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 다 불태워서 더는 없다.'
얼마전, 연말 술 한잔을 기약했던 오랜 벗이자 기자의 취재원이기도한 대학병원 외과계 전임의(펠로우)로 근무 중인 친구 A씨를 만났다.
이제막 둘째 아이를 본 두 딸들의 아빠였다. 또 막연한 기대감에 밤낮없이 의국내 각종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어려운 형편에 대학원 공부까지 쉽사리 놓지 못하는 교수 취준생이기도 했다.
처음 의사면허를 따고 전공의를 마친 뒤 개원이나 봉직의를 꿈꾸기엔 그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가끔 대면하는 자리마다 꽉찬 수술 스케쥴과 몰아치는 당직근무, 연구 논문 등 잡다한 일거리로 한껏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지금 당장은 봉직의로 뛰거나 개원을 하고 진료를 보기에는 겁이 난다"는게 그의 유일한 핑계이자 자위였다.
그렇게 잡혔던 술약속은 번번이 취소되기 일쑤였고, 언제나처럼 사정상을 이유로 뒷날로 미뤄지다 결국은 올해가 저무는 연말께가 되어서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모처럼 자리한 그의 얼굴에는 부쩍 핏기가 없어 보였다. 안색이 왜그렇냐며 툭 던진 말에 돌아온 답변은 이랬다. 언제부턴가 스트레스가 쌓일때면 자기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는 과호흡 증상이 잦아졌다고 했다. 공황장애가 생긴건지 가끔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참아내기 버겁다고 말끝을 흐렸다.
걱정은 이어졌다. 최근엔 예전 수련병원 동기 중 한 명이 회진을 돌고 학회 논문 발표를 준비하다가 간밤에 뇌출혈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다들 단순히 피곤해서, 평소보다 늦잠을 자나보다 생각했지만 아닌 밤중에 동료가 목숨을 잃었다는데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나는 괜찮을까. 아마 괜찮겠지'라는 자조섞인 말은 그의 입에서 쉽사리 떠나질 않았다.
남들 다쉬는 빨간날, 아이들과 손잡고 집앞 놀이터에 나가는 시간을 쪼개기조차 어려웠다. 잡혀있는 공휴일 회진이나 학술연구, 대외활동에 잔업이 허다했기 때문. 이렇다할 근무시간 기준도 없고 불만도 티를 내지 못하는 전임의 A씨의 삶의 질이 친구로서 걱정스러웠다. "애도 커가고, 다 내가 선택한 일인데. 그래도 별다른 수가 없으니까."
얼큰히 술에 취해갈 즈음, 다시 병원에서라도 쪽잠을 좀 자야겠다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는 그의 모습이 그날따라 더 무거워보였다.
이렇게 의사 1인당 내원환자 수 세계 최대치를 나타내는 번아웃에 빠진 국내 의료현실은, 주변 곳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대형 대학병원에 진료를 받으려면 주차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포화상태가 심각한데다, 전공의 80시간 근무제 제한 등 보완책이 나왔음에도 돼려 일은 여기저기 분산되며 과중한 업무강도는 또 누군가의 목을 여전히 죄고 있다.
올해 매체 조사결과에서도 전국 94개 수련병원에 근무하는 전공의들 역시 번아웃 상태는 심각한 수준을 보였다. 업무 중 '평균적으로 주 2회 이상'은 번아웃 증후군의 증상들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워라밸을 좇는 현상과 함께, 현재 국내 진료현장에 가장 큰 위기는 의료진의 번아웃"이라고 지적한 한 원로교수의 쓴소리도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지표인 셈이다.
뉴욕의 정신분석가 프로이덴버거 박사가 쓴 '상담가들의 소진(Burnout of Staffs)'이라는 연구 논문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번아웃 증후군. 일부 전문가들의 무기력함을 지칭했던 해당 용어는, 이제 직역을 막론하고 모든 의료현장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주요 이슈가 돼버렸다.
국내외 의료전문매체에서 꼽는, 한해를 관통하는 의료 키워드 가운데엔 번아웃이란 세글자가 꾸준히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환자 중심과 정밀검사로 유명한 글로벌 메이오 클리닉(Mayo Clinic)도 2019년 연말 의료진들의 번아웃 실태를 지적한 대규모 조사결과를 공개했다. 국내에서도 내과 및 외과, 검진학계 등 주요 학술대회에서는 빠지지 않는 주제로 '의사들의 과도한 번아웃 상황'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되고 있어 그저 안타까움을 더할 뿐이다.
올한해 의료계에서는 진료를 보던 의료진이 환자의 흉기에 의해 사망하거나 '묻지마 폭행', 과로사 등 우울한 뉴스들이 끊이지 않고 터져나왔다. 단순히 정부 규제와 저수가 문제로만 바라봐야할 사건들이 아니다. 확실한건 의사들은 번아웃 상태다.
단순히 우울하다는 감정의 표현을 넘어 에너지 고갈상태가 반복되는 진료현장에서, 이렇게까지 번아웃된 의료진들의 안녕(安寧)은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의사 그들도 누군가의 아빠이자 엄마, 아들과 딸이었으며 추억많은 오랜 벗 중 하나기도 하다.
돌아오는 새해, 당신이 마주한 의료진들에 '안녕하신가' 한 번쯤 물어볼 때이다.
얼마전, 연말 술 한잔을 기약했던 오랜 벗이자 기자의 취재원이기도한 대학병원 외과계 전임의(펠로우)로 근무 중인 친구 A씨를 만났다.
이제막 둘째 아이를 본 두 딸들의 아빠였다. 또 막연한 기대감에 밤낮없이 의국내 각종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어려운 형편에 대학원 공부까지 쉽사리 놓지 못하는 교수 취준생이기도 했다.
처음 의사면허를 따고 전공의를 마친 뒤 개원이나 봉직의를 꿈꾸기엔 그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가끔 대면하는 자리마다 꽉찬 수술 스케쥴과 몰아치는 당직근무, 연구 논문 등 잡다한 일거리로 한껏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지금 당장은 봉직의로 뛰거나 개원을 하고 진료를 보기에는 겁이 난다"는게 그의 유일한 핑계이자 자위였다.
그렇게 잡혔던 술약속은 번번이 취소되기 일쑤였고, 언제나처럼 사정상을 이유로 뒷날로 미뤄지다 결국은 올해가 저무는 연말께가 되어서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모처럼 자리한 그의 얼굴에는 부쩍 핏기가 없어 보였다. 안색이 왜그렇냐며 툭 던진 말에 돌아온 답변은 이랬다. 언제부턴가 스트레스가 쌓일때면 자기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는 과호흡 증상이 잦아졌다고 했다. 공황장애가 생긴건지 가끔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참아내기 버겁다고 말끝을 흐렸다.
걱정은 이어졌다. 최근엔 예전 수련병원 동기 중 한 명이 회진을 돌고 학회 논문 발표를 준비하다가 간밤에 뇌출혈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다들 단순히 피곤해서, 평소보다 늦잠을 자나보다 생각했지만 아닌 밤중에 동료가 목숨을 잃었다는데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나는 괜찮을까. 아마 괜찮겠지'라는 자조섞인 말은 그의 입에서 쉽사리 떠나질 않았다.
남들 다쉬는 빨간날, 아이들과 손잡고 집앞 놀이터에 나가는 시간을 쪼개기조차 어려웠다. 잡혀있는 공휴일 회진이나 학술연구, 대외활동에 잔업이 허다했기 때문. 이렇다할 근무시간 기준도 없고 불만도 티를 내지 못하는 전임의 A씨의 삶의 질이 친구로서 걱정스러웠다. "애도 커가고, 다 내가 선택한 일인데. 그래도 별다른 수가 없으니까."
얼큰히 술에 취해갈 즈음, 다시 병원에서라도 쪽잠을 좀 자야겠다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는 그의 모습이 그날따라 더 무거워보였다.
이렇게 의사 1인당 내원환자 수 세계 최대치를 나타내는 번아웃에 빠진 국내 의료현실은, 주변 곳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대형 대학병원에 진료를 받으려면 주차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포화상태가 심각한데다, 전공의 80시간 근무제 제한 등 보완책이 나왔음에도 돼려 일은 여기저기 분산되며 과중한 업무강도는 또 누군가의 목을 여전히 죄고 있다.
올해 매체 조사결과에서도 전국 94개 수련병원에 근무하는 전공의들 역시 번아웃 상태는 심각한 수준을 보였다. 업무 중 '평균적으로 주 2회 이상'은 번아웃 증후군의 증상들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워라밸을 좇는 현상과 함께, 현재 국내 진료현장에 가장 큰 위기는 의료진의 번아웃"이라고 지적한 한 원로교수의 쓴소리도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지표인 셈이다.
뉴욕의 정신분석가 프로이덴버거 박사가 쓴 '상담가들의 소진(Burnout of Staffs)'이라는 연구 논문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번아웃 증후군. 일부 전문가들의 무기력함을 지칭했던 해당 용어는, 이제 직역을 막론하고 모든 의료현장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주요 이슈가 돼버렸다.
국내외 의료전문매체에서 꼽는, 한해를 관통하는 의료 키워드 가운데엔 번아웃이란 세글자가 꾸준히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환자 중심과 정밀검사로 유명한 글로벌 메이오 클리닉(Mayo Clinic)도 2019년 연말 의료진들의 번아웃 실태를 지적한 대규모 조사결과를 공개했다. 국내에서도 내과 및 외과, 검진학계 등 주요 학술대회에서는 빠지지 않는 주제로 '의사들의 과도한 번아웃 상황'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되고 있어 그저 안타까움을 더할 뿐이다.
올한해 의료계에서는 진료를 보던 의료진이 환자의 흉기에 의해 사망하거나 '묻지마 폭행', 과로사 등 우울한 뉴스들이 끊이지 않고 터져나왔다. 단순히 정부 규제와 저수가 문제로만 바라봐야할 사건들이 아니다. 확실한건 의사들은 번아웃 상태다.
단순히 우울하다는 감정의 표현을 넘어 에너지 고갈상태가 반복되는 진료현장에서, 이렇게까지 번아웃된 의료진들의 안녕(安寧)은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의사 그들도 누군가의 아빠이자 엄마, 아들과 딸이었으며 추억많은 오랜 벗 중 하나기도 하다.
돌아오는 새해, 당신이 마주한 의료진들에 '안녕하신가' 한 번쯤 물어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