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학술팀 이인복 기자
정부가 올해부터 시작된 2등급 의료기 공급내역보고 행정 처분을 1년간 유예하기로 했다. 이로서 7월로 정해진 보고를 포기했던 기업들도 1년의 시간을 벌게 됐다.
정책 강행 의지를 보이던 정부가 급격하게 행정 처분 유예를 결정한 것은 당장 득보다 실이 많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정부는 이번 행정 처분 유예의 배경으로 기업들의 업무 부담을 언급했다. 하지만 이러한 업무 부담에 대한 호소는 제도가 시행된 2년전부터 지속된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부의 태도는 강경했다.
그러한 면에서 이미 행정 처분 대상이 확정된 시점에 갑작스레 처분을 유예한 것은 또 다른 배경이 있어 보인다. 사실 그 배경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의료기기 공급내역보고는 의료기기 유통 구조 개선을 위해 2020년부터 시행된 제도로 말 그대로 의료기기의 유통 내역을 하나하나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보고하도록 의무화한 정책이다.
제조·수입사에서 기기가 생산, 수입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도매상, 소매상, 의료기기 대리점, 간납사, 의료기관 등으로 의료기기가 입출고될때마다 그 주체가 일일히 이를 입력하도록 조치한 셈이다.
사실 제도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정부와 기업들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의료기기 유통 구조가 워낙 복잡하고 다양해 이에 대한 추적과 관찰에 늘 어려움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의료기기'로 통칭되는 제품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다는데 있다.
실제로 정부는 2020년 가장 위험성이 높은 4등급 의료기기부터 시작해 2021년 3등급, 2022년 2등급, 2023년 1등급으로 단계적 확대를 예고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올해는 2등급 의료기기가 대상이 됐다.
3, 4등급의 의료기기들은 인체에 삽입, 이식되거나 생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공급내역보고에 대해서는 기업들도 이견을 내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1, 2등급의 의료기기는 이들도 할 말이 많다. 실제로 이들 품목들을 보면 안경 렌즈나 콘텐트렌즈, 마스크, 체온계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수술 등에 필요한 3, 4등급 의료기기와 달리 사실상 전자기기와도 경계가 모호한 제품들이 많다는 의미다. 일부 의료기기 기업들이 1, 2등급 의료기기를 제약산업과 비교해 건강기능식품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보니 이 등급의 의료기기들은 제조사와 수입사가 천차만별이며 이를 유통, 판매하는 곳도 수도 없이 많은 상황이다.
특히 이들 제품은 포장 자체가 1, 2개 들이 소포장이라는 점에서 취급점에서 여러 제조, 수입사의 제품을 소량씩 유통하고 있다.
굵직한 기업들이 대량으로 공급, 유통하는 3, 4등급 의료기기에 비해 하나하나 일일히 보고해야할 항목들이 많아 업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이로 인해 의료기기 제조, 수입사와 유통기업들은 공급내역보고 제도가 시행되기 전부터 이러한 사항들을 지적해 왔다. 제도의 취지를 감안한다면 3, 4등급 의료기기만 대상으로 해도 충분하다는 지적이었다.
또한 만약 1, 2등급 의료기기는 사실상 인체에 주는 영향이 적다는 점에서 확대 시행을 하더라도 3, 4등급에 대한 진행 상황과 업무량 등을 확인하면서 제도를 보완하자는 타협책도 내놨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제도는 원안대로 진행됐고 결국 2등급 의료기기에 대한 보고 의무화가 시작된 올해 마침내 문제들이 터져나왔다. 도저히 업무를 감당하기 힘든 기업들이 말 그대로 포기를 선언한 것이다.
실제로 일부 기업들은 공급내역보고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며 차라리 과태료를 맞겠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그나마 의지가 있는 기업들은 그나마 인력과 예산 등에 여유가 있는 제조, 수입사에 이에 대한 업무 처리를 호소하거나 그나마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다음 유통처에 대신 업무를 진행하라며 압력을 가하고 있다. 속칭 갑질이다.
정부가 급하게 2등급 의료기기에 대한 공급내역보고 행정 처분을 유예시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원칙대로 하자면 무더기로 행정 처분을 내려야 하는데 이에 대한 부담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문제는 올해 2등급 의료기기에 대한 처분이 미뤄졌다해도 내년도 1등급 의료기기에 대한 보고 절차가 남았다는 점이다.
2등급 보다 품목도 많고 유통 기업도 다양하다. 2등급 의료기기 공급내역보고에서 나타난 문제들이 더욱 다양하고 복잡하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의미다. 악순환이 악순환을 부르는 꼴이다.
이러한 '선 시행 후 보완' 정책들은 늘 감당하기 힘든 후폭풍을 불러왔다. 의료계가 반대한 CT, MRI 급여화를 강행하면서 검사 건수가 1000% 이상 뛰어오른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가격이 싸지면 수요는 물린다. 너무나 당연한 인과관계를 외면한 결과다.
산불은 예방이 최우선이다. 불이 났을때를 대비해 수십가지 메뉴얼을 만드는 것보다 징조를 무시하지 않는 사전 조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미 징조는 현실이 됐고 남은 방법은 그 불이라도 끄는 것 뿐이다. 말 그대로 '선 시행 후 보완'. '선 산불 후 진화'다.