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성형외과의 세계…박성우의 '성형외과노트'[33]
원내의 살림꾼, 액팅 치프
레지던트는 연차로 구별하기도 하지만 저연차는 주치의, 고연차는 치프(chief)로 구분하기도 한다. 영어로는 '치프 레지던트', 우리말로 '수석 전공의'는 레지던트 중 경력이 가장 높은 의사를 칭한다.
이런 수련제도는 역사도 제법 깊다. 1892년 존스 홉킨스 병원의 외과 과장을 역임했던 윌리엄 홀스테드 박사가 이 수련체계를 확립시켰다. 당시 수련의들의 연차가 올라가면서 더 많은 책임을 지고 고연차가 될수록 수가 적어지는 경쟁적인 외과의사 체계를 만들어서 치프 레지던트는 그해 한 명만 맡았다고 한다.
현재는 4년차를 '치프 레지던트'라 부르고 3년차는 '바이스 치프(Vice chief)'라 칭한다. 의과대학 실습 중에 만났던 4년차 치프 선생님들은 모르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언제 저렇게 치프가 되나 싶었다.
그만큼 3년의 수련 기간 동안 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는 영예로운 자격이다. 그래서 '수석 전공의'라는 직책에서 오는 무게감은 묵직했다.
저연차 때는 정해진 일정만 소화하기도 바쁜 날들이지만 고연차 치프가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처방이나 기록 업무에서 해방되고 수술이나 진료에 집중할 수 있다. 수술실에서도 첫 번째 어시스턴트로 집도의 교수님과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때로는 집도의 자리에 서기도 한다.
그만큼 치프의 의견은 의국 내에서 존중받는다. 한마디로 레지던트들의 대표자다. 하지만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레지던트 사이의 업무를 조율하고 후배 레지던트 교육에도 책임이 있다.
4년차 수련 때는 4년차 레지던트가 4명이었다. 그래서 모두 '치프'라고 불렸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격인 치프를 '메인 치프(main chief)'또는 '액팅 치프(acting chief)'로 뽑아서 번갈아가면서 수행했다. '액팅 치프'가 역사적인 초창기 치프에 해당한다고 봐야 하는데 의국의 살림꾼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일반 회사들도 그렇지만 종합병원 의국 역시 각종 행사가 많다. 학술대회, 원내 교육일정, 회식, 인턴이나 의과대생 관리 등. 의국 행사 때마다 액팅 치프가 나서서 조율한다. 회식 장소를 섭외하거나 지방 학술대회 시 묵을 숙소를 정하고 원서를 구입하거나 회식할 때 필요한 비용을 관리한다.
권한이 많아지는 만큼 귀찮은 일도 많지만 의국을 이끌어나가는 데 업무만큼이나 살림살이가 중요하다.
4년차 막바지에 이르러 액팅 치프가 되었다. 서는 위치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는 말이 실감났다. 액팅 치프가 힘든 건 삐뚤어지기 쉬운 1년차들을 다독이면서 레지던트들을 이끌어나가는 일이다.
1년차가 삐뚤어지면 그 선생이 맡은 일만 구멍나는 것이 아니라 연쇄작용처럼 모두가 힘들어진다. 수술실에서는 칼같이 업무가 구분되지 않 아서 일손이 필요하면 1년차는 부림을 당했기에 늘 불만이 많아 삐뚤어지기 쉽다.
같은 고연차끼리는 아무리 액팅 치프여도 일방적으로 내 지시에 따르게 할 수는 없다. 의국 운영과 업무에 대한 생각이 각자 다르니 이를 잘 따르게 하는 것도 고역이다.
"아랫 연차는 빡세게 굴려야 일이 잘 돌아간다"고 얘기하며 자고로 아랫 사람은 윗사람을 편하게 잘 모셔야 된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레지던트들도 있다.
반대로 지금 사회 에서 연차 구분은 업무 구분이지 1년차나 4년차나 모두 평등하게 자기 맡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레지던트들도 있다. 생각이 다른 만큼 사건 사고가 일어나면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1년 내내 의국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사건 사고가 일어나면 일이 비효율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가장 큰 책임을 진 윗사람이 가장 늦게 보고받는 풍토 때문이다.
종합병원도 마찬가지여서 1년차가 문제를 확인하면, 2년차에게 알리고 그러면 2년차가 3년차와 상의하고 마지막에 치프가 보고 받는다. 보고받은 치프는 상황에 따라 교수님께 보고하는데 간혹 결정을 늦추면 이미 제 때 해결하기엔 시간이 지나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야! 그런 것까지 나한테 직접 보고하냐? 너는 보고체계도 없어? 나한테 이런 소리하기 전에 밑에서 좀 알아서 해결하란 말이야!"
이런 짜증을 한 번 듣고 나면 보고하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진다. 해결되어야 할 일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는 이유도 그렇다. 그래서 하찮은 일일지라도 아랫 연차와 윗연차의 딱딱한 소통의 벽을 허물고 싶었다.
바뀌지 않는 원내 문화
동기들과 고연차가 되면 바꾸고자 했던 노력은 이런 부분이 많았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늦게 변화하는 곳은 학교와 군대, 병원이라고 얘기한다. 변화를 빨리 수용하다가는 교육, 국방 그리고 의료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한 검토시간을 갖고 늦게 변화한다. 그래서 병원 역시 상명하복의 철저한 위계질서가 지금까지 내려온다.
드라마 '하얀거탑'은 이런 병원 문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과장된 부분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때로 더 심한 일들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2014년 11월에 한국의료정책 연구소에서 나온 '전공의 근무 환경 및 건 강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수련 중 신체적 폭행을 당한 경험은 22.0%로서, 폭행을 행한 대상으로는 환자가 36.9%로 가장 많았고 상급전공의 28.4%, 교수가 21.9%로 뒤를 이었다.
저연차 시절, 나 역시 맞으면서 수련했다. 의사들이 맞으면서 성장한다는 현실은 이름 모를 변방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의 대형종합병원에도 버젓이 일어난다.
폭행을 경험하니 병원에서는 세계 일류 의료 수준이라고 하면서 선진국 병원들과 비교하지만 병원 문화는 그보다 뒤떨어진 것이 우습고 위선적이라 생각했다. 선진국 수준의 의료 수준을 뽐내고 싶으면 그만큼의 병원 내 의료 문화를 개선하려는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
살림꾼으로 일했던 액팅 치프 기간 동안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아랫 연차가 잘못하면 내가 잘못 관리하고 지도해서 그런 것 같았다.
한 친구가 더 이상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연락을 두절한 채 도망간 적이 있었다. 도망간 1년차 선생을 찾는다고 레지던트들이 경의실, 주차장, 치료실 등 숨을 만한 곳을 다 뒤지며 다녔었다.
좋은 문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되는 기회였다. 나 역시 고연차가 되니 올챙이 적 생각 못하고 저연차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란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 그 친구는 돌아왔고 무사히 수련을 하고 있다. 내가 치프일 적 아랫 연차 선생들이 수련을 마치고 졸업하면 내가 훌륭한 치프였는지 나쁜 치프였는지 진솔한 평가를 듣고 싶다.
※본문에 나오는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동의를 통해 그의 저서 '성형외과 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레지던트는 연차로 구별하기도 하지만 저연차는 주치의, 고연차는 치프(chief)로 구분하기도 한다. 영어로는 '치프 레지던트', 우리말로 '수석 전공의'는 레지던트 중 경력이 가장 높은 의사를 칭한다.
이런 수련제도는 역사도 제법 깊다. 1892년 존스 홉킨스 병원의 외과 과장을 역임했던 윌리엄 홀스테드 박사가 이 수련체계를 확립시켰다. 당시 수련의들의 연차가 올라가면서 더 많은 책임을 지고 고연차가 될수록 수가 적어지는 경쟁적인 외과의사 체계를 만들어서 치프 레지던트는 그해 한 명만 맡았다고 한다.
현재는 4년차를 '치프 레지던트'라 부르고 3년차는 '바이스 치프(Vice chief)'라 칭한다. 의과대학 실습 중에 만났던 4년차 치프 선생님들은 모르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언제 저렇게 치프가 되나 싶었다.
그만큼 3년의 수련 기간 동안 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는 영예로운 자격이다. 그래서 '수석 전공의'라는 직책에서 오는 무게감은 묵직했다.
저연차 때는 정해진 일정만 소화하기도 바쁜 날들이지만 고연차 치프가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처방이나 기록 업무에서 해방되고 수술이나 진료에 집중할 수 있다. 수술실에서도 첫 번째 어시스턴트로 집도의 교수님과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때로는 집도의 자리에 서기도 한다.
그만큼 치프의 의견은 의국 내에서 존중받는다. 한마디로 레지던트들의 대표자다. 하지만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레지던트 사이의 업무를 조율하고 후배 레지던트 교육에도 책임이 있다.
4년차 수련 때는 4년차 레지던트가 4명이었다. 그래서 모두 '치프'라고 불렸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격인 치프를 '메인 치프(main chief)'또는 '액팅 치프(acting chief)'로 뽑아서 번갈아가면서 수행했다. '액팅 치프'가 역사적인 초창기 치프에 해당한다고 봐야 하는데 의국의 살림꾼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일반 회사들도 그렇지만 종합병원 의국 역시 각종 행사가 많다. 학술대회, 원내 교육일정, 회식, 인턴이나 의과대생 관리 등. 의국 행사 때마다 액팅 치프가 나서서 조율한다. 회식 장소를 섭외하거나 지방 학술대회 시 묵을 숙소를 정하고 원서를 구입하거나 회식할 때 필요한 비용을 관리한다.
권한이 많아지는 만큼 귀찮은 일도 많지만 의국을 이끌어나가는 데 업무만큼이나 살림살이가 중요하다.
4년차 막바지에 이르러 액팅 치프가 되었다. 서는 위치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는 말이 실감났다. 액팅 치프가 힘든 건 삐뚤어지기 쉬운 1년차들을 다독이면서 레지던트들을 이끌어나가는 일이다.
1년차가 삐뚤어지면 그 선생이 맡은 일만 구멍나는 것이 아니라 연쇄작용처럼 모두가 힘들어진다. 수술실에서는 칼같이 업무가 구분되지 않 아서 일손이 필요하면 1년차는 부림을 당했기에 늘 불만이 많아 삐뚤어지기 쉽다.
같은 고연차끼리는 아무리 액팅 치프여도 일방적으로 내 지시에 따르게 할 수는 없다. 의국 운영과 업무에 대한 생각이 각자 다르니 이를 잘 따르게 하는 것도 고역이다.
"아랫 연차는 빡세게 굴려야 일이 잘 돌아간다"고 얘기하며 자고로 아랫 사람은 윗사람을 편하게 잘 모셔야 된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레지던트들도 있다.
반대로 지금 사회 에서 연차 구분은 업무 구분이지 1년차나 4년차나 모두 평등하게 자기 맡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레지던트들도 있다. 생각이 다른 만큼 사건 사고가 일어나면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1년 내내 의국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사건 사고가 일어나면 일이 비효율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가장 큰 책임을 진 윗사람이 가장 늦게 보고받는 풍토 때문이다.
종합병원도 마찬가지여서 1년차가 문제를 확인하면, 2년차에게 알리고 그러면 2년차가 3년차와 상의하고 마지막에 치프가 보고 받는다. 보고받은 치프는 상황에 따라 교수님께 보고하는데 간혹 결정을 늦추면 이미 제 때 해결하기엔 시간이 지나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야! 그런 것까지 나한테 직접 보고하냐? 너는 보고체계도 없어? 나한테 이런 소리하기 전에 밑에서 좀 알아서 해결하란 말이야!"
이런 짜증을 한 번 듣고 나면 보고하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진다. 해결되어야 할 일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는 이유도 그렇다. 그래서 하찮은 일일지라도 아랫 연차와 윗연차의 딱딱한 소통의 벽을 허물고 싶었다.
바뀌지 않는 원내 문화
동기들과 고연차가 되면 바꾸고자 했던 노력은 이런 부분이 많았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늦게 변화하는 곳은 학교와 군대, 병원이라고 얘기한다. 변화를 빨리 수용하다가는 교육, 국방 그리고 의료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한 검토시간을 갖고 늦게 변화한다. 그래서 병원 역시 상명하복의 철저한 위계질서가 지금까지 내려온다.
드라마 '하얀거탑'은 이런 병원 문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과장된 부분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때로 더 심한 일들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2014년 11월에 한국의료정책 연구소에서 나온 '전공의 근무 환경 및 건 강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수련 중 신체적 폭행을 당한 경험은 22.0%로서, 폭행을 행한 대상으로는 환자가 36.9%로 가장 많았고 상급전공의 28.4%, 교수가 21.9%로 뒤를 이었다.
저연차 시절, 나 역시 맞으면서 수련했다. 의사들이 맞으면서 성장한다는 현실은 이름 모를 변방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의 대형종합병원에도 버젓이 일어난다.
폭행을 경험하니 병원에서는 세계 일류 의료 수준이라고 하면서 선진국 병원들과 비교하지만 병원 문화는 그보다 뒤떨어진 것이 우습고 위선적이라 생각했다. 선진국 수준의 의료 수준을 뽐내고 싶으면 그만큼의 병원 내 의료 문화를 개선하려는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
살림꾼으로 일했던 액팅 치프 기간 동안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아랫 연차가 잘못하면 내가 잘못 관리하고 지도해서 그런 것 같았다.
한 친구가 더 이상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연락을 두절한 채 도망간 적이 있었다. 도망간 1년차 선생을 찾는다고 레지던트들이 경의실, 주차장, 치료실 등 숨을 만한 곳을 다 뒤지며 다녔었다.
좋은 문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되는 기회였다. 나 역시 고연차가 되니 올챙이 적 생각 못하고 저연차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란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 그 친구는 돌아왔고 무사히 수련을 하고 있다. 내가 치프일 적 아랫 연차 선생들이 수련을 마치고 졸업하면 내가 훌륭한 치프였는지 나쁜 치프였는지 진솔한 평가를 듣고 싶다.
※본문에 나오는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동의를 통해 그의 저서 '성형외과 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