배들이 따로 후배들에게 성공 노하우를 가르치는 학교가 있어서일까? 이유가 뭘까? 개원해서 성공하는 능력과 머리 좋은 것과 노력하는 것은 왜 상관관계가 없을까?
개원은 비즈니스다. 학문과 다르다. 즉 학문을 하는 머리와 비즈니스를 하는 머리나 습관은 다르다는 얘기다. 개원하는 것과 대학에 남는 것, 봉직의사로 살아가는 것은 의대와 법대 만큼이나 큰 차이가 나는 상황이다. 개원에서 성공하는 것은 총과 칼이 없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과 같다.
나는 가족 중에 의사도 없고, 주위에 사업해서 성공한 사람도 없다. 아무도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맨땅에 헤딩해서 여기까지 왔다. 만약 주위에 나를 코칭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훨씬 일찍 눈을 떠서, 훨씬 젊은 시절에 비즈니스의 이치를 깨달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몸으로 배우고, 돈을 까먹으면서 깨달았다. 그리고 50이 넘은 나이에야 깨달은 것이 많다.
나는 얼리어답터(Early adopter)다. 모든 것을 빨리 받아들인다. 펠로우십(Fellowship)제도가 만들어지고 2년째 되던 해에 서울의대 산부인과 내분비 파트에서 전임의를 했고, 우리나라에 지방흡입술이 도입되던 초창기에 루마니아까지 가서 지방흡입술을 배웠다. 대한미용성형학회에서 성형을 가르쳐 줄 때 강의를 들었고, 산부인과를 하면서 불임센터를 만들었다. 요실금 수술을 초창기에 배웠고, 건강검진센터도 도입하고, 피부비만통증을 개설했다.
산부인과에 분만이 줄어드는 것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하면서 나중에는 분만하는 산부인과로 살아남지 못할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대비를 해야 했다. 내가 개원을 한 도시는 인구가 10만명이 넘지 않고, 어느 정도 돈이 생기고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의정부나 서울로 가족이 모두 이사를 가 버렸다. 그래서 단골도 금방 사라졌다.
또 작은 병의원이 새로 생기면 호기심 때문인지, 새로운 병원으로 환자들이 한동안 몰린다. 그리고 그 병의원에 단점이 보이면 환자들이 다시 왔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우리 병원 직원은 40~50명인데 분만 한 가지로는 밥을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분만 말고 다른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당직이 아닌 주말은 모두 학회에 있어야 했다. 경기가 안 좋을 때는 뜬 눈으로 밤을 새운 것 같다. 불면의 밤과 우울증의 나날을 많이 겪었다.
새로운 제도가 생기면 의사들의 시시비비가 갈린다.
어떤 보험회사에서 조사를 해보니 많은 여성이 요실금이 있는데 요실금 수술은 별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전국에서 하는 요실금 수술이 암 수술보다 훨씬 적었다. 그래서 보험회사는 요실금을 포함한 여성질환을 보장하는 보험상품을 만들었다. 그러자 요실금 수술이 급증했다. 보험회사는 그렇게도 많은 여성이 요실금이 있어도 참고 있으면서 말을 못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보험상품이 생기면서 그 후에 수술의 수요가 많아지고 그 요구에 의해서 의사들이 새로운 수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IBM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왓슨은 최근 방사선 판독의 정확률 99%를 자랑한다고 한다. 이런 왓슨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방사선과 의사를 포함한 많은 과의 의사는 필요 없게 될 지도 모르고, 또 많은 의사가 있지만 국가면적이 적은 우리나라에서 원격진료를 하게 되면 내과 의사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의사는 필요 없게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 의사가 없어지는 시대가 올 거라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은 정말로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 100년 동안 모았어야 할 정보가 지금은 한 달도 안 걸려서 모아지고, 제도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새로 바뀌는 제도나 시스템을 모르면 내가 왜 도태되고 있는지도 모르고 도태될 것이며, 다른 사람이 왜 부자가 되는지도 모르는 채 자신만 가난해 질 것이다. 당연히 의사도 예외가 아니다.
가끔 의료실사를 당한 후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의사들을 보면서 그 분들은 보험 청구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거나, 아니면 중요성을 몰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급여와 비급여, 인정비급여와 임의비급여의 개념을 모르면 왜 자신이 실사를 당하는지도 모른 채 실사를 당하고, 실사를 당했을 때 어떤 대응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세상을 원망하면서 우울증으로 자살을 선택하게 될 수도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1~2개월 정도 지켜보다가 보험청구를 잘못하면 미리 통보를 해줘야 하는데, 몇 년 동안 지켜보다가 한꺼번에 실사를 해서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벌금을 내리는 것은 잘못이지만 의사들, 아니 모든 경영인은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세상이 돌아가는 것과 제도가 바뀌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 해야 한다.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도 지났지만 제도의 변화나 트렌드를 읽는 눈이나 해안이 없으면 밥을 굶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의사라고 예외는 아닌 것 같다. 트렌드를 읽고, 트렌드에 편승해야 한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슬픈 현실이지만 항상 깨어있어야 가능하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만으로는 절대 살아남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